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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의 영화 음악

나의 〔신*영*음〕을 보내며

by 앤나우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 듣는 걸 좋아했다. 어느 날 우연히 켜놓은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자다 깬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노래가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았고 캄캄한 어둠을 제일 싫어하는 나도 잠결에 희미한 스탠드 불빛과 음악 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진 기억이 난다. 그때 흘러나온 노래는 이상봉의 '어떤가요'라는 노래였다. 가요를 잘 듣지 않아서 당시 잊지 않으려고 가사를 머릿속에 되뇌며 잠든 기억이 난다.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단연 영화 음악 방송이었다. 〔배유정의 영화음악 방송〕 클로징곡이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였는데 당시 영화를 보지 않아도 이미 그 멜로디만으로도 가슴이 두근두근 일렁거렸다. 나중에 안성기와 함께 나온 수채화 같은 영화,《아름다운 시절》에도 나온 배우라는 걸 알고 얼마나 반갑던지! 알고 보니 배우활동을 하며 통역사로도 활동하는 분이었다. 첫 영화가 내가 본 '아름다운 시절'이란 영화였고. 방송은 다시 찾아보니 〔FM영화음악〕이었네. 프로그램 제목은 뭔가 생소하다.


한 살 터울 나영언니와 라디오를 켜놓고 좋은 노래가 나오면 라디오 버튼 두 개를 꾸욱 눌러서 녹음을 시작했다. 그러다 우리 목소리나 다른 소음이 조금이라도 들리면 서로 네 탓 내 탓을 하며 투닥거리기도 하고 그냥 뜬금없이 까르르, 막 웃기도 하면서. 나보다 영화 음악을 좋아하는 언니 덕분에 배유정 방송도 듣기 시작한 것 같다. 그 시절 아버지가 엄한 편이어서 TV드라마나 이런 걸 밤늦은 시간까지 시청할 수 없고 정해진 시간에 가끔가다 만화영화만 오후에 볼 수 있었는데 덕분에 나는 다음날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재밌는 드라마 이야기에 푸욱 빠져서 밤마다 누워서 부모님 TV 보는 소리에 바짝 귀를 가까이 대기도 했다. 특히 기억에 남아있는 건 차인표가 나오는 '사랑을 그대 품 안에'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서 일부러 신문까지 뒤적거리며(*신문에 TV편성표가 나왔다)주말에 재방송으로 챙겨봤다. 하지만 상상으로 들었던 멋진 남자 주인공 모습과 너무도 달라서;;; ㅋㅋㅋ 또 이야기는 산으로, 추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ㅋㅋㅋ



차분한 목소리의 배유정이 어느 날부턴가 신애라의 영화 음악으로 바뀌어있었다. (*「사랑을 그대 품 안에」에서 차인표보다 신애라한테 오히려 반했기에, 다정한 신애라의 음성도 좋았다. 차인표*신애라는 둘이 부부^^) 그래도 좋았다. 그때는 한 DJ에게 푹 빠졌다기 보단 가사가 없는 영화 음악이란 장르의 매력에 더 빠질 때라서 용돈을 모아서도 영화 OST를 사는 언니 CD와 카세트테이프를 빌려서 주구장창 듣는 재미에 한참 빠져있을 때였다. 모두가 잠든 밤에는 좋은 보물 같은 음악을 건졌다고 서로 무언의 신호를 주고받으며 녹음 버튼을 눌렀다. 두 개를 동시에 눌러야 삑사리가 나지 않고 광고 음악이 조금이라도 섞이지 않고 매끄럽게 연결되게 하기 위해서 손에 땀을 쥐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때 알게 된 곡이 대부분 엔니오모리꼬네의 곡이었는데 《원스어폰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시티오브 조이》같은 영화였다. 《미션》-가브리엘의 오보에를 처음 들었을 때 놀라움이란!, 《바그다드 카페》 OST 그 당시 나에게 아름답고 생생한 선율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때는 주말에 낮잠을 자면서도 바그다드 카페 CD를 미니컴포넌트 안에 착 하고 걸어둘 정도였으니까. ㅎㅎㅎ 물론 지금 들어도 여전히 좋은 음악들이다.


