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또는 에세이 #19
그런 사람이 있다. 길지 않은 만남이지만 잠깐의 침묵에서 그가 살아온 인생이 느껴지는 애틋하고도 깊어 배우고 싶은 사람. 직접 걸어온 길을 설명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사실 너무나 멀리, 다른 이들보다 앞서간 사람이 별처럼 품은 고독을 그늘처럼 가진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얼마 전 좋아하는 선생님께서 퇴임하셨다. 그분도 그런 사람이다. 마지막 수업도 그답게 단출하지만 멋들어졌다. 스승의 스승이면서, 그는 마지막에 와서야 다시 처음 출발선에 섰다는 듯이 설레며 말했다. ‘교사라는 직업을 존경한다’고. 자신도 스승이면서, 저렇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시련을 견디며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왔을까. 자연스레 밀려오는 엄숙한 존경심이 파도처럼 학생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두가 별과 같이 자신만의 빛을 품고 태어났으면서, 나이를 먹으며 빛깔은 퇴색되고 반사체로 남기도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지만, 저렇게 저물어 가는 자리에서도 끝내 자신만의 빛을 뿜는 별과 같은 선생님. 나도 그를 존경한다. 동경한다.
언젠가 제자들이 떠날 줄 알면서도 그 자리에 나무처럼 남아 한결같이 그곳에 머무는 사람이 선생이란 사람이며, 자신은 그런 이를 존경한다는 말 뒤에는 침묵이 이어졌다. 잠깐의 침묵이 보다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와 같은 길을 선택해 주어 감사하다는 말도.
내가 선생님을 뵌 지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그가 품은 빛을 쬐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많은 제자들의 길을 비추느라, 가진 생명력으로 등대가 되어 주는 그의 다부진 어깨가 기억에 남는다. 그 어깨에 내려앉은 친구 같은 고독을 나는 바라본다. 그 찬란한 외로움을 존경한다.
이처럼 나는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들 마음에 진 아늑한 그늘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한다. 어쩐지 남 일 같지가 않으니까. 그것이 애처롭다. 그래서 이 순간이야말로 어떠한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자 영광이다.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앞으로 수많은 학생이 그를 본보기로 삼고, 그리워하며 또 다른 색깔로 인생을 채워 갈 것이다.
이제 막 인생을 배우기 시작한 나는, 인생의 한 막을 끝내는 어떤 이의 마지막 수업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형용할 수 없는 깊이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간혹 겁이 날 때면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고 철없이 외치곤 하지만, 사실은 나보다 먼저 간 자들이 비추는 별의 그늘 아래 살고 있는 걸지도.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인연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한다. 매체 발달로 삽시간에 많은 사람의 흔적을 쉴 틈 없이 자극으로 받아들여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고달픈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지만, 교사의 마음으로. 내 눈앞에 있는 이가 언젠가는 떠날 줄 알면서도 열과 성의를 다해 세상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날 인연들을 소중히 대하는 일. 마음에 미련과 후회를 내려놓고, 더 나은 기회를 그 인연에게 기꺼이 건네는 선물 같은 삶. 언젠가는 누군가, 내 그늘을 보고 날 어여삐 여겨주는 것을 고맙다고 소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멋진 날이 내게도 올 테니. 그러니 오늘의 인연은 내일의 빛이다. 그 빛을 동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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