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아버지나 어머니로부터 야단맞을까 봐 늘 걱정이 많았습니다.
1950~60년대 초반까지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서 물자가 매우 귀한 시절이었습니다. 전기도 마음껏 쓸 수 없던 시절이었지요. 제한송전이라고 해서 정해진 시간만 전기가 공급되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시던 아버지 어머니 덕분에 우리 집에는 축음기와 라디오가 있었습니다. 소리가 난다는 것이 참 신기해서 나는 그 속이 늘 궁금했습니다. 축음기는 뚜껑을 열어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내부를 잘 볼 수가 있었죠. 그래서 궁금함이 없었지만, 라디오는 열어 볼 수가 없는 기계였습니다.
아버지께는 드라이버나 뻰치와 같은 연장도 있으셨고, 집안의 물건들을 손수 만드신다든지 수선하셨지요. 그렇다고 아버지가 전기수리를 하시는 분은 아니셨고, 화학을 전공하셨기 때문에 그 분야의 일을 하셨습니다.
호기심은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힘이 크지요. 아마도 뇌에서 도파만이 쏟아지기 때문일 겁니다. 즐거움을 기대하게 하는 호르몬이기 때문이죠.
부모님께서 집을 비우신 어느 날, 나는 라디오를 열어보기로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지만,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았기 때문에 드라이버 정도는 어렵지 않게 다룰 수가 있었지요.
드라이버로 나사못을 풀었죠.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입니다)
뒷 판을 열었는데, 유리관에 벌건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진공관이었습니다.)
어떻게 소리가 났지? 궁금함은 더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진공관을 소켓에서 꺼내어 봤지요. 소리가 멈추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이제 야단 났구나 생각을 했지요. 고장 나게 해 버렸으니 말입니다. 일단 원래의 위치에 꽂아 놓으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운 좋게 맞아서 진공관이 제자리에 꽂혔습니다. 소리가 다시 나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나 문제가 남았습니다. 서투른 솜씨로 나사못을 빼다 보니, 그 주위가 많이 긁혀 있었거든요. 아버지께서 모르실 리가 없을 텐데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이버지가 들어오실 시간이 되어가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들어오시면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걱정이 가득했지요.
드디어 아버지께서 퇴근하시고 들어 오셨습니다. 아들 셋은 현관으로 나가서 아버지를 맞이했지요.
"다녀오셨어요?" 세 아들이 합창을 했습니다. 모두 행복한 얼굴로 말이죠. 내 속은 조마조마했지만, 아버지는 모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늘 바쁘신 분이라서 라디오 뒤쪽을 보실 틈이 없었는지, 무사히 넘어갔습니다.
열어 봐도 목소리가 나오게 할 만한 부분이 보이지 않는데 궁금증은 점점 더 커가더군요.. 그러나 진공관을 깨 볼 수도 없어서 그대로 지낼 수밖에 없었지요.
라디오에서 소리가 어떻게 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기 시작한 것은 국민학교 4학년 말이었습니다. 실과 교과서에 광석라디오 만드는 챕터가 있었거든요. 몇 푼 안 되는 용돈이었지만, 군것질보다는 부속 사는 게 더 좋았지요. 당시에는 문방구에서 광석라디오 키트를 판매했기 때문에 사서 조립을 해 보았습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본 라디오였습니다.
호기심은 군것질도 멈추게 한다
내 호기심을 끝이 없어서, 용돈만 생기면 뭔가를 샀지요. 만화가게에 가고 싶었지만, 궁금증 푸는 게 먼저였거든요. 자주 종로에 나가서 시험관과 플라스코, 비커, 알코올램프를 사서 이것저것을 섞어가며 놀았습니다.
중학교 2학년 시절부터는 등사기와 가리방, 철필, 등사원지를 사서 집에서 학급신문을 만었고(주 1), 반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을 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호기심에서 시작한 것이죠.
용돈은 거의 이런 것에 쓰였습니다. 그런데 용돈이 몇 푼 되지도 않았는데 등사기라든가 가리방 등등을 살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물가가 참 쌌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호기심을 쫓아 살다 보니, 내 주머니는 늘 비어 있었습니다. 아들만 넷인 가정이니, 어머니께서 네 아들에게 용돈을 주신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에게는 넉넉하게 주셨지만, 나는 늘 쓸 돈이 없었죠. 그런데 내 바로 밑의 동생은 언제나 넉넉했습니다. 많이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는 용돈을 아끼고 저금을 했거든요.
하루는 사고 싶은 것이 있는데 주머니에는 한 푼도 없었습니다. 나는 동생 책상의 설합을 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속에는 적지 않은 돈이 있었기 때문이죠. 드라이버로 경첩을 풀어내고 설합을 열었지요. 예상한 대로 종이돈이 수북하게 쌓여 있더군요. 내 용돈의 일 년 분도 넘을 만큼 많았습니다. 한 두어 장 꺼내어 써도 티가 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되더군요.
설합을 원상 복귀해 놓고 사고 싶었던 것을 사가지고 내 방으로 들어갔지요.
호기심도 때로는 나쁜 짓을 하게 만든다
저녁에 어머니께서 부르셨습니다. 손에는 회초리가 들려 있었지요.
한 번도 회초리를 맞은 적이 없는데, 그날은 종아리를 여러 차례 맞았습니다.
정말 아팠습니다. 종아리에는 회초리 자국이 깊게 새겨졌지요.
어머니께서는 내 종아리에 난 상처 때문에 마음 아파하셨던 것 같습니다.
"용돈을 좀 넉넉히 주셨으면 내가 동생 돈을 꺼냈겠어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요.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내가 아이를 키워 보니, 네 명의 아들을 키우시는 어머니로서는 나에게 주신 용돈도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더군요.
내가 남의 것에 손을 댄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호기심은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것
내가 공부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호기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바로 행동으로 옮겼죠.
학업에 필요한 것이 생기면 어머니께 얼마나 재촉을 했는지 모릅니다. 살 돈을 늦게 주시는 것이 참 야속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많이 미안한 마음입니다.
사실 공부보다는 호기심 채우기가 늘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숙제는 늘 뒤로 밀렸지만 뭔가를 늘 하고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에 호기심이 생기면 그 과목은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관심이 없는 과목은 가끔 어머니를 화나게 했지요.
남자 사형제(四兄弟)라고 말씀드렸지만, 나와 같은 호기심을 가진 형제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온갖 잡동사니를 쌓아놓고 사는 나를 부모님은 한 번도 뭐라고 하지 않으셨거든요. 내가 여러 가지를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런 가정환경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주 1) 과거에 학교에서 시험지를 인쇄할 때는 등사기를 사용했습니다. 등사원지라는 용지를 가리방이라고 부르는 쇠판에 올려놓고 철필이라는 도구로 글씨를 쓰고 나서 등사기에 올려놓고 롤러에 잉크를 묻혀서 인쇄를 합니다. 아래의 링크를 참고하시면 당시의 인쇄에 관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ncms.nculture.org/iron-culture/story/9109?js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