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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진 Aug 09. 2024

의재 허백련의 삶과 예술 자료전

24-6-6 ~ 10.27  광주 의재미술관 1,2 전시실


광주를 떠올리면 시내를 묵직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무등산이 있습니다.

무등산은 비할 데 없이 높은 산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전반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토산으로서 덕이 있는 느낌을 풍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광주는 넉넉하고 너그러운 느낌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그 무등산의 산자락에는 남종화를 이어 오고, 또 민족정신의 함양을 위해서 평생을 살다 간 의재 허백련 선생의 자취가 어려 있습니다.


북구의 학동 3거리를 기점으로 성촌마을 입구까지 이어지는 2.5km의 도로는 의재 허백련을 기념하여 '의재로'입니다.  의재 허백련의 동상을 시작으로 연진회 미술원, 의재미술관, 춘설헌,  의재 묘소가 그의 자취를 느끼게 합니다. 


선생이 머물던 무등산 자락인 운림동은 제2의 예술의 거리로 불리며 무등산 아트밸리가 되어 있고, 의재 미술관 주변에는 무등현대미술관, 국윤미술과, 우제길미술관, 전통문화관 등이 들어서 있습니다.


예술의 도시 광주


광주는 예로부터 예향(藝鄕)으로 불렸습니다. 식당에만 들어가도 벽에는 그림이 걸려 있더라는 고장이 바로 광주입니다. 그리고 허백련(1891~1977)은 예향 광주의 뿌리이자 예향 광주의 오늘을 있게 한 큰 존재입니다.


의재 허백련은 추사 김정희(1786~1856), 소치 허련(1808~1893), 미산 허형(1862~1938)으로 이어지는 남종화의 맥을 계승하고 최후의 꽃을 피웠습니다.




지난 6월 6일부터 의재미술관에서는 '의재 허백련의 삶과 예술 자료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10월 27일까지 열릴 전시회는, 의재 허백련 선생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귀한 기회입니다.




의재미술관은 2001년 11월 7일,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에 개관된 의재선생의 회화와 사상을 전승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광주시민의 적극적인 노력과 의재문화재단에 의해서 개관되었습니다.



의재미술관의 입구, 정면에 미술관이 보인다. 
의재미술관 전경. 오른쪽에는 의재 허백련의 춘설차를 재배하는 다원이 있다.


의재미술관은 건축물로서도 매우 아름다워서,  2001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의재 허백련은 근현대기 남종문인화가로 1891년 진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서당 공부와 묵화를 익혔던 그는 1912년 법률 공부를 위해 일본에 갔으나, 어릴 적 익히 들었던 역대 문인화가들의 그림을 직접  보고는 화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화가로서 이름을 얻고 전국을 주유하던 그는 1937년 광주에 정착하였고, 이듬해 전통서화 진작과 후진 양성을 목표로 연진회를 발족하였습니다.


매주 모여 서화를 논하는 연진회 회원들의 문기(文氣) 어린 분위기 무르익어가면서,  광주에 글과 그림을 아끼는 풍조가 자리 잡아갔습니다. 그는 시(詩) 서(書) 화(畵)를 겸한 남종화가로서 담담하면서도 품격 있는 화풍으로 근현대 화단을 이끌어 갔습니다.



의재 허백련이 기거하던 춘설헌


허백련은 무등산 춘설헌에서 그림을 그리는 한편 농업학교를 세워 농업지도자를 길러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증심사 뒤편의 차밭을 일구어 춘설차(春雪茶)라 이름하여, 차를 마시면서 마음을 닦고 이를 보급하는데도 힘썼습니다. 

70대 후반에는 이념에 의해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무등산에 단군신전 건립을 위해 앞장섰고, 모든 일의 근저에는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을 사랑하자는 삼애사상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그림으로 자신을 완성해 가는 한편, 격변의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지혜를 가르치고 이끌었던 시대의 큰 어른이었습니다.


오늘은 의재미술관 1층에 전시되어 있는 것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의재의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화가 최치국의 '의재 허백견 초상'  - 의재가 즐겨 사용하던 화론이 함께 적혀 있다


"전시실 내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문구다. 삶은 숭고하며 그 자체로 고귀하다. 예술 또한 지고한 기질을 추구하는 과정이기에 소중하다. 혹여 삶은 예술처럼, 예술은 삶처럼 살라는 의미가 아닐지. 삶을 앞자리에 둔 것은 아무리 예술적 재능이 탁월하다 해도 사람됨. 본질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뜻인 것 같다."  -광주일보 박성천 기자


전시실에는 의재의 화실액자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연보, 인장 등이 전시되어 았습니다.


