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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나우 Jul 25. 2023

위로를 넘어선 나의 도피처

나에게 힘을 준 책과 영화, 여행, 그리고 안식이 돼준 사람들 : 경험


아이를 낳고 뭔지 모를 이상한 우울감에 내가 낳은 아이를 보러 가는 것도 잊은 채 울적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펑펑 났다. 나는 병원의 긴 복도를 자꾸 걷고 또 걸었다.


걷다 보면 생각이, 생각보다 빨리 전환되고 움직이는 자체에 집중된다는 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햇빛 한 잔과 요구르트만 있어도 우울증을 싹 극복 할 수 있다는 꾸그 이선호님의 강연이 생각난다. (얼마 전에 본 세바시 강연/과학커뮤니케이터, 엑소쌤 이선호님 편)



난 계속 햇빛을 찾아 걸어 다닌 건지도 모른다. 그러다 텅 빈 조리원으로 다시 돌아와서 뭘 했냐면, 눈이 퉁퉁 붓도록 울다가 책으로 손을 뻗었다. 사실 이 변화무쌍한 감정을 전부 적고 기록하고 싶었는데 뭔가를 쓰기에도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기에.(아이를 낳고 나선 실제로 손목이나 관절에 무리 가는 행동은 안 하는 게 좋다.) 미선언니가 놓고 간 두 권의 책을 읽었고 읽다가 처음으로 다시 웃음이 빵 터져서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웃음, 크게 터지는 특유의 웃음 톤이 있는데 그건 내가 회복했다는 증거다.




나를 처음으로 다시 웃게 한 건, 방긋방긋 아가도 신랑의 위로도 아닌, 시간의 자연스러움도 아닌 그냥 이었다.




두유와 아기 용품과 함께  슨씨가 선물해 준 손창섭 단편 전집 두 권




"도숙 씨!"
도일이가 부른다. 동생을.
자기 동생 같지 않고 믿을 수 없어서.

"오빤 미쳤수?"



웃으면서 미친 건 도일이가 아니라 나라고 생각할 만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학교 때도 이 부분을 읽으며 혼자서 빵 터졌던 기억이  스쳤다. 내가 좋아하는 코난도일도, 만화책 『명탐정 코난』의 도일도(신이치의 한국판 이름이 남도일이다), 그리고 손창섭의 단편 『공휴일』의 남자 주인공도 도일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나를 웃게 하는 도일이들, 소설 속 인물의 대사 한 마디 때문에 세상엔 나보다 이상한 사람도, 잡다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이토록 많구나 하는 위안을 받았다. 뭐, 나의 우울이나 눈물도 이상한 게 아니라는 생각에 가쁜,  다시 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아, 이걸 쓰면서 알았다. 내가 왜 이렇게 남들이 우울하거나 어렵다고 생각한 소설들을 재밌게 읽었는지. 이상하고 특이한 주인공, 하지만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생각을 요리조리 전부 나열하지 않고는 못 베기는 주인공들이 나보다 이상해야 묘한 안도감과 그제야 공감을 느낄 수 있었나 보다. 『인간실격』(다자이 오사무)의 '요조'가 그랬고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눈먼 수도사 호르헤가 그랬으며(희극이 우리의 기쁨을 자극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해 본다는 시학 2권에 침 대신 독을 묻혀 놓은 수도사. 웃음은 두려움과 불안을 없애기에, 책을 읽고 웃는 법을 알게 된다면 수도원의 신앙도 전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 나도 책을 넘길 때 나도 모르게 몰입하면 침을 묻혀서 한 장씩 넘기며 더 빠져들어 읽곤 했는데 이 책을 만난 후에는 그 습관이 사라졌다. 책으로 독살당할 위험은 그만큼 낮아진 것이다.ㅋㅋㅋㅋ)  
이문열의 소설 중에서도 방황하는 영훈이가 느끼는 환멸, 괴로움 부분을 탐독했다. 세상에 저렇게 낭만적인 감성의 사나이가 매일 죽고 싶어서 독약을 가지고 다니다니, 그러면서 죽지도 못하는 비겁함이라니, 지질함의 극치 같다가도, 그래, 죽는 건 뭐 쉽나 하는 생각에 끄덕끄덕. 때론 살아간다는 것보다 죽음에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문열 『젊은 날의 초상』) 나에겐 그런 사람 자체를 본다는 것이 자극이 되고 가장 흥미로웠던 건 아닐까, 란 생각도 든다. 에세이처럼 편안하고 일상을 보여주는 글들이 무미 건조하고 그냥 재미가 없어서 읽을 수 없었던 나인데 이젠 황정은의 『일기』나 김애란의  『잊기 좋은 이름』, 박연준의 『모월모일』같은 글들도 좋다.[ + 이너조이님 때문, 아니 덕분이라고 덧붙이며. ㅎㅎㅎ ]
 사실 나는 내가 쓰는 일상의 글, 생각이 이렇게도 좋은 글감이라는 걸 깨달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나의 가장 큰 경험은 바로 너 아닐까. 나를 살려주고 웃게 만든 무수한 들. 다시 우울에 빠지더라도 이상한 부분에서 혼자 웃더라도 묘한 안도감을 주는 산책과 같은 독서의 시간들, 무수한 몰입과 고독의 시간들, 남들은 모르지만 나만 느낄 수 있는 섬세한 인물과의 만남이 나의 자부심이 됐고 용기가 됐고 단순한 위로와 간접 경험을 넘어서 힘이 됐다.


