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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반대편에 설까

반대급부에 대한 감각적 판단 - 선과 악의 윤리

by inome

한 가지 사실을 두고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얼굴을 만들어낸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누군가는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아름답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다가올 어둠을 걱정한다. 같은 말을 듣고도 한쪽은 정의라 부르고, 다른 쪽은 독선이라 비난한다. 같은 역사를 마주해도 누군가는 영광을 외치고, 누군가는 상처를 절규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경험 위에 자신만의 논리를 쌓아 올린다. 그 논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단단히 다져진다.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 때로는 말로,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피로써.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서로 다른 편에 서게 된다.

우리는 왜 이런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까. 그것은 반대편에 선 타인을 단순히 틀렸다고 치부하는 순간, 우리 스스로도 이해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진실을 가진 이들을 외면하면, 우리도 언젠가 외면당한다. 그래서 우리는 왜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진 진실 앞에 서게 되는지, 왜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등을 돌리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신이 선 자리도 타인이 선 자리도 온전히 볼 수 있다.

쌓아올린 경험과 지식, 연륜과 자격은 단순히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 사회를 지탱하는 뿌리이자 뼈대가 된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돌기둥처럼, 오랜 세월 동안 검증과 평가를 거쳐 살아남은 권위와 전통이다. 존중은 강요로 얻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타당성과 정당성을 견뎌낸 것만이 비로소 공동체의 약속이 된다. 그렇게 세워진 법과 도덕, 규범은 세상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인간이 인간 곁에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

공동체가 간직해온 가치와 신념, 관습과 생활양식은 그 자체로 이어져야 할 어떤 것이다. 기억은 쌓이고, 시간은 흘러가며, 우리는 그 위에 새로운 오늘을 얹는다. 그것이 곧 역사다. 흐름은 끊기지 말아야 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이 달라져도, 전통은 안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야 한다. 과거를 흉내 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 시대를 살아갈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는 결국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런 규범은 사람들이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고, 서로를 이해하게 돕는다. 새로운 변화나 발전도 예전부터 내려온 전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통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지금의 나와 사회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힘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따르는 가치와 믿음은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 그에 맞게 다시 생각해보는 일도 중요하다.

문제는 이런 규범이나 전통의 영향력이 너무 크면, 오히려 개인이 자유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사람은 혼자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다 보면 때로는 자신만의 판단을 접을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익숙한 것을 계속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새로운 생각이나 가치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어제가 평온했다면, 오늘도 내일도 그래야만 자신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새로운 변화보다는 익숙한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자신에 대한 집착이나 왜곡된 생각이 생기기도 한다. 이미 통제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마치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달라진 현실을 외면한 채 과거의 기준을 고집하며 그것에 권위를 부여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기준을 강요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다양하게 생성되고 또한 상대적인 특성마저 가지고 있다. 유사하고 인접한 환경에서의 경험도 경험하는 주체의 조건과 강도에 따라 다르게 기억된다. 그래서 어떤 전통도 새롭게 만들어지는 다양한 삶의 유형을 모두 담아내지 못한다. 다만 구체적인 것을 평균적인 삶으로 전환하고 그 값을 기준으로 질서를 만들 뿐이다. 따라서 질서는 누군가에게는 보호가 될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억압이 된다.

반대가 없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주어진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떤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악을 생각할 때 잔혹하고 특별한 얼굴을 떠올리지만, 아렌트가 마주한 아이히만은 달랐다. 그는 유대인 학살에 깊숙이 관여했으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재판정에 섰고, 그의 이웃들은 그를 성실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이렇게 평범한 인간이 상상조차 힘든 잔혹함에 가담할 수 있었을까.

아렌트는 악이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 평범한 사람 안에서 태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이 질문 앞에 멈춰 섰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악의를 품지 않았고, 상부의 명령과 국가의 법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래서인지 인간을 죽였다는 죄책감보다, 오히려 맡은 임무를 완수했다는 의무감만을 내세웠다. 실제로도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체계에 순응했으며, 그렇게 하나의 부품처럼 움직였다. 그의 복종이 악을 현실로 만들었다.

반대에 선다는 것은 명령을 거스르고, 법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때로는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경험을 부정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히만은 순종을 택했다. 아니, 선택했다는 자각조차 없이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그는 반대편에 서지 못한 채, 학살의 편에 서게 되었다. 생각하기를 멈춘 사람은 결코 반대편에 설 수 없다. 반대란 단순히 다른 의견을 내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시대, 같은 공포 속에서도 어떤 이들은 명령을 거부하고 법을 어겼다. 목숨을 걸고 생명을 구해낸 사람들이었다. 법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지 못할 때, 그들은 스스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오스카 쉰들러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나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좇았다. 사업을 이용해 수백 명의 유대인을 구했고, 위험을 무릅쓰며 법을 어겼다. 그의 행동은 단순한 불복종이 아니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쉰들러는 법과 명령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체계 너머를 보았다.