아래부터는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의재 허백련의 예술과 삶의 기록들을 순서대로 올리고, 자료에 대한 설명을 문서 박스에 옮겨 놓았습니다.


의재 허백련 연보


의재 인장


의재의 조선미술전람회(선전, 鮮展)의  수상 기사



1992년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일본의 문부성 전람회 제도를 본떠 조선미술전람회(선전:鮮展)가 만들어졌다. 이는 1920년대 초반 일제의 문화정치의 하나로 시행된 것으로, 후에 대만의 대만미술전람회의 본이 되기도 하였다. 선전은 1922년 1회부터 1944년까지 23회에 걸쳐 개최되었는데, 출품작품들을 사진으로 찍어 매년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을 만들었다. 현재는 1922년 1회부터 1940년 19회까지 총 19권이 남아 있다. 허백련은 제1회 선전에 <하경산수>와 <추경산수>를 출품하였다. <추경산수>는 최고상인 1등 없이 2등 상을 수상하였으면, <하경산수>는 입선을 하였다. 허백련은 1927년 6회를 끝으로 선전에는 더 이상 출품하지 않았다. 일본화풍이 만연하면서 남종화의 맥이 끊어질 것을 우려하였던 허백련은 1938년 연진회를 창설하여 남종화의 부흥운동에 앞장섰다.


석아정 오방정 현판
이현판은 광주광역시의 기념물 5호 '춘설헌(春雪軒)'의 유래와 역사적 변천을 살펴볼 수 있는 유물이다. 현판의 한 면에는 '석아정(石啞亭)이라는 글자가 양가각되어 있다.
여기에 20세기 초 광주의 개화기를 이끌었던 석아 최원순(石啞 崔元淳, 1896~1936), 오방 최흥중(五放 崔興宗), 1880~1966) 의재 허배련 세 사람의 남다른 사연이 담겨 있다.

최원순은 1919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부 유학시절 2.8 독립선언문을 이끌어 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애국지사로 귀국 후 동아일보 편직국장 서리까지 지냈다.
건강이 나빠지자 광주로 내려와 현재의 춘설헌 자리에 집을 지어 요양했다. 이때 걸었던 '석아정' 현판은 서예가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1~1936)가 쓴  것이다.

이후 최흥종은 최원순으로부터 석아정을 물려받아 '오방정'이라 이름 짓고 생활했다. 이때 허백련은 석아정이라 쓰인 현판 뒷면에 오방정 글씨와 매화 그림을 그려 넣었다.
최흥종은 허백련과 함께 농업학교 건립을 주도했으며, 일생을 나환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해방 이후 허백련은 소암 현중화(素菴 玄中和, 1907~1997)가 쓴 '춘설헌'이라는 현판을 걸고 기거하며 작품활동을 했다.

이와 같이 현판은 20세기 초 광주의 근현대사를 이끌었던 3인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공간의 표식이다.


연진회서


"예술을 닦는 사람은 반드시 그 참다운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일이요, 양생을 닦는 사람은 반드시 그 참된 근원을 보전하는 일이다. 우리 회가 예락을 바탕으로 서로 모여서 삶을 값지게 보내기 위해 '연진鍊眞'이라 이름을 지으니 그 누가 거짓이라 하겠는가?
무릇 사나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타고난 운명이 모두 같지 아니하여 혹은 몸이 관록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든가, 혹은 산간에서 나물 먹고 물 마시며 사는 즐거움을 맛본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품은 바는 다름이 없다.
 생전에 하는 일이 제각기 다르다. 지금 우리들은 이미 부귀를 구할 수 없으므로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대로 욕되지 않게 삶을 누리는 것이 다행일 것이다. 하물며 시 서 화 이 세 가지는 고금을 통하여 누구나 다 좋아하는 것이요, 또 마음이 맑고 깨끗해서 언제나 정직하고 겸손하며 자기 취향에는 예술을 사랑하는 뜻을 한데 모으기 위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서로 강론하고 토의하며 또한 익히고 닦으며 한가로운 담소로써 그 정을 나누고 또한 양생에도 어긋남 없이 도움이 된다면 참으로 三家三絶의 도를 닦았다 이를 것이다."