쓰면서도 꿈같은 이야기 같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초등학교 시절 명언 집에서 읽고 펜싱칼처럼 생긴 끝이 뾰족한 펜촉 모양의 칼로 해적과 싸우는 상상을 했더랬다. 제대로 뜻도 모르면서 멋있어 보이는 문장이 있으면 그때그때 그대로 다 적어놓고 기록했다. 촌철살인 같은 한자어도 모르면서 삐뚤빼뚤 따라 적기 시작했다. 이런 문장을 써야지.

하지만 이제는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다. 그냥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칼불멸, 죽음 이후의 것을 이야기하는 펜(*글)은 차원부터 다르다고. 죽어서도 계속되고 누군가 읽을 수 있는 기록이 남는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미사여구가 담긴 화려하거나 멋진 글, 폐부를 찌르고 오금을 저리게 하는 무섭고 잔인한 말(글)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상황에 따라 가장 평범한 일상의 어떤 단어, 문장이 나에게 촌철살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엄청나게 유명한 문호가 아니더라도, 희대의 살인범,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나의 기록이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남아있는 유물처럼 한 사람에게라도 닿아서 읽히게 된다면 그것만큼 멋진 경험 자원이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따로 특별한 놀거리가 없어기에 베란다 한쪽 구석에 엄마가 버리려고 쌓아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전래 동화부터 과학 서적까지 끊임없이 자기 전까지 읽는 나에게 엄마는 남들이 버리려고 쌓아둔 책을 다시 골라서 찾아왔다. (아파트 단지 내에 폐휴지 수납 하는 곳이 있었는데 어느 날은 엄마가 묶어진 책 꾸러미 속에 윗집 언니가 쓴 일기장까지 가져와서 어떤 책 보다 재밌게 읽은 기억도...) 무겁게 한 아름 집으로 가져와서 집 안 곳곳에 쌓아두셨다. 꽂아 놓지도 않고 진짜 쌓아 두셨다. 나에게 읽으라는 말 한마디 없었지만 나는 그걸 끝까지 다 읽었다. 엄마가 나에게 선물해 준 거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었기에. 잘 때는 무서워서 불도 못 껐지만 자기 전까진 책이 있어서 심심하거나 무섭지 않았다. 나를 달래준 자원이 된 책이 나를 좀 더 자세히 보여줬다.

