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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넘고 싶습니다만

by inome

우리는 왜 말을 건네고, 문장을 적고, 붓을 드는 걸까. 하루를 조금 더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오래전부터 우리 몸속에 새겨진 본능 때문일까.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이 충동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 있다. 세상 속에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어딘가와 이어지고자 하는 몸짓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인간은 그것을 좇아 스스로를 밖으로 열어 보인다.

하지만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언제나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전하고 싶은 것들이 생겨나도, 세상은 가끔 조심하라며 손을 들어 막는다. 생각을 꺼낼 때는 그에 따르는 무게까지 짊어져야 한다는 암묵이 있다. 말이 다른 이의 삶에 남길 수 있는 흔적을 헤아리지 않고서는, 자유롭게 마음을 펼칠 수 없다. 서로 얽혀 사는 존재에게, 가벼운 한마디조차 누군가의 하루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생각보다 더 섬세하고 까다롭다. 정해진 규칙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수많은 틈이 존재한다. 상황과 얼굴, 순간의 공기가 겹치면서 같은 말도 전혀 다른 빛깔을 띤다. 사람들이 남긴 한마디가, 골목을, 스크린을 타고 뜻밖의 파문으로 번지기도 한다. 특히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말은 개인적 표현이라 하더라도 사회적 기준과 부딪히게 된다. 우리는 매번, 꺼낸 마음이 어디까지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조심스레 묻는다.

이 복잡한 균열은 개인의 표현을 넘어, 우리 사회 전체에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생각을 드러낼 때, 그 말들이 어디서 충돌하고, 어떻게 읽히는지를 묻는 일이다.

디즈니 영화 <인어공주>의 주연 배우 캐스팅을 둘러싼 논란도 그 질문 중 하나다. 오랫동안 인어공주의 이미지는 백인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왔다. 그러나 새롭게 제작된 영화에서는, 다양성을 반영해 흑인 배우를 주연으로 세웠다. 일부 관객은 '보편적 미의 기준'이나 '원작 충실성'을 이유로 반발했다. 또 다른 이들은 '포용성과 새로운 해석'을 지지했다.

이 논란의 핵심은 한 인물의 외모가 아니다. 어디까지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어디서는 멈춰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선 넘지 마." 그 짧은 말 속에는, 보이지 않는 신뢰의 막을 존중하자는 약속이 깃들어 있다.

선은 한계를 표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자리를 인정하고, 지켜주기 위해 세운 얇은 경계다. 침범하는 순간, 관계는 쉽게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선과 가까워지면 갈등이 증폭되고, 멀어지면 변화가 사라진다. 우리는 눈빛과 말, 작은 침묵을 읽으며 적당한 거리를 조율한다. 그러나 욕망이나 무심함이 앞설 때, 그 거리는 무너진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전통을 어떻게 재현해야 하는가, 새로운 목소리를 어떻게 담아야 하는가. 한편에서는 원작의 정체성을 지키려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얼굴을 찾으려 한다. 이 충돌은 문화예술이 혁신을 받아들이는 방식,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떤 가치를 품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으로 이어진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일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상상력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따른 책임을 함께 끌어안아야 한다.

<인어공주>의 원작을 들여다보면, 피부색이나 외모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대목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인종을 상상하든, 원작을 훼손한다고 말할 근거는 애초부터 없었다. 다만 오랜 시간 반복된 이미지가 하나의 정답처럼 굳어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익숙한 인어공주의 얼굴을 고집하고, 그 변화 앞에서 거센 거부감을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선호를 넘어선다. 익숙함이 주는 심리적 안정에 대한 깊은 의존, 그리고 기존 틀에 저항하려는 본능적 거부가 겹쳐 있다.

그러나 원작이 품고 있던 유연함을 기억한다면, 변화는 자연스럽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얼굴을 담는 일은 이야기의 핵심을 배신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와 현재를 잇고, 익숙한 세계를 조금씩 넓히는 방식이다. 예술은 늘 사회적 변화 속에서 모습을 바꾸어 왔다. 지금이라고 다를 이유는 없다.

변화에 대한 저항은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 가운데 하나일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도 여러 장면에서 그것을 목격한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확장되거나, 특정 인종의 대표성이 강화될 때마다 일어나는 반발들.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깊은 간극은 이처럼 여전히 선명하다. 시간은 그 간극을 견디며 조금씩 새로운 가치관을 자리 잡게 했다. 공동체는 더 다양한 얼굴들을 품는 방향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이는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틀 자체를 다시 짜는 긴 여정이었다.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은, 새로운 질서가 몸을 이루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하나의 과정에 가까웠다.