한스짐머의 《파워 오브 원》도 전곡의 멜로디를 달달 외울 정도로 들었다. 특히 여자 친구의 장례식장 앞에서 흑인들이 함께 부르는 아카펠라 영가, 센세미나~ 이렇게 시작되는 음악은 듣다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주말의 명화, 토요명화는 밤 12시가 넘어도 마음껏 보게 해 준 아빠 덕에 토요일 밤은 늦게까지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거기서 《원스어폰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미션》, 《루이말의 잃어버린 아침》등등 유명한 영화들을 봤다. 루이말은 원제가 Goodbye children이라는 것도 훨씬 더 커서 나중에야 알았다. 존 랜디스 감독, 에디 머피와 댄 애크로이드가 나오는 《대역전》이라는 꽤 유명한 코미디 영화도 주말의 영화에서 방영한 제목 그대로 《알프레인과 밸런타인의 도박》으로 봤다. 그 시절 졸려도 세수를 하면서까지 밤을 새워 본 나의 영화들은 전부 더빙이었고 주말의 명화와 토요명화에서 방송국 방영제목으로 본 작품들이었다. 남들이 다 잠든 시간 누군가 잘 모르는 영화, 안보는 영화를 봤다는 사실이 은근히 어린 스스로를 뿌듯하게 했고 그게 영화음악으로 들었던 멜로디까지 더해지니 나는 영화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우리 언니도 12시가 넘어가면 나는 그냥 먼저 잔다, 졸려 하고 휙 들어갔지만 나는 끝까지 다리를 꼬집으면서까지 영화를 봤다. 무슨 사명감에라도 차 있는 사람처럼 ㅋㅋㅋ


놀기에도 연애하기도 바쁜 20대 시절엔 라디오와 자연스레 멀어지면서 좋아하는 음악을 워크맨이 아닌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mp3에 담아 듣거나 CD플레이어로 들으면서 다녔다. 그래도 어쩌다가 한 번씩 라디오를 들으면 참 좋았다. 추억 어린 노래들이 흘러나오고 흥얼흥얼 멜로디도 따라 했다.



Video Killed the radio star



라더니 나도 자연스럽게 비디오를 더 좋아하게 됐고 영화 음악보단 영화를 더 많이 찾아보고 자연스레 라디오와는 멀어졌다.










첫 아이를 낳고 정신없고 뭘 어찌해야 할지도 몰랐을 때 막막하고 우두커니 남은, 내 곁엔 고맙게도 라디오가 있었다. CBS 93.9 MHz(메가헤르츠) 강석우[아름다운 당신에게]라는 클래식 방송을 시작으로 저녁이 될 때까지 한 주파수를 고정으로 쭈욱 들었는데 묘한 위안이 됐다. 아이와 함께 듣는데(대부분은 뭐 내가 들은 거겠지만 ㅎㅎ) 참 좋았다. 그러다가 알게 된 CBS라디오 최장수 프로그램, 25년 방송을 이어온 신지혜의 영화 음악을 만나게 됐다.



첫 방송은 1998년 2월 2일
마지막 방송은 2023년 10월 31일



와! 25년을 이어 이렇게나 한결같이 꾸준하게 할 수 있는 힘이 뭘까, 어린 시절 언니랑 같이 영화음악을 듣고 CD며 테이프를 사모았을 때가 생각났고 신생아를 키우면서 대부분 집에 있는 시간 동안 많은 방송 중에서도 특히 신*영*음은 나에게 힘을 주고 있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매일 11시~12시까지 딱 1시간짜리 방송이라는 거. 나에게 그 1시간은 너무 빠르게 휘리릭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기분 좋은 한 시간을 날마다 기다렸다.

대본만 작가의 도움을 받고 기획, 연출, 진행까지 모두 혼자 도맡아 하는 어마어마한 사람이 있다니! 한 방송을 1년까지 채우는 것도 어려운 요즘에 25년간 이어온 열정과 끈기가 대단하다고 놀라웠다. 동시에 이런 역사적인 방송이 사라진다는 게, (이어서 진행하는 최강희의 영화 음악이 있지만 나에게 '신*영*음'은 오직 하나이기에) 놀랍고 마음 아팠다. 아쉬움을 넘어서 눈물이 글썽여질 정도로.



차분함은 물론 군더더기 없이 최소한의 이야기만 하고 더 많은 음악을 들려주려는 신지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좋았다. 나는 큰 아이가 태어난 2014년부터 이 방송을 들었으니 9년밖에 안된 팬이지만 시작부터 신생아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과정 가운데 함께 해왔다는 의미가 더 컸던 것 같다. 추억의 OST에 빠져 편안하게 듣다가 어느날인가는, 용기를 내서 사연을 보냈는데 내 사연을 바로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주셨다! 라디오로 보내는 멘트도 주절거려서 길게 썼는데 그것마저 깔끔하게 핵심을 요약해서 전부 빠짐없이 읽어주는 목소리를 들으며, 참 야무진 DJ, 센스 만점! 이라고 외쳤다. 산만한 내 마음과 문장을 침착하게 읽어주고 다정한 멘트도 덧붙여준 그날이 잊히지 않는다. 왠지 짧은 음악을 엔딩송으로 틀어줄 것 같아서 신청한 게 비틀스의 'I will'이었는데(영화 '러브어페어'에서 아이들이 부른 음악) 생각대로 내 이름과 아이 이름도 불러주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전략이 통한건가, ㅋㅋ 이렇게 연상된 영화 음악이나 연결된 다른 걸 종종 사연과 신청곡으로 보냈는데 자주 방송에서 내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내 음악이 흘러나온 기쁨을 제대로 누릴 수 있었다. 혼자 들어도 좋지만, 같이 듣는 건 더 기쁜거란 걸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무도 없어도 신지혜 DJ님은 함께 듣고 있겠지, 웃음이 나왔다. 그 뒤로 〔라따뚜이〕의 엔딩송 'Le festin'과 종수삼촌이(*큰외삼촌) 돌아가시고 신청했던 존레넌을 닮은 삼촌을 기억하며 떠올린 음악,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도 들려줬다.