내가 읽는데만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뭔가를 쓸 때 더 즐거운 사람이란 것도 독서 덕분에 알았다. 밀린 일기를 쓰면서도 미친 듯이 즐거웠고 소설가, 작가가 된 양 빠져들었다. (여기에 좀 더 자세히 )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전국 '전국 문화재 애호 글짓기'대회에 나가서 내 글이 책으로도 나오는 기쁨을 누렸다. 사실 마무리도 제대로 짓지 못하고 뭘 써놓은 건지도 모르는 그 글에 왜 상을 준건지 모르지만 엄마는 '전국'에서 받은 상이라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자부심을 가지셨던 것 같다. 대단히 높은 상도 아니었지만 맞춤법 오타도 고쳐주지 않은 내 글이 어쨌든 책에 실렸다.  탈춤 추는 광대가 그려진 초록색 표지의 책. 여태껏 아무에게도 보여주지도 않은, 성인이 돼서 나도 딱 한 번 읽다가 그냥 덮어버린 책. 일단 거슬리는 맞춤법 오타와 혼돈의 띄어쓰기가 참을 수 없었고 혼자 문화재에 관한 이야기는 안 하고 공상에 빠져서 놀던 아이라는 걸 깨달아서 부끄러웠다.


여하튼, 글을 쓰는 사람이 되자고 나도 마음먹기도 전부터 책이 나를 그렇게 끌고 간 것 같다.

대학 역시 문예 창작과로 진학했고 책만큼 빠져들었던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의 배움과 투자 》



문예 창작과에서 문학 장르 작법을 배우고 전공했다.

시나리오 작법을 배운 일



나는 남들이 들어가기도 힘들다는 서울예전 문예 창작과에 붙었다. 지금 생각하면 오글거리는 말, 절대 안 했을 '문학에 빚을 졌다는'말을 하며 평소보다 반짝반짝한 눈으로 에너지를 끌어올린 탓에 면접에도 높은 성적을 받았다. 눈 내리는 겨울 캠퍼스가 너무 예뻐서 다니고 싶었지만, 서울예전에(지금은 서울 예술 대학이라고 명칭이 바뀐 걸로 안다) 많은 인맥들도 쌓고 싶었지만(사실은 영화과에 잘생긴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던 기억이 ㅋㅋ 좋은 학교의 기준이 됐지만) 전철을 타고 오가는 길이 너무 멀어서 전철에서도 욕을 했다. 집에 오자마자 녹초로 뻗어버린 기억도. 명동인가 서울의 중심에 있다가 왜 안산으로 옮긴 걸까.

그리고 면접시험 이후로 집에서도 몇 정거장 안 되는 당시 막 생긴 깔끔한 7호선 라인의 숭실대학교를 다니기로 마음을 굳힌다. 20대가 되기 전까지 마음은 요동치고 민감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사실 인생에서 큰 풍파와 같은 일을 만나지 않았다. 오히려 살면서 시험 통과나 점수는 운이 좋은 편이었던 것 같다. 노력에 비해 결과나 성과가 언제나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늘 예측과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했던가. 나는 내가 돈을 주고 배우거나 공부한 것엔 지각도 잦고 심드렁, 재미가 없었다. 초등 ·중· 고교  6+3+3= 12년을 한 번도 빠진 적 없어 그런가(12년 개근이라니!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놀란다. 나도 그저 놀랍다!! 그냥 울 엄마의 힘이라고 해두자) 뭐, 여하튼, 이제 제대로 돈을 주고 다니는 청춘의 시작인 대학교는 잦은 결석과 펑크로 시작했다. 우리 학교는 안 가고 심지어 다른 학교에 가서 놀거나 다른 학교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뭐 한 건가 싶다;;; 이렇게 설렁설렁 다녔음에도 2등 장학금을 받았다. 장학금을 받았을 땐 아빠 회사에서 나오는 전액 장학금 제도에서 반액을 제하고 나와서 장학금도 받지 말라는 아빠말에 칭찬도 못 받고 절실하지도 않은 공부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일단 하기 싫은 과목 수학이 없는 대학생활이 너무 편하고 수업도 내 마음대로 몰아서 짤 수 있다는 게 짜릿하고 즐거웠다. 운동만 해도 춤만 춰도 학점으로 인정하다니, 진작 좀 암울했던 고교 시절에 이렇게 좀 해주지 뒤늦게 신이 났다. 사람들이 꽉꽉 들어찬 계단강의실에서 '성의 담론'이나 '공연 예술의 이해'같은 교양 과목 수업을 듣는 게 재밌었다. 전공 수업보다는 교양 시간에 더 열심히 앞자리를 맡았고 그 외엔 밀려오는 자유를 자유롭게 놀기로 결심했다.



