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또는 에세이 #18
옛 선인들은 말했다. 인생은 고해, 그러니까 고통의 바다라고. 그렇다. 삶에서 고통을 마주하지 않고 살아갈 순간은 몇 안 된다. 단지 우리가 너무 쉽게 잊는다. 편리한 교통시설, 주변에 넘쳐나는 군것질거리가 충분히 갖춰져도 해체되는 인간관계, 죄책감과 경쟁에서 뒤처질지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고통스러운 게 인생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연꽃처럼 피어나는 게 아름다워 붙인 또 다른 이름은 ‘삶’이다. 삶은 인간이라면 겪어야 하는 숙명이다. 난 우리의 이러한 운명에서 어떤 숭고를 느낀다.
이제 뜨거운 여름이다. 여름은 생명력의 계절이다. 그리고 곧 가을이 올 거다. 봄에 열심히 싹을 틔우고 그 새싹에선 꽃이 피고 그 꽃이 지고 열매를 맺어, 낙엽으로 쇠락하는 계절이. 달리 말하면 여름에 생명이 가뜩이나 넘치는 이유는 나머지 계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행과 고통도 나머지 계절이 있기 때문이다
간혹 아이들이 꽃잎이 떨어질 때쯤이면, 이왕 떨어질 거 빨리 떨어지라는 듯 흔들어 꽃잎을 떨군다. 아이들이 생명력이 넘치기 때문인지 몰라도, 성숙한 사람들은 떨어지는 꽃잎을 그저 바라보는 게 오로지 지금뿐이란 것을 안다. 생명이 고통을 딛고 태어나 단 한 번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년에도 피고 지는 꽃은,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이 소중한 진실을 아는 사람에게 인고의 시간을 견뎌 핀 꽃이, 단 한 번 지는 모습이 애달프지 않을 수 없다. 우리네 삶도 다르지 않으니까. 그래서 소중하다. 이게 우리가 가진 숭고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는다
그런데 이 삶의 숭고조차 개인의 능력으로 섣불리 결론 나는 게 요즘 세상이다. 내 기쁨도, 슬픔도 내 탓인 세상. 내가 불행한 탓이 내 잘못만이라는 섣부른 생각은, 내 삶을 순식간에 부정하는 일이 된다. 그럴 거면 왜 태어나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나. 누구나 어릴 적에는 부모님 ‘등골브레이커’가 되어야 하는데. 서둘러 꽃잎을 떨구는 아이들처럼, 우리는 가끔 잊는다. 꽃은 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을. 이제 막 피어난 아이들은 그래서 자신이 그토록 아름다운 지 모른다.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아프다는 것을.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정신분석은 아이들이 어른으로 자라는 과정에서 무의식을 통찰한 학문이다. 그러나 이 정신분석은 사후 확증적으로 인간의 현상을 해석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 지는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섣불리 결론을 내려버린다.
‘내가 불행한 탓은, 어릴 때 가정 환경 탓이야’
그러나 이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즉,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태어나 나고 자란 환경이 중요하다 쳐도, 우리에겐 나머지 인생이 있다. 그래서 사람이 겪는 경험에는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고통을 겪는다면, 우리는 더 강해진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행복을 겪는다면, 우리는 내 행복이 영원하지 않아 감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토록 다행이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피고 지는 꽃과 같은 존재라, 살아있는 매 순간이 찬란하다는 걸 아는 일이다.
그러니 너무 쉽게 단정 짓는 일을 멈추자. 우리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훨씬 더 복잡다단하니 아름답다. 그러니 어떤 고통도, 어떤 행복도 내게 왔을 때 향긋한 찻잎을 따뜻한 물에 우려내듯 자신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 내게 지금 어떤 인면이 스쳐 가,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 즉,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충분히 고민해 볼 시간 말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그래서 인생은 단순하지도 그리 비참하지도 않다. 그러니 오늘 내 옆에 핀 이 꽃과 같은 시간이 얼마나 다행인가. 이토록 다행이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오늘도 삶은 너무도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