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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가 문제라고? 진짜요?

반드시 그런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러한 것들에 대한 인상

by inome

어떤 날은 거리 전체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사람들은 무엇이 참인지 묻지 않았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 따져보는 이도 없었다. 방송은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쏟아냈다. 하지만 신문을 넘기던 손은 믿고 싶은 기사만 붙잡았고, 믿기 어려운 말들은 무심히 흘려보냈다. 질문이 사라졌고, 질문하지 않음으로 유지되는 평온이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진실은 언제나 그렇게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말끝에 숨어 있었고, 눈빛 사이로 빠져나갔으며, 침묵 속에서 모습을 감췄다. 거짓은 달랐다. 언제나 먼저 다가왔고, 눈을 맞추며 말을 걸었다. 친절했고 간결했으며, 무엇보다 위로처럼 들렸다. 진실과 거짓은 점점 닮아갔고, 같은 말투를 빌려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했다. 둘은 너무 닮았고, 지나고 나서야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하루가 끝날 무렵, 겨우 어렴풋이 그 흔적을 발견할 뿐이었다.

누군가는 오래된 기억을 덮기 위해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였다. 처음에는 방어였고, 그다음엔 설명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거의 기억처럼 되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지울 수 없는 진실을 등에 지고 걸었다. 진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걸 마주하는 일은 혼란스러워졌다. 온전한 것인지 부서진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각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진실을 받아들였다. 외면하거나, 조용히 품거나. 어느 쪽이 옳다고 쉽게 말하지 않았다. 말해지는 것들과 말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삶은 그럼에도 이어졌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진실을 조심스럽게 수집했고, 그 안에서 작은 의미 하나를 건지려 애썼다. 그러나 알고 싶었던 것들은 늘 손에 잡히기 직전에 흩어졌고, 선명한 말은 의심을 불러왔으며, 명확하지 않은 말은 불안을 남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부터 묻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필요한건 단서였다. 더 빠른 뉴스, 더 정밀한 해석, 더 분명한 증거. 진실을 향한 갈망은 정보에 대한 갈증으로 바뀌었고, 그 갈증은 기술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제 사람들은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 앞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말은 이제 목소리 대신 손가락에서 나왔고, 기억은 영상으로 저장되었으며, 감정은 이미지로 변형되었다. 한때는 오래 품고 돌보아야 했던 이야기들이 몇 초 만에 확산되었고, 누구나 타인의 진실 위를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세상은 더 가까워졌고, 삶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한때는 먼 길을 가야만 얻을 수 있었던 지식이 이제는 손끝 하나로 호출되었고, 감정의 형태를 흉내 내며 사람들 앞에 놓였다. 사람들은 그 작은 창을 들여다보며 서로를 해석했고, 그 속에서 세상을 다시 만들어갔다. 진실은 그 와중에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기록 버튼은 너무 쉽게 눌렸고,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 영상과 음성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누구나 스크린을 통해 수많은 장면을 보았지만, 그중 어떤 것이 진짜에 가까운지는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진실은 여전히 어딘가에 있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그 진실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했다. 빛은 있는데, 그 앞에 선 사람들의 눈이 어두워진 것처럼.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일상 속 작은 사건을 기록했고,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업로드 했다. 그것은 처음엔 용기였고, 자유였고, 연결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자주 편집되었고, 짧게 잘려 나갔으며, 정리된 단면만 남게 되었다. 말은 점점 더 쉽게 꺼내졌고, 그만큼 가벼워졌다.

영상은 목소리보다 먼저 도착했다. 녹음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고, 사진은 감정보다 빨리 공유되었다. 누군가는 화면을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손가락으로 무심히 다음 장면을 밀어냈다. 사실을 확인할 시간은 없었고, 때로는 그럴 의지도 없었다. ‘누가 먼저 보여줬느냐’가 ‘무엇이 맞느냐’보다 중요해진 세상. 그 안에서 진실은 점점 더 배경으로 밀려났다.