학자금 대출을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내 용돈을 벌기만 하면 되는데 따로 용돈 벌 생각도 안 하고 꼬박꼬박 용돈을 받아썼다. 당시 롯데 백화점에 근무하던 아빠회사에 단기 아르바이트 공고가 나면 비교적 편하고 쉬운 일을 골라서 하거나 언니 친구 어머님이 운영하시는 어린이 집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아르바이트를 종종 하곤 했다. 여름 방학 내내 친구들과 어울리고 매일 노는 내가 한심했는지 어느 날 아침엔 엄마가 나를 마구 흔들어 깨우더니 세수도 안 한 나를 끌고 나가자고 했다.



좀 일어나, 가자, 갈 데가 있어! 이거 전단지 알바 뜬 거에 가서
전단지 알바라도 붙여봐라!


재정적 압박이나 경제의 위기 없이 고생하지 않고 컸다. 그래서인지 편견이나 구김살 없는 사람으로 컸지만 반대로 말하면 생활력이 강하거나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하. 말만 대학생이었지 거의 백수나 다름없었던 나의 20대 시절, 치열함 보다는 분방한 자유가 더 좋았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낄낄거리고 깔깔거리면서 어울리는 게 제일 재밌는 일이었다. 수업은 매일 지각하거나 대리 출석을 부탁해도 F학점 하나 받지 않고 계절 수강 한 번 듣지 않아도 될 만큼 간당간당 학교 생활도 이어갔다. 과제가 있을 때마다 최대최대 미루고 미루다가 끝에 다다라서야 와다다다 일하고 그제야 숙제를 완성, 10매 넘는 희곡도 하루 만에 날림으로 썼다가 교수님께서 나에게 숙제 뭉치를 던진 적도 있다. 우리 과는 합평을 하기 위해 한 번에 과제를 제출해서 책으로 제본을 뜨고 그렇게 한 권씩 갖는 기념비적인 작품에도 내 소설이나 아동문학(동화), 희곡은 종종 빠졌다. 과제를 늘 아슬아슬하게 내거나 기한 내에 제출하지 못했기에. 그럼에도 칭찬을 해주신 교수님들, 내 수업 시간에 듣는 비난이나 평가의 소리가 듣기 싫어서 학교에 안 간 날도 많았다. 민정이나 미선언니가 나랑 친하다는 이유로 불려 나가서 내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하고 사람들의 비평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런 날 꼭 교수님들께서는 어마어마한 칭찬을 해주셨다고. 내가 가면 늘 욕만 먹었던 기억이 분명한데, 인생은 참 아이러니 하다고 생각했다.  영화 동호회 활동을 하고(우리 땐 그 유명한 시삽이라는 이름을 붙인 모임 장들이 있었다) 나는 활발한 활동 탓에 부시삽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그때도 내가 올린 영화 감상평 아래 누군가의 댓글을 읽는 게 좋았는데 - 영화 이야기보다 이렇게 글을 잘 쓰다니, 그냥 글을 읽는 게 재밌다는 반응을 보고 씩 기분이 좋아졌다. 학교에 더 가기 싫었던 것 같다. 좋은 이야기만 듣고 내가 즐거운 공간에, 좋은 사람들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웃을 수 있고 어울렸을 때 기분 좋은 사람들과 있고 싶었다.


