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반복해서 들었던 말들이 있다. 도둑질하지 마라,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 어른을 공경하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성실하라는 말들. 누군가의 목소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말들은, 내가 세계를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내 안에 있었다. 마치 길을 걷기 전부터 발밑에 놓인 지도처럼.
그 단순한 문장들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 누군가와 부딪히기 전, 그 말들이 먼저 떠오르곤 했다. 사람 사이의 일은 복잡하지만, 그 복잡함 앞에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오히려 그런 단순함이었다. 우리는 그 말들로 선과 악을 구분했고, 옳고 그름의 감각을 익혔다. 이야기 속 교훈은 전통이 되었고, 전통은 다시 낡은 말들로 돌아왔다. 세상이 변할수록, 그 오래된 말들은 도리어 또렷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단순한 말들이 가진 한계도 서서히 드러났다.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졌고, 누군가를 ‘옳고 그름’으로 단정 짓기 어려운 상황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그때마다 마음 한편에서는 오래된 가르침이 불편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도둑질하지 마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생존의 문제, ‘거짓말하지 마라’는 교훈이 감추는 모호한 진실, ‘성실하라’는 당부가 때로는 부당한 희생을 요구하는 현실. 그때야 비로소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르게 보였다.
우리가 지키는 어떤 기준도 결국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누군가의 판단이 반복되고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다수의 생각이 되고 사회적 합의로 자리 잡는다. 살인이나 폭력, 도둑질처럼 해로운 행위도 그렇게 규제되어 왔을 가능성이 크다. 징벌이 합의를 지키는 역할을 해왔고, 덕분에 우리는 ‘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해 보다 분명한 인식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세상은 ‘하지 말라’는 말로 질서를 만든다. 그 말들은 분명하고, 어기면 벌을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말에 익숙해진다. 반대로, ‘해야 한다’는 말은 늘 애매하다.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들린다.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는 말, 배려하고 친절해야 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지키지 않아도 벌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런 말들을 선택의 문제로 여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처럼.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가 선한 행동을 했을 때 박수를 보낸다. 그 안에는 우리 마음속의 바람이 숨어 있다.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 누군가는 그렇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기대, 그리고 내가 그러지 못했다는 작은 미안함. 그래서 우리는 그 마음을 박수로 대신 전한다. 벌은 아니지만, 응원은 남는다. 그러나 응원은 약하다. 선한 행동이 모두의 약속이 되지 않으면, 쉽게 무시되고 잊힌다.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이유로, 책임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 행동을 가볍게 넘긴다.
‘해야 한다’는 말은 질서 너머의 온기를 만든다. 법과 규범은 우리가 따라야 할 기준을 제시해 현재를 유지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공동체는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은 정해진 틀이 아니라, 사려 깊은 선택들이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마음, 조금 더 오래 바라보려는 시선, 그 마음을 말로, 행동으로 표현하려는 노력. 그런 선택들이 모여 삶을 만든다. 세상을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게 하는 건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있다.
지켜야 옳고 그름의 선은 분명하지만, 마음과 마음 사이를 잇는 다리는 흐릿한 법이다. 감정은 늘 법보다 오래되었고, 정의보다 깊다. 우리는 법으로 규정하지 못한 수많은 마음을 안고 살아간다. 어떤 마음은 법을 넘고, 어떤 상처는 정의를 피한다. 그래서 때로는, 벌보다 이해가 필요하고, 재판보다 이야기가 필요하다.
규범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어떤 규범이 공정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을 마주하는 이의 환경과 처지에 따라 억울함은 생긴다. 강한 자의 도덕은 약자에게는 불공정으로, 다수의 정의는 소수에게는 억압이 되기도 한다. 세상은 흔히 개인의 맥락을 지워버리고, 우리는 그 지워진 자리에 멈춰 선다. 설명하기 힘든 감정은 대개 그럴 때 시작된다.
