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보다 내가 옳은 이유는 80억 개도 넘어
우리는 거의 매일, 자신이 옳다고 여길 만한 이유를 하나씩 만들어 간다. 그것은 어두운 길 위에서 손전등을 들고 나아가는 일과 닮아 있다. 세상은 자주 낯설고, 때때로 위험해 보인다. 그 불빛이 없으면 한 걸음조차 내딛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서 비롯된 선택일 것이다. 처음에 그 이유들은 우리를 둘러싼 작은 울타리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울타리는 벽으로 변하고, 점점 두터워져 안과 밖을 나누기 시작한다. 바깥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결국 안쪽에 맴도는 메아리만을 진실인 듯 여긴다.
‘내가 옳다’는 믿음이 자리를 잡을수록 그 바닥엔 어렴풋이 ‘너는 틀렸다’는 판단이 깔린다. 그 믿음이 굳어질수록 우리는 설명하기보다는 단정하게 되고, 이해시키려 하기보다는 판단하려 든다. 본래 말은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통로였지만, 어느새 상대를 겨누는 도구로 변해간다. 반박은 의견에 머무르지 않고 이내 존재를 향하고, 그 말 앞에서 입을 다문 이들은 점차 고립의 경계에 선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그 다름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더는 묻지 않게 된다. 그때, 말은 조용히, 그러나 뼛속까지 스미는 상처가 된다.
낯선 것을 경계하고 익숙한 것을 신뢰하는 태도는 본능에 가까운 반응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반응에만 의지할수록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을 놓치게 된다. 내가 믿고 있는 이 기준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그것은 스스로의 판단 끝에 얻어진 결론인가, 아니면 단지 반복된 풍경이 익숙함으로 착각되었을 뿐인가. 언젠가 우리는 그 질문 앞에 멈춰 서야 할 것이다. 내가 믿는다고 여긴 그것은, 실제로 나 자신의 생각이 맞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공동체를 파괴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마지막까지 의지하고 싶은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소속감을 얻고, 보호받는 감각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 배움은 타인을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태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흐름은 종종 그 기대와는 다른 방향을 따른다.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양보해야 한다는 말은 익숙하게 들린다. 다수의 선택이 정당화되는 순간, 소수의 목소리는 이해보다는 방해로 간주된다. 현실은 타협을 요구하고, 타협은 쌓여 신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자리 잡은 신념은 어느새 특정한 폭력을 감싸는 외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자주 질문해야 한다. 지금의 믿음은 정말로 괜찮은가. ‘괜찮다’는 말이 정말 책임질 수 있는 감각인가. 그 질문 하나가, 우리를 조금 더 부드럽고 사려 깊은 존재로 이끌 수도 있다.
“당신의 생각은 신선하지만 비상식적입니다.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립될 수 있어요.”
이런 말은 때로 조언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문장 안에는 어느 틈엔가 선이 그어져 있다. ‘틀림’과 ‘정상’, ‘함께’와 ‘밖’을 나누는 경계. 그 말은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한 문을 열기보다, 오직 하나의 방향만을 정당화한 채 나머지를 닫아버린다. 배려의 언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준을 제시하고 판단을 유도하는 말이다. 통제는 그렇게 다정한 얼굴로 다가온다.
사람은 말에 의해서도 꺾일 수 있다. 누군가의 단호한 문장은 조용히 사유의 시간을 앗아가고, 선택의 여지를 흐리게 만든다. 차이가 곧 틀림으로 인식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 안의 다름을 감추기 시작한다. 익숙한 것만이 옳다고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그 익숙함은 벽이 되고, 바깥의 변화는 무시되며 안쪽은 점차 굳어져간다.
역사는 늘 그 벽 바깥으로 나가려는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달라졌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에 대해 ‘정말 그런가’ 하고 묻는 사람들 덕분에. 여성에게도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이들, 노동에 정당한 대가가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 한때 낯설고 불온하다고 여겨졌던 목소리들이 지금은 보편적 권리로 자리잡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전통’이나 ‘상식’이라 부르는 것도, 과거의 비상식이 쌓여 형성된 어떤 결과일지 모른다.