                                                                       1938년 동명東溟 노형규盧衡奎(1876~1947)


연진회 창립회원


1938년 지역 최초의 서화회인 연진회가 창립되자 광주 지역 서화가들을 비롯한 36명의 회원이 남종화 부흥운동의 취지에 공감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회원들 중에는 정재계 인사 등 서화를 애호하는 아마추어 동호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진회를 이끈 사람은 허백견이었고 대부분의 회원들은 그의 직접적인 지도에 감화되었다.
 허백련의 지도이념은 전통적인 남종화의 부흥이었다. 그는 남종화의 부흥만이 전통 회화의 계승이라고 믿었고, 이는 화가로서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 여겼다. 이 때문에 그는 개인적인 활동에 힘쓰기보다는 단체 활동을 확대해 나가야겠다는 사명의식을 갖고 모든 노력과 심혈을 기울였다.
 연진회 발기인에 서울의 이당 김은호와 소정 변관식이 찬조회원으로 참여한 것도 개인적인 친분에 의한 것이었지만 보다 폭넓은 서화가들의 호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가 광주에 정착하여 남종화의 부흥을 꾀한 이유 중의 하나는 지역의 문화와 정서에 의존한 바가 크다.
 호남은 조선 말기부터 소치 허련의 활동과 업적 등의 영향으로 남종화를 제작하고 가사하고 애호하는 분위기가 타 지역보다 강하게 나타났다.
 연진회는 창립되면서부터 광주 지역 서화교육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허백련의 지도 아래 다양한 서화가들이 배출되었고, 광주 지연게 남종화가 부흥되고 현대화단에까지 전통의 맥을 이어 나가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제1회 연진회 회원전 1939


춘설헌에서 제자들과 합작하는 허백련 1960년대 , "크게 칭찬도 꾸지람도 없으신 도인 같은 어른"


신문스크랩


구여도(九如圖) 1940, 종이에 수묵담채 136.0 x34.5cm)



경신년(1940) 봄 오방선생의 61수(壽)를 위해 백련이 그리다
오방 최흥종 목사와 허백련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방 최흥종은 광주 최초의 목사이자 광주 YMCA를 만들었으며 걸인, 나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함께 한 인물이다. 두 사람은 농업의 중요성을 공감하여 무등산에 농업학교를 만들어 운영하였다.
<구여도>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장(天保章)에 등장하는 시를 기반으로 하여 그려졌다. 시는  신하가 군주에게 아름다움을 돌려 보답하는 내용으로 "산과 같고 언덕과 같으며, 산마루 같고, 구릉과 같으며, 떠오르는 해와 같고, 남산의 오래 삶과 같고, 송백의 무성함과 같다."라고 하였다.
그림에는 산, 언덕, 구릉, 냇물, 해와 달, 소나무 등 시에서 칭송하는 소재들이 등장한다. 천보구여는 신하가 군주의 덕을 칭송하는 시에서 유래하였지만, 점차 윗사라람의 덕을 칭송할 때도 사용되었다. 이 그림에서는 오방 최흥종의 회갑을 맞아 그의 덕과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양화 6대가전 신문기사



서울신문창간 26전 기념 <동양화6대가전> 기념사진
서울신문 창간 26주년 기념, 동양화 6대가전>이 서울신문회관 화랑에서 1972년 12월 7일까지 개최되었다. 
한국 근대 동양화의 역사적 화가인 허백련, 김은호, 박승무,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인 전시는 이 전시가 처음이었다. 
사닌 앞줄 왼쪽부터 이당 김은호, 의재 허백련, 뒷줄 왼쪽 심산 노수현, 소정 변관식, 심향 박승무, 청전 이상범은 병환으로 함께 하지 못했다,



춘설헌에서 제자들과 함께, 1970년대
앞줄 왼쪽부터 김춘, 김화래, 허산옥, 김경애, 허백련의 손자 허달재, 박경선(농업학교 제자),
두 번째 줄 왼쪽부터 최영자, 허백련의 아내 성연옥, 허백련, 허의득,
세 번째 줄 왼쪽부터 장금순, 박소영, 남경의, 허규, 이범재, 김옥진, 이창수
네 번째 줄 왼쪽부터 문장호, 김승희, 오른쪽 두 번째부터 오우선, 이상재,
 마지막 줄 왼쪽부터 박행보, 최덕인, 오른쪽 두 번째 장찬홍