'인어공주' 캐스팅을 둘러싼 논란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논의는 원작의 본질을 훼손했는지 여부를 넘어, 오랫동안 고정돼 온 문화적 이미지를 어떻게 새롭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닿아 있다. 기억 속에 각인된 하나의 이미지는 강력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야 할 이유는 없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새로운 얼굴을 맞이하는 일은 본래의 정신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는 일이다. 거부감이 일어나더라도, 사회는 크고 작은 충돌을 지나며 시야를 넓혀간다. 이러한 논의는 단순한 찬반을 넘어, 보다 여유로운 시선으로 마주해야 한다.

오늘날의 논쟁은 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거의 유산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새롭게 해석할 것인가. 이는 어떤 집단의 경험과 가치가 세상에 어떤 형태로 기록되고 재구성될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다양한 생각을 주고받고, 서로 다른 질문을 던지는 자유는 여전히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다. 다만 그 자유는 필연적으로 충돌을 동반한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긴 인내를 가질 수 있을까.

누구에게나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권리가 있다. 모든 말과 행동은 사회적 맥락 속에 놓인다. 문화와 가치관이 흔들리는 시기, 충돌은 단순한 반발에 그치지 않는다. 공동체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점검하고 다시 구성하려는 긴 과정을 거친다. 역사를 돌아보면, 큰 변화의 순간마다 비슷한 저항이 있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 인권 운동 역시 초기에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긴 시간 끝에 사회는 조금씩 합의에 다가갔다. 내부의 긴장과 균열을 견뎌낸 자정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능력이 부재했다면 오늘의 사회는 지금과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상을 꿈꾼 사람들이 글을 쓰고, 목소리를 내고, 거리에 나서며 굳어 있던 통념을 흔들었다는 점이다. 말해질 수 있었기에 인식은 움직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오래된 질서도 다시 쓰일 수 있었다.

자유를 행사하는 일은 겉으로 보기엔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막상 그 자유를 현실에 옮기려 하면, 우리는 예상치 못했던 복잡한 벽을 만난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든다고 상상해보자. 만약 제작자가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백인이나 흑인 배우에게 이들의 역할을 맡긴다면, 관객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뛰어난 연기력을 지녔더라도, 역사와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인물에 대한 이질감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 "Why not?"이라는 구호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세상을 더 넓게 보고, 정해진 규범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펼치자는 낙관의 목소리였다. 이 관점에 선다면, 세종대왕을 백인 배우가 연기하는 일도 하나의 실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틀을 부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자는 시도. 하지만 이상은 언제나 현실의 무게와 충돌한다.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기억, 그리고 공동체의 정체성은 단순한 실험이 쉽게 가로지를 수 없는 강처럼 흐르고 있다.

역사는 단지 과거를 기록한 목록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함께 껴안고 있는 기억이고, 서로를 이해하는 비밀스런 언어다. 실존했던 인물의 서사를 다룰 때, 우리는 단순한 창작의 자유를 넘어선 책임을 함께 지게 된다. 뛰어난 예술적 상상력이라 하더라도, 기억을 훼손하는 일에는 쉽게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 관객의 신뢰는 사실과의 조화 위에서만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신뢰를 잃은 이야기에는 아무리 화려한 수사도 소용이 없다.

물론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조차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 어느 시대건 권력의 필요에 따라 과거는 편집되었고, 기록은 해석을 거쳐 만들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창작자가 자신만의 시선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시도는 정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도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만, 그것은 미래를 향한 의미 있는 질문이 된다.

상업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자신의 자본으로 제작하는 작품이라면, 창작자는 그만큼의 책임과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는 셈이다. 기록물과 창작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후자의 세계에서는 허구가 현실을 기반으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허락된다. 흥행 여부나 완성도는 그 다음 문제다. 실패 또한 하나의 결과일 뿐, 창작을 금지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공정성이라 부르는 감각도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어왔다. 어떤 기준은 과거에 정당성을 인정받았지만, 오늘날에는 편견으로 비판받는다. 규범을 다시 묻고 수정하려는 시도는 사회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작은 불편과 모욕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 않고, 그것을 되짚으려는 노력이야말로 더 넓은 공정성을 향한 길을 연다.

그러나 변화는 방향을 잘못 잡을 때, 오히려 중요한 것을 무너뜨릴 위험도 지닌다. 특히 과거를 다루는 일에서는 더욱 조심스러워야 한다. 역사는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숨은 토대다. 이 토대를 함부로 흔들 때, 우리는 미래를 향할 좌표를 잃을 수도 있다. 과거를 존중하는 일은 낡은 집착이 아니라, 긴 시간을 넘어 자신을 지키려는 가장 근본적인 노력이다.