쉰들러가 했던 일은 이상을 좇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인간으로서 느끼는 가장 기본적인 감각을 버리지 않았을 뿐이다. 주어진 체계 안에서 질문했고, 판단했고, 행동했다. 그 과정에서 안락과 성공을 포기했다. 군중 속에 섞여 순응하는 건 쉬웠겠지만, 그 편안함을 거절했다. 위험과 고립을 감수하면서 생명을 구하는 길을 택했다. 이처럼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질문하는 이들이 있다.

체계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명령을 넘어서야 할 때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움직임이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 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따를 것인가.

물론 반대가 언제나 선을 향해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는 때로,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에서 시작된다. 누군가는 정의를 위해 반대한다고 믿지만, 그 정의가 다른 이에게는 억압이 될 수도 있다. 선을 향해 뻗은 길이라 생각했지만, 그 길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고, 또 다른 폭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반대를 무조건 찬양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왜 반대하는가, 무엇을 위해 반대하는가이다. 질문 없이 하는 반대는 또 다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일 뿐이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반대조차도 순응이 될 수 있다.

일찍이 철학자 니체는 도덕을 선과 악의 단순한 대립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도덕이란 외부에서 주어지는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는 가치의 체계라고 말했다. 선과 악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을 설명하면서 ‘주인’과 ‘노예’라는 두 개의 극단을 불러냈다.

주인은 자기 안의 힘을 믿는다. 그래서 강함과 긍정, 창조적인 에너지를 삶의 중심에 둔다. 옳고 그름을 나누는 기준도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다. 삶을 정의하지 않고 살아낸다. 반면 노예는 그렇지 못하다. 노예는 주인이 세운 가치에 맞서기 위해, 그것을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도덕을 만든다. 주인이 말하는 강함을 폭력이라 부르고, 찬란함을 허영으로 몰아붙인다. 대신, 그는 소박함과 겸손, 체념에 가까운 태도를 선하다고 부른다. 그래서 노예의 도덕은 창조가 아니라 반작용이다.

니체가 보기에 이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주인의 도덕은 능동적이다. 삶을 향해 나아가는 몸짓에서 비롯된다. 반면 노예의 도덕은 수동적이다. 그 기원은 거부다. 그는 누군가를 부정함으로써만, 자기 자신을 간신히 세운다. 그래서 니체는 말했다. “노예 의식을 가진 인간은 좋은 평판을 들으면 기뻐하고, 나쁜 평판에는 괴로워한다.” 노예는 언제나 타인의 눈을 의식한다.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보다, 남이 만들어놓은 세계를 어떻게든 부정하는 데에서 정체성을 얻는다.

이를테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음주운전을 엄격히 금지하는 사회에서, 병증으로 위독한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가 술에 취한 채 운전대를 잡았다면, 우리는 그 행위를 단순한 위법으로만 단죄할 수 있을까. 법의 눈으로 보자면 명백한 잘못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선택의 무게를 생각하면, 그저 ‘잘못’이라는 한마디로 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비난이 가능하려면,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려는 절박한 행위보다 음주운전이라는 규범 위반이 더 중대하다고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누구도 쉽게 단언하지 못한다.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본능과, 사회 질서를 지키려는 원칙이 충돌하는 이 순간에, 우리는 법이라는 하나의 기준만으로 옳고 그름을 재단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매 순간 상황의 특수성과 중대성을 고려해 판단할 수밖에 없다. 언뜻 이 예시는 주인도덕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존의 질서와 규범보다 자신이 만든 가치에 따른 행동이었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려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동정심과 연민의 관점에서는 노예도덕의 측면도 섞여 있다.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돕고자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이처럼 도덕적인 명료성보다 딜레마인 상태가 자주 발견된다.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선택하며,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나아가는 삶.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기준에 따라 삶을 조직하고 결정하는 태도.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분명 강인하고 자유롭게 느껴진다. 그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사는 것이 성숙이라고, 은근히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런 선택이 쉽다면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판단하고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자신만의 기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또 다른 형태의 자율일 수 있다. 혹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남보다 앞서기 위해, 독립적인 척 살아가는 연극. 그렇다면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내 기준'이라 부르며 정당화하는 태도라도 스스로의 주인이라 할 수 있을까. 타인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 세상의 기준에 휘둘리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주인의 삶을 선택하던 노예의 삶을 선택하던 아니면 그때그때 다른 선택을 하던, 인간의 행동이 사회에서 인정되는 합의된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동시에 법을 지키는 것만으로 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는 없다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편법적인 접근이나 전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사례는 법으로 명확히 해결하기 어렵다. 때로는 법을 준수하는 것만으로도 도덕적 딜레마를 일으킬 수 있다.