글 쓰는 게 좋아서 들어온 게 아니라 제일 편하고 잘한다고 생각하는 걸로 대학에 들어와서 나는 놀기 위해서 사는 사람 같이 놀았다. 부족한 용돈이 떨어질 땐 그제야 학식에서 맛없는 밥을 먹고 툴툴거렸고 다음 용돈 받는 날을 함흥차사 기다리며 쇼핑과 치장, 맛집과 사람들에 열을 올리고 그렇게 날 좋아해 주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경험자원을 써야 하는데 무슨 철딱서니 없는 시절의 나열 같아서 부끄럽지만 놀았다는 말을 다른 치열함이나 열정, 꿈, 도전으로 미화시킬 방법이 도저히 없다. 그래도 이 시기의 나의 경험 자원을 정리해 보자면


20대 시절 나는


……



▷ 코피가 터지면서도 보고 싶은 영화나 미국 드라마 시리즈는 끝까지 보는 사람이었다는 거  

▷ 누군가의  강요나 끌려다니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거,


아니다, 다시!



▶ 주일 예배에 빠진 적은 있어도 일대일 제자 양육도 받고 내가 맡은 주일 학교 아이들 신방전화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했다.

▶ 일기를 매일같이 쓰고 짧게라도 다이어리에 그날 그날 감상과 영화 티켓, 감상평을 꼭 적어놓았다.

▶ 읽고 싶은 책 보다 수업 중 읽어야 할 책이 나오면 아무리 지루해 보이는 책이라도 일단 찾아서 끝까지 읽어봤다. 엔도 수사쿠의 『깊은 강』이나 오규원의 『현대 시 작법』, 유종호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등등 전혀 내 취향도 아닌 책들. 교수님의 설명 중에 스쳐간 책이라도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두었다가 꼭 사서 읽어봤다. 물론 시도했다 실패한 책도 있다. 끝까지 읽은 한국인이 솝에 꼽힐 거라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교수님들의 수업 내용보다는 이렇게 수업의 곁다리로 흘러 들어간 다른 책이나 영화 이야기가 늘 흥미로웠는데 이 덕분에 『희랍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 카뮈의 『이방인』, 노신의 『아큐정전』같은 책들이 이제 막 청춘을 시작하는 나의 진짜 고전이 돼 가고 있었다. 재미없고 지루한 교양서나 인문학 책 곳곳에서 마저 예문이 나오거나 슬쩍 작가의 생각이 나오는 부분을 찾아서 혼자 또 재밌게 읽는 방법을 터득했다.

▶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한 가지 주제로 만나서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영화 이야기만 하거나 책, 이야기만 해도 즐거웠다. 새로운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

▶ 막연하게 꾸는 꿈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는 게 너무도 많고 재능도 꾸준히 연습하고 어딘가 내놔야 그게 일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전문성을 가지고 한 일


어린이집, 유치원에서 선생님의 보조교사로 아르바이트

대학교를 일 년 휴학하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일 (독서 수업/ 국어/ 언어영역) 4년

중*고등학생 과외 (내신대비/ 논술/ 수능 언어영역) 2~3년

역사칼럼 쓰기 《조헌》

중*고등학생/ 대학생 자소서 써주기(첨삭과 방향 잡아주고 다시 쓸거리 인터뷰 해주기)