속도가 쌓일수록, 판단은 무뎌졌다. 생각은 줄었고, 의심은 피곤한 일이 되었다. 어떤 장면을 ‘봤다’는 것만으로 확신이 생겼고, 익숙한 말투와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쉽게 믿었다. 그 믿음은 때로는 틀렸고, 때로는 의도된 것이었다. 그럴수록 신뢰는 조용히 줄어들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느낌이 아닌 사실로 판단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을 제대로 알아보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오랜 시간 지켜봐야 하고, 의심도 해봐야 한다. 그 중 하나라도 빠지면, 우리가 믿는 건 사실이 아니라 익숙함일 뿐이다. 그래서 확신이란 것도, 자세히 보면 오래된 습관처럼 굳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정답을 빨리 찾는 게 아니라,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물어보는 태도.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기보다, 잠깐 멈춰 생각하는 일. 문장 하나를 다시 읽고, 장면 하나를 곱씹는 것. 그런 작은 멈춤들이 우리를 진실에 더 가까이 데려다준다. 하지만 지금, 질문은 자주 생략된다. 판단하기 전에 왜 그런지를 묻는 일이 줄어들었다. 피로하고, 귀찮고, 시간만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타인의 말투가 내 생각처럼 느껴졌고, 타인의 감정이 내 마음처럼 여겨졌다. 말은 넘쳐났지만, 듣는 일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정말 중요한 말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이제는 판단도 달라졌다. 정보의 내용보다는 영상의 색감이나 자막의 흐름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누가 말했느냐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말했느냐가 신뢰의 기준이 된다. 검토나 숙고보다 ‘내가 직접 찾았다’는 느낌이 더 중요해졌다. 그 믿음은 단단할 수 있지만, 꼭 진실에 닿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만큼 멀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듣고 싶은 말에 귀를 기울이고, 믿고 싶은 것을 고르는 일은 자연스럽다. 익숙한 생각에 기대는 건 그만큼 편하고 안전하다. 불편한 진실은 조용히 넘긴다. 마음 한켠에 걸리긴 해도, 그것이 전부다.

‘내가 직접 봤으니 괜찮다’는 말, 그 안에는 본 것처럼 느끼고 싶었던 마음이 숨어 있다. 스스로 확인했다는 확신은 오히려 판단을 더 굳게 만든다. 믿음이 먼저 생기고, 확인은 그 뒤를 따른다. 마음은 계속 선택하지만, 그 선택을 붙잡는 힘은 점점 흔들린다.

기술은 점점 더 정교해지는데, 우리는 오히려 현실을 느끼는 감각에서 멀어지고 있다. 검색창에 입력한 문장은 지금을 향해 있지만, 돌아오는 답은 어제의 생각을 다시 포장한 것일 때가 많다. 정리된 정보는 넘치지만, 그것만으로는 진실을 완전히 알 수 없다. 보기 좋게 다듬어진 사실들은 세상이 원래 가진 울퉁불퉁한 면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늘 뭔가를 고르고 있다고 느끼지만, 그 선택은 이미 누군가가 정해놓은 목록 안에서 이루어진다. 스스로 고른 것 같지만, 사실은 고르게 된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들은 이미 걸러지고 정리된 결과물이다. 그 바깥에는 아직 보지 못한 시선과, 아직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런데 지금 사라지고 있는 건 정보가 아니다. 오히려 넘쳐난다. 정말 사라지는 건, 낯선 것 앞에서 잠깐 멈추어 생각해보려는 마음이다.

이제 많은 판단이 기계에 맡겨지고 있다. 하지만 기계는 판단하지 않는다. 그냥 계산하고, 입력된 대로 반응할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중요한 일과 별일 아닌 일이 뒤섞이고, 진실과 거짓이 함께 떠돈다. 혼란은 정보가 많아서 생기는 게 아니다. 생각의 방향이 흐트러질 때 생긴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정보는 제자리를 찾기도 하고 길을 잃기도 한다.