“예전부터 이렇게 해왔습니다.”라는 말은 여전히 가장 빈번한 억압의 논리로 쓰인다. 사람을 연결하던 전통은 종종 누군가의 삶을 붙드는 그물망으로 바뀐다. 사랑도 다르지 않다. 배려라는 이름 아래 상대를 바꾸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면, 그것은 보호라기보다는 통제에 가깝다.
폭력은 언제나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 단지 개인의 일탈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반복되고 용인되는 방식 안에서 힘을 얻는다.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되는 무임금 노동, ‘헌신’이라는 말로 포장된 착취, ‘정상’이라는 명목 아래 일어나는 배제. 우리는 그런 현실들을 미덕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안에서 피해자조차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고, 또 다른 피해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그렇게 폭력은 전해지고, 익숙한 풍경이 되어간다.
사랑이라는 말로, 보호라는 이유로, 공동체의 안정을 앞세워 정당화되는 수많은 통제들. 그것들은 결국 자유를 흐리게 만들고, 말할 권리를 침묵으로 밀어낸다. “아프다”고 말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사회라면, 그 사회는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일상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폭력은 언제나 명분을 입고 나타난다. 윤리, 규범, 도덕, 전통. 이 모든 것은 원래 사람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존재했지만, 그 본래의 목적은 서서히 희미해진다. 공동체의 질서를 앞세워 사상을 재단하고,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며 선택을 제한하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경계를 넘는다. 말은 논리로 가장되고, 논리는 권력을 두르며, 그 권력은 다시 언어로 돌아와 사람을 억누른다.
억압은 때로 먼저 손을 뻗는다. 거기에 대한 저항은 선택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응답이다. 불균형한 구조, 차별을 당연시하는 관습은 흔히 그 시작점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게 된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자주 ‘문제적’이라 불리며 경계 너머로 밀려난다. 반란이라 이름 붙여지고, 위협이라 낙인찍힌다. 그렇게 공격과 방어는 서로를 물고 이어지고, 그 고리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그 순환이 오래될수록, 폭력이 본래의 얼굴을 감춘다는 점이다. 먼저 말한 쪽은 질서를 지키려 했다고 하고, 맞선 쪽은 정당하지 못한 구조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말한다. 시간이 지나며 그 경계는 흐릿해지고, 처음과 끝이 모호해진다. 누가 먼저였는지, 무엇이 지나쳤는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그렇게 원인과 책임은 뒤엉기고, 폭력은 서서히 삶의 일부가 된다.
폭력이 반복되면, 정당성은 점점 흐려진다. 누가 먼저였는지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해지고, 피해는 가해로, 가해는 또 다른 피해로 이어진다. 억울함은 복수로 바뀌고, 복수는 다시 원한의 이야기를 만든다. 그렇게 시작과 끝은 서로를 닮은 채 반복된다. 처음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폭력이 이어지는 순간부터 그 성격은 변한다. 억압에 맞선 저항은 점점 응징의 감정으로 바뀌고, 어느새 상대를 해칠 자격이 있다고 믿게 된다. 손에 쥔 힘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감정은 옳고 그름을 밀어낸다.
개인 사이의 갈등만이 아니다. 역사 속 많은 혁명이나 사회운동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부당한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움직임으로 시작됐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 운동을 이끈 이들이 새로운 지배자가 되곤 했다. 과거의 억압을 끝장내겠다는 다짐은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또 다른 억압이 메운 것이다.
이를테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시민을 억압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그에 맞선 시민의 저항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의 자리를 되찾기 위한 시도다. 부당하게 강탈된 권력에 맞선 행위는, 같은 물리력을 동반하더라도 전혀 다른 결을 지닌다. 이처럼 폭력의 얼굴은 동일해 보여도, 그것이 나타나는 자리는 각기 다른 의미를 품는다.
