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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말스틱

mahl stick

by 앤나우

mahl stick


영어로는 maulstick

네덜란드어로는 maalstok으로 불린다.



화가의 말스틱



말스틱, 처음 들어본 단어이다. 그림을 전공하거나 한 번이라도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처럼 어린 시절 미술 학원과 과외를 몇 번 받은 게 전부인 사람에겐 낯선 단어이다. 그것도 아주 어린 시절이었을 때라 유화를 배웠을 리도 만무하고.


월요일 아침마다 함께 읽는 미술 책 덕분에 '말스틱'을 알게 됐다. 내가 발표하게 될 화가의 자화상에 바로 이 '말스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각각 두 점씩 읽고 소개하는 것뿐인데 점점 세계가 확장되어 간다는 걸 느낀다. 물론 수업에 참여하는 다른 분들의 작품 이야기까지 합치면 10편이 넘는다. 혼자가 아닌 함께 읽기의 힘인 것 같기도 하다. 직접 미술관에서 그 작품들을 본 다른 분들의 이야기에 언제나 내 마음이 설렌다. 나도 곧 영국에서 다양한 작품들을 직접 눈으로 마주할 날이 머지않았다. 그게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나에겐 조금씩 문이 열리고 확장되는 과정인 것 같다. 평소라면 전혀 관심 없었을 사물과 세상들이 조금씩 더 눈에 들어온다. 그림 안에 담긴 세월과 시간이 역사가 되고 세세한 사물, 소도구들이 지금까지 쓰인다는 게 그저 신기할 뿐이다.






KakaoTalk_20251202_224229694.jpg 화가 '노먼 록웰'이 그린 《삼중 자화상》|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것이 바로 '말스틱'이다


화가 노먼 록웰이 그린 《삼중 자화상》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춰보며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 1960년대 제작된 유화작품 (오른쪽 상단에 그가 좋아하는 화가의 자화상 작품도 한눈에 들어온다)






maulstick 말스틱은 끝이 푹신하게 처리된 긴 막대기로, 그림을 그릴 때 손 떨림을 방지하려고 사용하는 도구이다. 주로 붓을 잡은 손이나 팔목을 여기에 얹어서 미세한 붓놀림 작업이 필요할 때 손힘을 지지하며 흔들림 없이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말스틱의 푹신한 끝이 캔버스를 손상시키지 않아서 섬세하게 작업하는 유화나 세부 묘사가 필요한 그림에서 많이 쓰인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도구로 화가 베르메르, 렘브란트 등 많은 거장 화가들이 유화 작업에서 정확하게 선을 긋고 세밀한 묘사를 집중하기 위해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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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arina van Hemessen'의 《이젤에서 자화상》 | 《안개 속의 방랑자》로 유명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말스틱





Catharina van Hemessen


카타리나 반 헤메센, 이름도 처음 들어본 이 여인이 1548년 오크 패널에 오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의 크기도 32.2 x 25.2cm 작은 편이다. 어두운 배경에 관객을 보는 듯한 무표정한 화가의 모습이 침착해 보인다. 맞아, 그림을 그릴 때 아무리 좋아도 오버해서 웃거나 입을 헤 벌리고 있진 않겠지, 우리가 뭔가에 몰입할 때 표정은 과연 어떤가 떠올려보게 된다. 그녀는 고급스러운 옷과 화려한 모자를 쓰기도 했지만(그녀의 아버지가 이미 저명한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였다고 한다 >> 물론 실제로 그림을 그릴 땐 이런 불편한 옷차림을 하진 않았겠지만 가장 예쁘게 보이고 싶은 그 마음엔 충분히 공감한다) 팔레트와 붓을 쥔 손 모양이나 말스틱 위에 손을 얹어 이미 그림을 진행하는 중인 '화가'로서의 카타리나 모습 자체는 전혀 꾸밈이 없다. 창백한 얼굴이나 고급 원단의 옷과 달리 그녀의 손은 이미 그녀가 '화가'라는 걸 말해주는 작품 같아서 더 좋았다. 화가로서 익숙한 길들여진 손, 자신이 다루는 그림 도구들, 구멍 하나에도 엄청 애정을 담아 그린 작품이다.

핏기 없고 창백한 얼굴은 해를 보지 못하고 그림에만 몰두해서 어딘가 아파 보이기도 하지만 흔들림 없는 눈동자, 앙다문 두 입술이 당차게 느껴진다.