내가 우는 순간에도, 누군가를 애도하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에도, 출장이 잦은 신랑 때문에 홀로 아이랑 우두커니 있어야 했던 시간 속에서도 신*영*음이 내 곁에 있었다.



생일에도 어김없이 축하와 함께 내 신청곡을 틀어줬는데 그때 함께 있던 미선언니는

-너만 듣는 거 아니지? 너는 어쩜 그리 방송에 사연 소개가 잘 되는 거지? 애청자가 너뿐인 방송인가.
ㅎㅎㅎ


서로 이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라디오 방송 특유의 장점, 일대일로 나와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듯한 그 구조가 나는 참 마음에 들었고 DJ들의 멘트를 최소화하면서도 더 많은 음악을 들려준 93.9 MHz방송이 나와는 결이 비슷하고 잘 맞았던 것 같다. 기독교 방송 채널로 알고 있지만 클래식으로 아침을 열고 *영화음악, 한동준의 팝송, 가요까지 하루종일 라디오를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하루종일 기독교 방송이 나오는 주파수도 따로 있는데 거기서도 가끔 신지혜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라디오를 너무 열정적으로 듣는 나에게 신랑이 주파수를 맞추는 하얀색 라디오도 선물로 사줬다. (주파수를 수동으로 맞추는 게 짜증 나서 결국 핸드폰 앱으로 듣는 날이 더 많았지만, ㅎㅎ 나에겐 잊지 못할 귀한 선물이 됐다) 영화음악으로 연결돼서 신청곡이 나오고 선물도 한아름 보내준 고마운 방송, 그런데 마지막이라니...!



언제나 이별은 낯설고 슬프다.



별다른 이야기 없이도 중반까지 방송을 하다가 신지혜 DJ는 침착하게 하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퇴사를 하게 됐고 이유는 떠날 때가 되었다



이렇게 급작스러운 이별도 슬픈데 깔끔한 이별을, 헤어질 결심을 하게 만드는 멘트가 있을까. 방송국을 떠나는구나. 라디오 방송으로 알게 돼서, CBS에서 뉴스에서도 목소리가 나오면 괜스레 반가웠는데, 이젠 떠날 때가 된 거구나.





은하철도999에서 철이의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고 메텔은 이야기하죠, 철아, 나는 네 청춘의 어스름한 그림자...!
어쩌면 저는 여러분들 청춘의 어스름한 그림자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가 도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하죠.

-자, 이제 어디로 떠나볼까...!

지금 제 마음이 딱 그런 것 같네요. 자, 도비는 Free입니다! <해리포터의 자유를 얻은 도비의 대사>


〔신*영*음〕의 마지막 방송에서 신지혜 아나운서가 전한 작별 인사




그리고 흘러나온 음악은 Endless Love

다이애나 로스와 라이오넬 리치의 고전적인 화음이 부드럽게 어우러졌다.

이렇게 멋진 작별인사가 있다니! 그래, 우린 영화음악으로 연결된 사이, 영원한 끝없는 엔들리스 러브.


해리포터, 이름을 부르는 걸로 시작해 자유를 준 해리포터에게

"도비 이즈 Free"라고 외치는 도비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신*영*음을 영원히 기억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겠구나. 내 추억의 한 조각, 아이의 성장뿐 아니라 엄마로서 내 성장과 안식처가 돼준 라디오랑 작별을 고하면서 외로웠던 그 순간에도 나와 함께 해준 이 프로그램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도 마음을 담아 담백하게 다정하게 건네준 신지혜 아나운서에게 나도 정말 고맙고 힘이 됐다고, 옆에서 차분하게 내 일상을 함께해 줘서 고맙다고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신랑이 요즘엔 왜 영화 음악 방송을 안 들어?라고 물어보는데, 아직 다른 사람이 하는 같은 시간대 영화음악 방송을 들을 준비가 안된 것 같다.


책과 샴푸 선물을 보내준 신*영*음

멋지게 퇴사해서 제2의 인생을 또 열심히 꾸리고 있을 신지혜 아나운서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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