문제는 사회 전체가 어디까지를 허용할 수 있는가 하는 데 있다. 무엇을 금지하고 무엇을 수용할 것인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절대적 정답은 없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입장들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공간 위에서만, 자유는 현실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드러낸다는 것은 무거운 일이다. 그 모든 부담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기존의 관습에 도전하는 선택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 가령 백인 인물을 소재로 한 서사에 흑인이나 아시아인 배우를 기용하는 것도, 단순한 연출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는 오랜 시간 굳어온 규범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도이자, 미래를 향한 작은 문을 여는 일일지 모른다. 이러한 시도는 그 자체로 고정된 인식의 틀을 깨뜨리고, 익숙한 역사적 서사를 낯선 시선으로 다시 바라볼 기회를 제공한다. 동시에 말과 행동이 진정한 힘을 가지는 순간은 단순히 허락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여파와 의미를 숙고하는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원작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수정하는 일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의 작품이 존재한다는 것은 특정 시대의 가치관과 철학이 응축된 결과물이라는 뜻이며, 작가의 고민은 텍스트 너머에서 흐르는 시대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 그렇기에 원작을 단순히 현재의 기준에 맞추어 바꾼다면, 작가가 품었던 문제의식을 오롯이 이해하지 못할 위험이 생긴다. 더 나아가, 당대의 사회적·역사적 맥락을 흐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한 시대의 이야기를 온전히 존중하고 그 위에 새로운 해석을 더하는 일은 섬세한 균형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작품이 지니고 있던 본질적 가치와 깊이를 잃어버리게 된다.

어떤 새로운 시도가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원작자의 의도와 역사적 진실성이다. 변화에 대한 열망이 아무리 뜨겁더라도, 그것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최종적인 판단은 관객이나 독자의 몫이다. 세상에 없던 독창적인 시도는 본래 낯설고 불편할 수밖에 없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에게 강요하는 것만으로도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찬성과 반대, 어느 쪽이든 결국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인식 수준에 따라 허용의 경계가 정해진다. 말과 행동의 자유를 둘러싼 논란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어떤 이야기를 허락하고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문제다. 새로운 시도가 불편함을 유발하더라도, 다양성과 포용성을 키우고 더 깊은 이해를 촉진한다면, 공동체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반대로 변화가 과도하게 인위적이고 억지스러워 보인다면, 자연스럽게 거부할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표현된 모든 말과 행동은 이미 실현된 현실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완성되어 고정된 형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인식과 해석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과거의 의미조차 현재의 관점에서 재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또 잃어버린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목소리를 내고 어떤 시도를 감행하든, 그것은 결코 최종적인 형태가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해석과 논의의 시작점일 뿐이다.

선을 넘을지 말지 고민하는 일은 늘 어렵다. 그 결과를 온전히 감당해야 할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는, 더 안전하게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현실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심각한 책임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작은 세계를. 놀이공원처럼, 박물관처럼, 규칙은 있지만 상상은 허락되는 그런 곳을.

코미디는 이 점에서 특별하다. 그 안에서는 규칙이 느슨해지고, 일상의 상식이 흔들린다. 인과를 거꾸로 돌리고, 세계를 거꾸로 뒤집는다. 무너지는 물리 법칙과,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농담들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는지를 비웃으며 보여준다. 그리고 웃음 사이로,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삶의 다른 얼굴을 보게 된다. 현실에서 감히 묻지 못한 질문을, 농담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 슬쩍 던져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모든 걸 무겁지 않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웃음도 결국 질문이다. 우리 사회는 어느 지점까지 이 질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어떤 표현이 허용되고, 어떤 표현은 멈추어야 하는가. 질문은 다시 우리를 사회의 규칙과 질서로 데려온다.

특정한 질서를 완벽하다고 믿고, 그것을 모두에게 강요하려는 순간, 자유는 급격히 숨막히는 형태로 변한다. 우리는 그걸 전체주의라 부른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길 요구하는 체제. 거기에는 놀라움도, 질문도, 개성도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도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무제한의 말들이 때로는 혐오를, 때로는 깊은 균열을 불러온다. 그래서 사회는 표현의 경계를 끊임없이 조정한다. 어떤 말은 허락되고, 어떤 말은 멈춰야 한다고. 이 경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시대가 변하면, 가치가 달라지면, 다시 그어야 하는 선이다. 조율이 없다면, 표현의 자유를 향한 갈등은 끊임없이 타오를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단순한 허락이나 금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약속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을 허락할 것인가.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이 약속 위에서, 창작은 자란다. 자유는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문제는 다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것인가. 미래를 바꾸고 싶은 사람이라면, 틀을 깨야 한다. 주어진 형식에 머물지 않고, 불완전하고 모순된 세계를 웃으며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은 엄숙한 리얼리티보다, 어쩌면 코미디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실패하고 넘어지면서도 웃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조금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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