작품의 제목은 Self-portrait at the Easel | 이젤에서 자화상

유럽에서 가장 초기 자화상 작품 중 하나로 이젤에서 일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그림 크기도 30cm 남짓인데 그 안에 또 표현하는 작은 그림에서도 손 떨림을 멈추기 위해, 집중하기 위해 화가가 말스틱을 사용했을 상상을 하니 무척 재밌다. 함께 수업하는 복규 선생님께선 실제로 유화를 배우시는데 요즘에도 말스틱은 여전히 사용하는 도구라고 해서 찾아보다가 '노먼 록웰'의 작품을 발견하기도 했다. 말스틱 부분 발제를 읽다가 함께 읽는 선생님들께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예술의 알레고리' 같은 작품에선 엄청 커다란 말스틱이 등장한다는 것과 고야는 거대한 그림을 그릴 때 손 떨림을 누르기 위해서 양쪽에서 끈을 묶은 굵은 밧줄 위에 손을 얹어 작품을 완성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이 그림이 내가 그날의 발제를 맡은 두 점의 작품 중 하나였는데 '말스틱'이란 도구가 신기하고 재밌게 느껴졌다. 여자들이 메이크업을 받을 때 (웨딩 신부 화장처럼) 능숙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화장이 손에 묻지 않게 하기 위해 본인의 새끼손가락 부분에 퍼프를 덧대거나 솜 같은 걸 대는 것과 비슷한 걸까. 처음엔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니, 화가도 그렇지만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도 물감이나 화장품이 살짝 묻어나는 게 뭐가 대수일까. 중요한 건 이미 꼼꼼하게 작업한 작품이나 화장이 손상되거나 번지는 걸 방지하기 위한 '영리한 도구'라는 점이다. 소박하지만 고마운 지지대 역할을 해주는 도구.



우리 인생에도 이렇게 말스틱처럼 떨리고, 번지고, 뭔가에 집중할 때마다 우리를 잡아줄 말스틱이 필요하지 않을까. 고야 같은 거장도 떨리는 손을 멈추고 지탱해 줄 '끈'이 필요했던 것처럼.



말스틱은 그냥 평범한 막대기다. 기다란 나무 막대기.


지금 저녁마다 읽는 '로스코'전에 함께 읽기를 끝낸 TASCHEN의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작품에서도 마지막 뒷 표지에서 본 말스틱이 떠올라서 다시 찾아봤다. 와! 노년의 그가 들었던 기다란 지팡이가 걸음의 균형을 잡아준 꼬부랑 할아버지의 지팡이가 아니라 여전히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주고 그림의 균형을 잡아주는 말스틱이라는 걸 발견하니 뭔가 조금 더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안개 속의 방랑자》에 우뚝 솟은 산속의 젊은 청년의 모습은 이젠 사라지고 없지만, 그가 초기에 스스로를 그린 모습의 총기 넘치고 날카로운 자화상을 떠올려보면 말스틱을 들고 있는 노년의 모습은(그의 친구가 그려준 작품이다) 마치 딴 사람 같지만 그는 한 번도 손에서 말스틱을 놓은 적이 없었으리라. 아니 그림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말스틱을 더 꼭 쥐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삶에 대단한 폭풍과 같은 일은 사실 그대로 맞닥뜨리기 때문에 어떤 대처를 할지 멍하다가도 다시 처음부터 찬찬히 시작할 용기를 갖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상의 작은 균열이나 미세한 떨림같이 나를 파고드는 불안은 사실 별거 아니고 언제,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도 모르게 찾아온다. 그때마다 나를 지탱해 주는 나만의 '말스틱'을 하나씩 품었다가 꺼내놓으면 참 좋을 것 같다. 긴 나무 막대를 다시 척 걸쳐 놓기만 해도 마음의 중심을 다잡게 되는 거, 나에겐 별 거 아닌 매주의 숙제가 있는 나의 '스터디'모임이 그렇다. 스터디 숙제를 하거나 잘하지도 못하는 언어를 읽을 땐 부담되고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역시 하길 잘했어, 나의 중심을 다시 세워가고 싶어진다. 잘 불지 못해도 '오카리나'악기가 그렇다. 〈학교 가는 길〉이란 곡을 불고 나면 어디든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말스틱의 발견처럼(이걸 꼭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별 거 아닌 일을 막 글로 쓰고 싶어지는 나의 작은 글쓰기 공간, 나의 브런치가 그렇다.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수다를 떠는 일, 손톱을 깎아주고 등을 쓰다듬어주는 일, 놀이터에서 달이 뜬 걸 발견하는 일, 금요일마다 신랑하고 둘이 가끔 순댓국을 먹으러 가는 일,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울 엄마가 잔뜩 챙겨준 엄마의 손맛 가득 밑반찬을 꺼내서 한 끼를 제대로 먹는 일 등등 일상의 말스틱은 우리와 맞닿은 든든한 기둥이 돼준다.



나의 인생이 유명한 화가들의 거대한 작품처럼 대단하게 완성되어 가는 작품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 역시 말스틱을 들고 어딘가 웃고 있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처럼, 입술을 앙다문 '카타리나 반 헤메센'처럼, 자기 모습을 쓱 바라보는 '노먼 록웰'처럼 각각의 모습 앞에 집중하고 떨리는 손을 한 번 더 힘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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