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또는 에세이 #35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 <굿윌헌팅(1997)>을 다 보고 나면 마음 한켠에 긴 여운으로 남는 대사가 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살다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내게도 벌어진다. 사실 이런 일은 너무도 흔해서, 우리 주변에 서린 그늘 아래로 숨어들어 사라지기 일쑤다. 낭떠러지에 내몰려 서 있는 기분. 그 고독과 공포.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으나 고통에 그대로 노출되어 방황해야 하는 억울한 순간들. 안타깝게도 이런 순간은 우리가 어리고 나약할 때 더 엄습하기 십상이니 원.
영화 <굿윌헌팅>은 천재적인 두뇌를 타고났지만 반복된 파양과 학대 속에서 자란 유년 시절 기억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고 MIT의 청소부로 일하는 청년 윌 헌팅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생활에는 나름에 이유가 있고 친구들과의 낭만도, 재미도 있다. 그러나 타고난 천재성과 홀로 다독(多讀)해 온 경험은 어디서나 두드러지는 법. 그는 힘든 육체노동과 길거리를 배회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어쩐지, MIT 학생을 포함한 술집에서 만난 명문대생들 사이에서도 어쩐지 소속되지 못하고 겉도는 삶을 살아간다.
어느 날 주인공 윌은 경찰 폭행으로 수감되는데, MIT 수학 교수 제럴드 랭보는 윌의 비상한 자질을 알아보고는 그를 설득해 자신의 수학 연구와 정신 상담을 조건으로 그를 보석(保釋)한다. 그러나 한번 걸어 잠근 윌의 마음을 여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다. 랭보 교수는 윌을 상담할 적임자로, 동창 숀 맥과이어를 윌에게 소개한다. 이렇게 영화는 윌의 인생이 숀이라는 스승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 스카일라를 만난 계기로 급변의 물살을 맞는 이야기다.
살면서 겪는 상처적 경험은 때론 내 삐쭉이는 마음을 진심으로 살펴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더 가시를 세우기도 한다. 영리한 아이일수록, 이 역설에서 빠져나오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윌의 상담을 맡은 숀은 윌의 뛰어난 재능과 자질을 알아채면서도 그것을 그다지 대수로이 생각하지 않는데. 이유는 숀이 보기에 윌은 그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상처받은 어린아이’이기 때문이었다. 단지 이대로 두다간 테러리스트가 돼도 이상하지 않은 시한폭탄 같은 상태.
자신의 잘못이 아닌 걸 명확히 아는데도 눈앞에 벌어진 끔찍한 일에 끊임없이 받은 죄책감과 무기력을 통해 존재를 부정하는 것. 폭력은 그렇게 쉽게 내면화된다. 우리는 이때 좌절하며 포기한다. 윌은 유년 시절 겪은 절망 앞에,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소외시켜 온 것이다.
숀은 그런 윌에게 제동을 걸기 위해, 겪지도 않은 일을 마치 진짜 아는 것처럼 말하는 윌의 몹쓸 버릇부터 지적한다. 네가 아무리 많은 전쟁사를 읽어도, 옆에서 죽어가는 전우를 보는 또 다른 전우의 마음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또한 숀은 윌에게 다시 한번 알려준다. 사랑하는 진정한 기쁨은, 연인의 이상적인 모습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아무도 모르는 버릇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란 사실을.
‘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영화의 절정에서 숀이 윌에게 해준 이 말은, 윌이 외부 세계와 거리를 두며 스스로를 소외시키던 절망 속에서 그를 다시 삶의 주체로 소환시킨 단 한마디였다. 윌 자신조차 부정하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어여삐 바라봐주는 숀의 마음이 그를 진정으로 위로한 것이다.
문득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사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지도 못하는 게 아닐까.
미디어에 비치는 것과 달리, 우리 삶은 다양한 형태로 상처투성이고, 얼룩져있다. 그런데 우리가 한 사람을 오래 지켜보거나 사랑하면, 우리는 타자화한 상대의 표상에서 벗어나 그제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경험을 한다. 내 상처, 얼룩덜룩한 그 멍 자리까지도.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모습을 상대에게 보여주면 혹시 떠날까 계속해서 스스로를 전시하고 소비시키는 게 익숙한, 기 드보르(Guy Debord,1931~1994)가 말했던 SNS문화를 가장한 일명 ‘스펙터클 사회’를 살고 있는 게 현재 우리네 비극 아닐까.
우리는 끊임없이 내 존재를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봐주는 ‘친구’를 곁에 두기를 바라는 존재다. 그러나 갈수록 버석해지는 세상인심에 그러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그런 친구가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는 말을 쉽게 듣는 팍팍한 사회가 되었다.
결과와 효율 중심적인 이 사회는 도무지 인간이 어떤 모양새로 생긴 존재인지 알 생각도 없고, 인간의 존엄을 잊은 지 오래다.
사람이 사람을 길러내는 일만큼 존중받아야 할 존엄한 일이 과연 세상에 몇이나 될까.
2024년 10월 10일 바로 어제저녁,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아시아 여성 최초, 한국 최초로 수상했다. 나는 이 소식을 접할 때 칼럼을 쓰고 있어,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기록한다. 우리 사회는 소외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작품에 담아 내오던 작가 한강, 그리고 영화 <굿윌헌팅> 숀처럼 사람과 사회를 볼 때, 기꺼이 그의 그늘까지 봐줄 줄 아는 인물들을 기꺼이 비용을 지불해 길러내야 하는 엄숙한 시점에 이른 게 아닐까.
움직이는 화랑 <비껴서기> 운영 |
코스미안뉴스 인문 칼럼니스트
브런치 작가
bkks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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