그런데 내가 돈을 주고 배우거나 학교 다니는 게 아닌 받으면서 일할 때는 180도 다른 사람이 됐다. 뭐가 달라졌냐면 무조건 일을 먼저 하고 그리고 쉬는 시간을 확보하자는 주의가 됐다.  돈 주고 돈 받고 하는 일인데 그게 몇 푼이 됐든 욕먹거나 지적받는 게 싫어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일했다. 과제한 줄 쓰기는 최대한 미뤄놓던 내가 사회에 나와 첫 발을 내딛고 돈을 번다는 것의 의미를 좀 더 무겁게 책임감 있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을 할 땐 와다다다 일해놓고 쉬자는 주의인데 나는 회사에서 조차 그걸 제대로 누리지도 않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수업 중에도, 업무를 보는 중에도 개인 핸드폰을 한 번 도 보지 않았다. 처음 일하는 직장에 cctv가 많았던 탓도 있었지만(아이들 수업 태도를 관찰한다는 교육의 메카 대치동 학원이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선생님 감시가 맞았네;;) 그냥 나중엔 그게 습관이 돼서 다른 짓을 하기보단 내 시간이 되어서도 남은 정리를 하거나 첨삭하고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많았으므로 계속 일을 찾아서 하는 타입이 됐다. 또 일이 밀려있는 다른 사람들 일을 돕거나 그러면서 슬쩍 독서도 하고 동료들과 수다 떠는 게 나의 쉬는 시간이 됐다. cctv탓에 의자가 있어도 뭐 제대로 앉아있을 수도 없고 끊임없이 아이들과 소통하고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걸 보여야 해서 피곤했다. 그런데 덕분에 재밌기도 했다. 늘 책과 가까이하고 아이들이 읽는 책 독서 퀴즈를 만들면서 그때 당시 나도 재밌는 책을 꽤 많이 읽었다. 중고등학교 필독서의 다양한 부분을 성인이 돼서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다수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보다는 한 명씩 집중해서 아이들과 만나는 일을 더 하고 싶었다. 과외를 하면서 수험생들을 만났고 내 시간을 좀 더 쓰면서 수입은 두 배로 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아이들을 많이 받은 탓에 월급이 많이 들어온 날에도 쇼핑 한 번 할 시간도 없었고 주말에 보충 수업으로 채워주느라 더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일대일 과외와 가르치는 학생들의 수능 시험이 나에게 남긴 것.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고3 때 보다 더 열심히 언어영역을 공부했고 온갖 종류의 문제집들을 보면서 비문학 글이 이토록 재밌는 거라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수능 비문학 지문에 나온 플라세보와 판옵티콘에 대해 문제를 풀며 읽다가 내가 빠져들어서 호기심에 그와 관련된 책을 찾아서 읽어보기도 했다. 지지리 재미없었던 관동별곡과 고려가요도 막상 가르치려고 책을 다시 펴니 재밌었다. 내가 원래 현실 감각이 없고 활자에서 더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라, 몇몇 개의 글은 나의 마음을 다시 울리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문학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수능 기출에 나온 문학 지문 대부분을 거의 다 알고 유명한 작품은 끝까지 읽었기에 한 장면만 나온 지문 설명도 아이들에게 주제와 줄거리를 요약해서 설명해 줄 수 있었다. 약간 으쓱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전달하는데만 조금 더 신경 쓰면 됐기에. 나는 내 계획은 잘 못 짰지만 돈을 받고 하는 일엔 책임감과 스킬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이들이 매일 해야 할 분량의 숙제와 복습을 점검해 주고 검토해 주는 일을 했다. 그 이후로도 자기소개서가 필요한 상황이 오면 소개를 받아 독후감과 자기소개서 쓰기 가이드를 해줬다. 잘할 수 있는 일로 나도 돈을 벌고 내가 공부할 수 있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어서 즐겁고 좋았다. 새벽까지 이어진 스케줄이 힘든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 동네 과외였기에, 늦은 시간까지 하면서도 힘들고 고생한 만큼 보람도 느껴졌다.