힘의 균형이 무너진 사회일수록 이 순환은 명확히 드러난다. ‘질서’라는 명분 아래 행해지는 통제, ‘저항’이라는 이름을 단 응징—모두 그 뿌리는 같고, 결과는 유사하다.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형체를 바꿔 다음 이야기를 준비할 뿐이다.
왜 우리는 이 악순환을 끝내지 못할까. 누구도 그것을 바라지 않으면서, 우리는 믿기 어려울 만큼 손쉽게 다시 그 안으로 들어선다. 단지 외부 조건 때문만은 아니다. 폭력의 반복에는, 그보다 더 깊은 어떤 작용이 있다.
인간은 두 겹의 세계에 발을 딛고 살아간다. 하나는 의식의 세계, 자신이 보고 듣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말로 붙잡히지 않는 감정의 흐름, 설명조차 어려운 내면의 세계다. 전자는 일상의 얼굴이고, 후자는 마음 깊은 곳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의 조류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서 있는 것이 자아다.
자아는 세상과 접촉하는 창처럼, 우리를 세상에 연결시킨다. 우리는 자아를 통해 ‘괜찮은 사람’의 얼굴을 만들고, 사회가 요구하는 침착한 시민의 태도를 유지한다. 심리학자 융은 이 사회적 가면을 ‘페르소나’라 불렀다. 하지만 이 가면은 모든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억울함, 수치심, 분노 같은 감정은 눌러지긴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웃고 있어도 속은 흔들리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마음 안에선 반박이 자라고 있다.
감정은 그렇게 자아의 표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무의식이라는 어두운 저장소 안에, 잊은 줄 알았던 감정들이 조용히 눕는다. 평소에는 의식 위로 떠오르지 않지만, 모멸이나 실망, 혹은 어떤 억압이 주어졌을 때, 이 감정들은 다시 고개를 든다. 자아가 단단하다면 이 파동은 조절된다. 그러나 자아가 흔들리거나 압박이 지나치면, 감정은 더 이상 눌러지지 않고 한순간에 터져 나온다. 행동으로, 말로, 때로는 폭력으로.
이 감정의 흐름은 단지 개인적인 경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융은 인간의 무의식 안에는 개인의 기억뿐 아니라, 인류가 오랜 시간 공유해온 감정과 이미지들이 쌓여 있다고 말했다. 이를 그는 ‘집단무의식’이라 불렀다. 어머니, 영웅, 그림자 같은 형상들—우리가 이름 붙이지 않아도 알아보는 어떤 심상들이 그 안에 존재한다. 이 형상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깊은 반응을 일으키고, 우리가 자각하지 못한 채 어떤 행동을 유도하기도 한다.
무의식의 세계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구조가 존재한다. 바로 ‘콤플렉스’다. 이는 단순한 열등감이나 민감함이 아니다. 콤플렉스는 과거의 감정들이 응축된 심리적 매듭이다. 반복된 모멸, 억압, 상처—그 감정의 기억들이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다가, 특정한 자극을 만나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다. 이를테면, 과거에 반복적으로 무시당한 경험이 있다면, 비슷한 분위기만으로도 과도하게 움츠러들거나 분노하게 된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채 감정에 휘둘리고, 행동은 순간적으로 굳어진다. 콤플렉스는 그렇게 의식을 건너뛰고, 우리를 움직인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폭력을 당하고도 저항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때로는 감정을 눌러두고, 상황을 분석하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전략을 선택한 결과다. 하지만 그 선택이 고통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억울함과 수치는 말없이 무의식에 남고, 다른 상황, 다른 방식으로 다시 표출된다. 언젠가,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그 감정은 다시 고개를 든다. 무의식은 그런 식으로, 언제나 조용히 작동하고 있다.