작은 스마트폰 화면 안에는 현실보다 더 빠른 세상이 펼쳐진다. 누군가 손가락을 한 번 움직이면, 정보는 갑자기 튀어나왔다가 금세 사라진다. 그 뒤엔 또 한 줄의 제목이 따라오고, 자극적인 문장들이 이어진다. 내용은 비어 있는데, 화면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예전에는 사람이 먼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문장에 조심스럽게 담겼다. 말에는 책임이 따랐고, 그 책임은 시간이 지나며 신뢰로 쌓였다. 매체는 자신이 말한 내용을 오래 곱씹었고, 말은 쉽게 흘려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 정확함이 곧 신뢰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가 먼저 도착한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선택하기도 전에, 이미 다음 정보가 떠오른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부터 읽는다. 손끝의 반응을 기억하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다음 방향을 정한다. 그래서 이제는 제목 하나로 시선을 끌 수 있다면, 그 안의 내용은 비어 있어도 상관없어진다. 말보다 감정이 먼저 도착하고, 감정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인다.

세상이 변하면서, 언론도 달라졌다. 정확하게 보도하고 신중하게 말하던 태도는 점점 사라졌다. 대신 눈에 잘 띄는 말, 자극적인 표현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 말들은 곧 돈이 되었다. ‘낚시’라고 불리는 제목들이 생겨났고, 그런 제목은 하나의 전략이 되었으며, 그 전략은 기술처럼 반복됐다. 이제는 그게 특별한 일탈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일이 되었다. 감정을 자극해서 관심을 끌고, 그 관심을 수익으로 바꾸는 구조. ‘어그로’라 불리는 방식은 단순한 인터넷 장난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적 장치가 됐다. 누군가 고통을 겪는 순간, 누군가는 그 장면을 가장 먼저 제목으로 만든다. 클릭이 많을수록 가치가 올라가고, 그게 언론이 살아남는 방식이 된다.

요즘 우리는 수많은 사건을 빠르게 접하지만, 그 사건들이 왜 일어났는지, 어떤 맥락이 있었는지는 점점 보이지 않는다. 고통이 뉴스에 나와도, 그 고통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자극적인 장면이나 말만 남는다. 화가 나거나 슬퍼지는 감정은 온라인에 그대로 드러나고, 그런 감정은 상품처럼 소비된다. 진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감정을 끌어내는 정보만 점점 많아진다.

사람들은 점점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찾게 되고, 알고리즘은 그것을 기억해 다음에도 비슷한 걸 보여준다. 감정은 데이터가 되고, 그 데이터는 또 다른 감정을 유도한다. 이 흐름 속에서 진짜 필요한 정보는 점점 멀어진다. 사람들은 스스로 정보를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이 먼저 선택을 이끈다. 정보는 그 감정을 따라 흘러가고, 판단은 더욱 흐릿해진다. 그렇게 감정에 끌려가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점점 피곤해지고 무력해진다.

요즘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보고 듣는다. 화면은 점점 선명해지고, 글과 영상도 더 정교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정보들 안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다. 정확하게 뭐가 사라졌는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뭔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건 뉴스 한 줄, 댓글 하나, 사람의 표정 사이에서 잠깐 느껴졌다가 곧 사라진다. 분명히 어딘가 이상한데, 다들 그걸 정확히 말하진 않는다. 우리는 그 빈자리를 느끼면서도, 여전히 시간에 떠밀리듯 살아간다.

어떤 말들은 처음부터 애매하다. 진짜인지, 거짓인지 분명하지 않다. 어떤 말은 사실처럼 들리지만, 알고 보면 말한 사람의 생각이 많이 섞여 있다. 사람은 세상을 자기 방식대로 본다. 그 시선이 곧 말이 되고, 말은 현실을 설명하는 도구가 된다. 그래서 같은 사건도, 누구의 말로 설명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문장을 읽고, 말들을 듣지만, 그 안에 진짜가 담겨 있는지 확신하긴 어렵다. 어쩌면 누군가가 보여주고 싶은 일부만 고른 걸지도 모른다.

가짜뉴스는 그 틈에서 태어난다. 완전히 틀린 말이라기보다, 뭔가 빠진 맥락이거나 일부러 강조된 조각일 때가 많다. 그러니까 단순한 거짓이라기 보단, ‘믿고 싶은 방식으로 짜인 이야기’에 더 가깝다. 문제는 그게 너무 진짜처럼 들린다는 데 있다. 단정적인 말투, 익숙한 문장, 이미 감정이 나뉘어진 분위기. 사람들은 말의 내용보다, 누가 말했는지, 어떤 표정으로 말했는지, 분위기가 어떤지를 먼저 읽는다.