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친해지는 과정이 좋았고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내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좋았다. 지문을 같이 읽고 체크해 주면서 내가 문제 푸는 요령으로 대입해서 성적이 오르는 아이들을 보는 게 가장 즐거웠고 사실 학원에서보다 내 시간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한 번씩 아이들이 수능을 치르고 정리할 적마다 여행을 다녔다. 프리랜서답게 영국에 언니를 보러 영국에 꽤 긴 시간 방문 할 수 있었다. 남들이 관광지라 불리는 곳이 아닌 광활하게 펼쳐진 내셔널 트래디셔널을 형부 차로 이동할 수 있었다. 대 자연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지만 영국인들과 아일 오브 와이트란 섬에서 캐러반 체험 캠핑도 하고 수영도 했다.  영국 곳곳에서 있는 영국인들만의 독특한 카부츠와  외국 친구들과 티타임, 오페라 구경, 가족들과 뮤지컬 관람을 했다. 크리스마스 캔들 라이트, 우리 조카들의 크리스마스 공연까지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고 선재랑 함께 엄마랑 함께 건너 간 적도 있다. 전철역에서 늦은 시간 딱 한 번! 훌리건 무리를 만난, 안 좋은 기억을 빼면 나에게 영국은 지금도 또 가고 싶은 나라다. 그때 처음으로 스웨덴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혼자 라이언 에어를 타고 다른 나라로 건너가기도 했다. 유럽 가까운 나라들이 워낙 많지만 직접 혼자서 그것도 외국에서 비행기를 탄다는 일이 나에겐 도전이었고 사실해보니 너무도 별 거 아니란 것도 깨달았다.  실시간 바뀌는 전광판에 긴장을 하면서 희정씨에게 줄 초콜릿과 바디 크림을 다 빼앗겨서(작은 비행기에는 기내 반입이 안 되는 물품이 꽤 많다.ㅜㅜ) 혼자 영어로 싸우면서도 우여곡절 끝에 진짜 아슬아슬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낯선 곳에서 티켓을 끊고 버스를 타고 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 설레고 좋았기에 그 전날부터 있었던 두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하이드 파크에서 형부가 로잉을 젓고 예찬이 예아랑 형부 학교 근처에서 중국인 식당에서 밥도 먹고 하늘을 보는데 평화로웠다. 새와 물고기에 대한 글을 엄청 많이 썼다. 신혼이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던 시기이기에 신랑에게 편지와 엽서를 쉴 새 없이 쓰고 보냈다.  여행의 좋은 점은 특별한 게 아니라 특별한 게 없어지는 일상성이라더니(김영하 작가 글) 나도 여행 곳곳에서 돌아가면 어떤 내가 되어야지, 뭐를 더 잘해주고 좀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하고 글로 써 내려갔다. 작은 냉장고 자석 하나를 봐도 친구들 생각이 났다. 돌아갈 곳이 있고 돌아가서 맞이해 줄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여행은 내게 좋은 자극이 됐다. 친구들과 홍콩과 제주도, 대만을 여행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영국에 마침 출장온 현주 언니에겐 방향치인 내가 킹스턴을 안내해서 같이 쇼핑도 하고 자주 가는 식당 오카에서 초밥도 대접했다. 영어도 길도 다 서툴렀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가이드하는 걸 좋아했고 지도까지 그려가며 반복반복 오고 간 길을 시물레이션 했기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스스로는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 챙겨주고 싶은 타입일지 모르나 내가 누군가를 챙겨주고 뭔가 해야 할 때 나는 움직이는 경험 자원을 가진 사람 같다. 나는 영어를 잘 못했을 때도 무조건 외국인만 보면 말을 걸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사소한 주문이나 질문, 대화를 영어로 이어 나갔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한 뼘 더 성장했고 여행지에 놀러 온 친구들을 가이드할 때 그랬으며 나는 내가 있는 시간을 엄청 늘어지게 뒹굴 거리는 듯했지만 아이들과 수영장이 있을 때마다 같이 물에 첨벙 뛰어드는 타입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경험자원은 도전과 현재에 대한 충실함이기에! 그렇기에 책에도 그렇게 순간 몰입돼서 재밌는 독서를 하고 영화도 드라마도 빠져서 봤던 게 아닐까.