신문스크랩



연진회 미술원 현판



의재 허백련이 타계한 1년 후인 1978년 춘설헌 제자들이 모여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교사(校舍)에 연진회미술원을 개원해 허백련의 가르침과 남종화의 정신을 계승하였다



의재 허백견 초상 -최치국, 종이에 수묵담채, 115x 32cm
대 허백련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고법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손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 고법과 내 손밖에 벗어나지 않는다. 금강저와 같은 필봉은 습관을 탈피하여야 한다"라고 하셨다.
후학 최치국이 절하며



82세 고령에도 붓을 잡던 모습(춘설헌 화실)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품品이다. 본래 화품이란 것은 기교가 있은 뒤에 그 기교를 초탈한 자유의 경지에서 나오는 법이다. 따라서 선인 대가들의 전통과 기교를 배우고 난 뒤라야 형상을 벗어난 영원한 생명의 자기 예술이 가능한 것이다."

"전통을 이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처음엔 고인古人을 본받았다 해도 안 달라질 수가 없는 건데, 그것을 성가成家라 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창조라는 말 잘 쓰는데, 창조라는 게 그렇게 아무나 해낼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내 그림이 없었다. 처음엔 미산米山그림과 같았고 후에는 소치小癡그림, 중국의 황대치黃大癡그림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내 그림은 미산 것도 소치 것도, 황대치 것도 아니다."

"개성은 어디까지나 전통 위에서 꽃 피워야 하며, 처음부터 자기 독단의 개성은 생명이 길지 못하다. 전통을 철저하게 갈고닦으면 자연 자기 것이 생기게 된다."

                                                                                           의재 허백련의 어록 중에서













의재 허백련의 작고를 알리는 신문기사들 1977.2.16


의재 허백련 전남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학위 수여식 1974


남용 김용구 백련단야, 130 x 32.5cm
남용 김용구는 남도의 서예가이다. 일본에서 건축을 공부했으며, 춘설헌을 설계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허백련은 무등산에 들어설 단군 신전을 상상하며 1973년에 , 단군신전 상상도>를 그렸다. 현재는 원본의 소재를 확인할 수 없고, <단군 무등산 허백련 헌납도록(1974)에 실려있



의재 허백련 근화성족槿花聖族, 124 x 31cm
근화성족槿花聖族
허백련이 단군 신전 건립에 힘을 기울일 때 직접 짓고 쓴 서예작품이다.
무궁화 피는 성스러운 민족 단군을 조상으로
걸출한 인물이 나는 영험한 땅 무등산
의도인



의재 허백련 홍익인간, 1971.  33.5 x 134.5cm
힘찬 의제 특유의 필체로, 글씨에 담겨 있는 그의 정신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의도인


의재 허백련 대풍 1976 , 69.3 s 70.2 cm
<대풍>은 전형적인 남도 농촌의 풍요롭고 여유로운 가을 모습을 이상적으로 보여준다. 농업학교를 운영하였던 허백련은 농경도를 많이 그렸다. 이 작품은 1976년에 그린 그의 최만년작이다.
화면 전반에 느껴지는 활기와 선명한 화면은 나이를 무색하게 하며 속된 기운 없이 골기(骨氣)만으로 툭툭 쳐내듯 써 내려간 글씨 또한 일품이다. 농업학교 설림 운영하며 농업 운동을 펼친 허백련이 꿈꾼 이상적 농촌의 모습을 <대풍>에서 재현한 것이다.

해를 검사한 태사가 이미 점찍었으니
비바람이 순서 따라 차례로 불어오니
이로부터 곡식 풍년 언제쯤 얻으려나
잘 알겠네. 팔월 게가 잠잘 때인 것을

병진년(1976) 가을 의도인

 

소전 손재형 삼애정신, 34 x 130.5cm


진도 출신의 근대 서예가인 손전 손재형이 한글로 쓴 '삼애정신'이다



삼애학회와 광주고등농업기술학교 현판



광주국민고등학교 제1회 졸업기념사진
증심사의 방 한 칸을 빌려 시작하였기 때문에 증심사 대웅전 앞에서 촬영하였다. 앞줄의 졸업생들과 중앙의 선생님들, 그리고 뒷줄의 내외빈이 함께 하였다. 중앙 왼편에서 첫 번째가 의재 허백련, 두 번째가 오방 최흥종이고 뒷줄의 왼쪽 첫 번재가 증심사 종산 스님이다.












의재 허백련, 수필 <춘설차.. 중앙일보 197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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