그래서 더 중요해진 건, 이 말이 ‘사실’인지, ‘해석’인지, 아니면 그냥 ‘감정’인지 구분하는 일이다. 이 기준이 흐려지는 순간, 말은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감정을 자극하는 도구가 된다.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사실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 사이에 사건은 왜곡되고, 맥락은 지워지고, 말은 껍데기만 남는다.

말은 넘쳐나는데, 점점 말해지지 않는 기현상. 이건 단순히 ‘말하지 말라’는 억압 때문이 아니다. 지금은 ‘무엇이 말해질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의미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요즘의 말은 누가 말했느냐보다, 얼마나 반응을 끌어내느냐가 중요해졌다. 파장을 만들면 ‘좋은 말’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말은 전달보다는 반응을 위해 조율된다.

도대체 누구의 책임일까? 지금의 변화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알고리즘, 끝없이 바뀌는 피드, 짧은 시간 안에 판단을 내려야 하는 속도 같은 구조적인 흐름이 우리를 끌고 간다. 우리는 길고 복잡한 설명보다, 단정적인 짧은 말에 더 쉽게 끌린다. 많은 사람이 공유한 말은 그 자체로 진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정보는 점점 감정의 흐름에 휩쓸린다.

하지만 감정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진실이 있다. 어떤 진실은 금방 말할 수 없고, 오랫동안 생각해야만 그 의미가 드러난다. 그래서 멈춰서 물어야 한다. 이 말은 어디서 온 걸까? 나는 왜 이 말을 믿었을까? 정말 그렇게 생각한 게 맞을까? 이런 질문 없이 지나치면, 진실은 쉽게 사라진다. 진실은 보통 시간이 필요한 쪽에 있다. 너무 서두르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가짜뉴스는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거짓과 함께 살아왔다. 누군가는 의도적으로 속였고, 누군가는 진실을 말하려 했지만 그 말은 종종 왜곡되었다. 완전히 투명한 전달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말이 사람을 거치는 순간, 해석이 붙고 시선이 얹히며 맥락이 덧입혀진다. 진실은 그 사이에서 조금씩 빗나간다.

거짓이 문제였던 건 아니다. 문제는 거짓이 진실처럼 흘러 다니고, 의심조차 없이 받아들여지는 일이었다. 많이 본 말, 많이 공유된 말이 어느새 '진실처럼' 여겨지는 세상. 그 안에서 우리는 생각할 시간을 잃어버렸다. 짧은 순간에 판단하고, 더 짧은 순간에 잊어버리는 일에 익숙해졌다. 마음에 오래 남지 않는 말들만 쌓였고,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만나지 않고, 함께하지 않는 삶 속에서 기억해야 할 이유도 서서히 사라졌다.

그렇게 우리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고립된 방 안에 갇혔다. 감정은 쉽게 끓어오르고 금세 식어버렸다. 분노도, 슬픔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정보는 감정의 흐름을 따라 소비되고, 진실마저 그 속도를 강요받았다. 하지만 어떤 진실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금방 드러나지 않고, 빠르게 닿을 수도 없는 것들. 감정의 속도로는 끝내 만나지 못하는 진실이 있다는 걸, 우리는 자꾸 잊는다.

가짜뉴스 생산자나 소비자가 진실에 대해 무관심할 때 만들어진다. 누군가는 이익을 위해 거짓을 짓고, 누군가는 생각 없이 그 거짓을 받아들인다. 한쪽은 속이려는 의지로, 다른 한쪽은 질문을 멈춘 태도로 진실을 밀어낸다. 그렇게 번진 말들은 순식간에 세상을 덮고, 우리는 무엇이 사실인지 묻는 일조차 피곤해진다.

언제나 어떤 시간에서도 진실은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생각하고, 느끼고, 다시 생각한 끝에 겨우 손끝에 닿을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확신이 아니라, 여백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아도, 말과 말 사이의 침묵 속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담길 수 있다. 아직 닿지 못한 마음들,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시 묻게 된다. 지금 말해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정작, 말해지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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