▷ 돈을 벌면서 누군가의 시간을 쓰는 책임감에 대해 배웠다.

▷ 내가 가르치면서 재밌어하고 에너지를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 쉬는 날과 나의 쉬는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 꼼꼼하게 누군가에게 피드백을 해주고 그걸 통해 보람을 느꼈다.



▶ 대학생들의 천편일률적인 자기소개서보다 중학생 고등학생이 쓴 자기소개서가 더 재밌다는 걸 알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뭔가의 경력과 자격증, 점수를 내세우는 글이 아니라 부족해도 하고 싶은 용기, 그걸 위해 도전한 마음이, 꿈을 향한 마음이 언제나 더 빛났기에. 나는 그냥 간단한 첨삭만 하면 되는 단순 아르바이트에도 열과 성을 다해 멘트를 써줬더니 개인적으로 자기소개서를 의뢰하는 부탁도 꽤 들어왔다.

▶ 시간관념과 약속에 대한 마음이 이전과 달라졌다.

▶ 부모님한테 처음으로 용돈을 드리면서도 생색내고 아까워한 적도 많은데 생각해보니 살림과 가계에 크게 보탬도 되지 않을 만큼의 양을 내놓고도 뿌듯해했던 것 같다.

▶ 중간 수수료를 떼이지 않고 직접 학생들의 소개만으로도 2~3년간 수업 스케줄을 채울 수 있었다.



《실패 이력서》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 『연연풍진』(허우 샤오시엔의 작품)의 주인공 '완'처럼 책과 가까이하는 삶을 살고 싶어서 출판사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응시한 곳에서 시험 문제마다 한자어가 엄청나게 나오는 바람에 한 자도 못쓰고 주변 수많은 책들을 살펴보다가 한자가 나온 힌트를 얻으려고 딴짓하다가 실패했다. 답을 절반도 못 채웠던 나의 시험지여.

정작 학교에 다닐 때 기독교 출판사에 넣어준다고 하신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때는 들어가고도 싶지 않았던 출판사인데 그 이후로 두 번이나 응모해서 다 떨어져버렸다.



▶ 출판과 편집이 나에게 맞는 일이 아니구나.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과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곳이고 자원이 되는 지식 습득이 먼저라는 걸 배웠다.

▶ 나는 대학 졸업 후 한 번도 다시 학교에 다니거나 공부를 하고 싶단 생각은 한 번도 안 들었다.

▶ 선재를 낳고 교수님께서 불러주신 작은 소설 모임에서 생애 처음으로 소설과 동시 동화를 쓰고 큰 신문사에 넣어봤지만 전부 떨어졌다.

▶ 고양시에서 지원하는 글쓰기 출판 모임에도 떨어짐.


아... 자꾸만 떨어지는데

앞으로 이런 실패를 좀 더 해보고 도전도 적극적으로 해 볼 계획이다. 이런 실패는 언제는 대 환영이라고 하면 내가 좀 이상한가.






   현재 맡고 있는 일

히스크레마(수화 찬양팀 리더)

영유아부 교사

여름 방학이 끝나고 9월에 일산에서 독서모임 오픈 예정 (한 달 한 책)

그리고 제일 중요한 우리 아이들 키우기. 아이들이야 말로 내가 상상도 못 했던 나의 도전과 창의성을 키워주는 찐 경험의 원천이 아닐까. 두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열심히 뛰어놀고 있습니다. 진짜 방학도 시작!!!







*시즌14 글로 코칭 강점 에세이 쓰기   with 이너조이

*두 번째 : 경험자원


사진은 지금의 나, 앤나우를 만들어준 우리 귀한 선재의 그림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름 방학'

진짜 내일부턴(어제 썼거든요) 아이들 여름 방학이닷. 푸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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