폭력은 단순한 충동도, 우발적인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균열에서 비롯된다. 의식과 무의식, 자아와 감정 사이의 균형이 어긋날 때, 말로 건너가지 못한 상처는 모습을 바꾼다.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무의식의 바닥에 가라앉고, 시간이 지나면 전혀 다른 얼굴로 떠오른다. 참았던 말, 삼켰던 분노, 지나쳐야 했던 억울함은 결국 가장 불편한 순간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만 상처는 시간으로 지워지지 않는다. 억울함은 특히 그렇다. 누가 사과했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그 감정의 중심과는 무관하다. 억울함은 말보다 깊고, 이성보다 오래간다. 아무 일 없는 얼굴로 살아가면서도 마음 어딘가에 얹힌 감각. 무엇인가 덜어지지 않았다는 불균형. 그 감정은 문득 한 사람을 멈춰 세운다. 그리고 되묻게 한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었는가. 지금 돌려받은 것이, 과연 그 무게와 닿을 수 있는가. 마음속 저울은 그렇게, 조용히 자신을 바라본다.
사람은 대개, 자신이 받은 고통만큼, 아니면 그보다 아주 조금 더 되돌려줄 때 마음이 겨우 가라앉는다. 그것은 계산된 의도라기보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다. 감정의 저울을 맞추려는, 설명하기 어려운 욕망. 하지만 이 균형은 수치로 환산되지 않고, 법처럼 외부에 공표되는 기준도 없다. 오직 자신의 감각만이 그것을 알고 있다. 누구도 대신 재지 못하고, 또 아무도 그 정확함을 부정할 수 없는 내면의 무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수는 자주 정의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억울함이 너무 오래 쌓이면, 그 무게가 스스로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상처 준 사람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갈 때, 그 모습이 오히려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저 사람은 괜찮은가. 그렇게 마음속에서 문장이 형성된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지만, 스스로에게는 분명히 울린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 감정은 아직 저울 위에 남아 있다고 믿는다.
복수는 분노의 문제로 한정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더 오래 남는 감정은 '이게 다인가'라는 물음이다. 어딘가 맞지 않는 채로 끝나버릴 것 같은 불편함. 말로도, 위로로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 그래서 어떤 이는 그 공백을 감지하고, 멈추지 못한다. 복수가 꼭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이제야 맞춰졌다'는 느낌 하나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복수는 상처의 다른 이름이다. 억울함이 해결되지 않을 때 사람은 감정을 안으로 삼키거나 바깥으로 밀어낸다. 전자는 자신을 갉아먹고, 후자는 타인에게 새로운 상처를 남긴다. 결국 복수는 자신을 지키려는 몸짓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파괴의 시작점이 된다. 한 사람의 회복이 또 다른 사람의 무너짐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복수는 늘 불완전하다. 고통은 나눠지지 않고, 전염된다.
사회는 질서의 이름으로 감정을 억제시킨다. 피해자는 침묵을 강요받고, 문제를 말하는 사람은 문제로 취급된다.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불편함이 되고, 불편함은 기피 대상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침묵을 택한다. 감정을 꺼내는 일보다, 그 감정이 불러올 결과가 더 두렵기 때문이다. 조용한 사람, 충돌 없는 하루, 정제된 표정을 우리는 평화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편의다. 불편을 외면하는 문화 속에서 침묵은 하나의 생존 방식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지나가는 하루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버텨낸 하루가 된다. 웃고 있는 얼굴 뒤에 있는 고통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갈등을 피하는 일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다. 삶은 무겁고, 누구나 지쳐 있다. 그러나 피한 감정들이 쌓이는 방식은 늘 위험하다. 형태를 바꾼 감정은 언제든 가장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어떤 날, 더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지점에 도달한다.
문제를 말한 사람이 문제로 여겨지는 구조, 감정이 감춰져야만 유지되는 평화. 그 균열은 지금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전혀 다른 얼굴의 폭력으로 우리 앞에 돌아올지 모른다. 그때 가서야 우리는 깨닫는다. 그 모든 침묵이 사실은 말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