니체의 관점에서 선악으로 구성된 도덕 개념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는 선악의 구분이 인간의 본성과 삶의 복잡성을 단순화시킨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선악이라는 이분법적인 도덕 기준이 인간의 역동적인 삶을 제한하며 창조성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선악이라는 가치는 실체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적인 제도와 도덕 체계를 통해 사람들의 내면에 강제와 순응을 강요하는 수단이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과 충동을 억누르고, ‘권력 의지’에 대한 실현을 방해하는 구조였다. 그래서 ‘노예도덕’은 약자들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질서였다.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누구나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니체는 이를 '지배적 도덕' 혹은 '주인 도덕'이라 불렀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정의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강자의 도덕이다. 강자는 자신의 권력 의지와 삶의 의지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삶을 추구한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보다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이 진리'라는 관점이다.

자유란 무엇을 해도 되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세운 기준 앞에서 자신을 먼저 단속할 줄 아는 태도에 가깝다. 주인의 도덕은 외부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누구도 보지 않는 내면에서, 조용히 시작되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과 무관하게 ‘이게 옳다’고 믿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살아내는 일. 그런 삶만이 진짜 창조이고, 진짜 자유이며, 진짜 반대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주인도덕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기준 삼아 살아가는 일이다. 하지만 그 신념이 사회의 균형과 질서를 위협한다면, 그때도 우리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길을 걸어야 할까?

다시, 히틀러와 아이히만의 관계를 떠올려 보자. 아이히만은 명령을 따랐다. 그는 단지 체제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개인적 신념이 아니라 규율과 명령 속에서 움직인 것. 하지만 히틀러는 자신의 신념을 따랐다. 국가와 민족의 우월성을 확신하며, 그 믿음이 옳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그는 주인도덕을 따랐을까? 아마도 그렇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스스로 가치를 만들고, 그 가치 안에서 움직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끔찍했다.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은 히틀러도, 아이히만도 인간의 존엄을 짓밟았다는 점이다. 한 사람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움직였고, 다른 사람은 아무 의심 없이 따랐다. 그렇다면 이 경우 신념을 따르는 것이 반드시 옳은 길이었을까? 아니면 법과 규범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망설일 수밖에 없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도덕적인가?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막스 베버는 인간의 행위를 네 가지로 나누었다. 목적 합리적 행위, 가치 합리적 행위, 정서적 행위, 전통적 행위. 목적 합리적 행위는 목표를 위해 가장 효율적인 길을 찾는 것. 가치 합리적 행위는 신념과 윤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 이 두 가지는 명확한 방향을 가진다. 목적을 이루려 하고, 신념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그 신념이 너무 강하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믿음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거나.

정서적 행위는 감정이 만드는 것. 전통적 행위는 과거의 습관에서 비롯된 것. 이들은 움직이지만 그 자체로 흐른다. 생각 없이 따라가고, 오래된 것을 반복한다. 익숙함 속에서 안정을 찾는다. 그래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다만, 변화는 어렵다. 새로운 것 앞에서 망설이고, 낯선 것을 경계한다.

어떤 선택이 옳을까.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과 익숙함 속에 머무는 사람. 누구의 길이 더 안전할까. 누가 더 많은 것을 부술까. 결국, 우리는 묻는다. 신념을 따른다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목적을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우리 자신과 사회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다. 움직이는 것들이다. 고정된 것은 없다. 법도 변한다. 시대와 환경이 바뀌면, 법도 그에 맞춰 달라진다. 새로운 상황에 맞게 적응하고, 대응한다. 전통은 우리의 삶을 규율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전통은 변할 수 있어야 하고,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사회도, 우리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변화할 수 있다. 우리가 믿는 가치,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들도 시간 속에서 달라진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권력의 구조에 따라 달라진다. 니체는 도덕이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믿는 도덕이 절대적인가. 우리가 정의라고 말하는 것이 정말 정의인가.

우리는 서로 다르다. 각자의 경험이 다르고, 신념이 다르고, 보는 방향이 다르다. 그래서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사회는 그렇게 유지된다. 도덕은 변하고, 규범은 바뀌고, 사람은 달라진다.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단 하나다. 우리는 같아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내 앞에는 언제나 나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내 앞을 막아서는 누군가가 반드시 탄생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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