그 단순한 말들은 여전히 선하고 유효하지만, 어쩌면 완전하지 않다. 아무리 오래된 문장이라도, 반복된다고 해서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릴 적 주입되었던 말이 나를 구성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곧 나의 생각은 아니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의 말 속에 살고 있지만, 그 말로부터 벗어나야 할 때가 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누구였는지를 다시 묻게 된다.
어떤 사람이 시장 어귀의 오래된 빵집에서 빵 하나를 훔쳤다. 특별한 건 아니었다. 유리창에는 삐뚤빼뚤한 손 글씨로 ‘오늘의 빵’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고, 고양이 한 마리가 계산기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그 가게 앞을 서성이다가, 문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빵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것뿐이었다.
그가 빵을 훔쳤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다. 그건 사건이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한 걸까. 누군가는 그를 도둑이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그가 얼마나 배고팠을지 떠올린다. 같은 장면 앞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드는 걸까. 아마도 판단이 아니라, 질문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법은 명확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법은 행위만을 다룬다. 그렇지만 사람은 사정 속에 살아간다. 그는 가게 앞에서 머뭇거렸고, 가게는 비어 있었고, 배가 고팠다. 그는 말이 없었다. 침묵 안에는 여러 갈래의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묻지 않는다. 대부분은, 묻지 않는다. 사건 중심인 세상에서 사람은 언제나 그 다음이다. 빵을 훔쳤다는 사실 하나로, 그는 규정된다. 딱 거기까지만. 그 전과 그 후는 지워진다. 하지만 삶은 행위 이전에 있었고, 이후에도 계속된다. 우리가 정말로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를 둘러싼 수많은 말들 가운데, 어쩌면 진짜 중요한 것은 그가 끝내 하지 않은 말일지 모른다. 그는 무엇을 말하지 않았을까. 어떤 감정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어떤 순간들을 말없이 견뎠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좀처럼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가 왜 침묵했는지를 묻기보다는, 이미 드러난 사실에 매달리고, 손에 잡히는 사건에 집중한다. 그렇게 우리는 판단에 몰두하느라 이해의 기회를 놓친다.
법은 언제나 존재하고, 기준도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정의라는 이름도 늘 제자리를 지킨다. 하지만 누구에게는 하루가 너무 길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그 하루조차 감당할 여유가 없다. 같은 하루가 사람마다 전혀 다르게 지나간다. 그 시간의 질감, 감정의 온도, 선택의 무게는 숫자나 조항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법이 끝내 다루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빵 하나를 들고 서 있었던 단 몇 초의 시간. 그 짧은 침묵 속에서 그가 겪어야 했던 내적 갈등, 그리고 이어진 선택이 갖는 무게. 우리는 흔히 그것을 지나치지만, 사실 그 상상력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능력이다. 누군가의 행위를 판단하는 대신, 그 행위가 일어나기까지의 시간을 들여다보려는 시도. 그것이 우리를 조금 더 복잡하고, 조금 더 정직한 이해로 데려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본질적인 능력을 가장 먼저 외면하는 것도 우리 자신이다.
하지만 어떤 선택은 침묵이 아니라 격렬한 감정으로 드러난다. 상실의 순간은 사람을 이해가 아닌 응징으로, 기다림이 아닌 행동으로 이끌기도 한다. 감정은 때로 정의를 부르며 폭발하고, 사람은 그 안에서 스스로를 밀어붙인다. 그런 순간,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감정은 어디까지 받아들여져야 할까. 정의는 그 감정을 어디까지 품을 수 있을까. 피해자는 언제나 선한가, 복수는 언제나 악한가. 누군가를 이해하려 했던 마음이, 어느새 누군가를 심판하려는 태도로 바뀌는 순간. 그 경계는 멀지 않고, 그 안에는 설명되지 않은 삶이 있다.
어쩌면, 법정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그 경계 위에 있다. 누군가 어떤 상실을 겪었는지, 어떤 침묵을 견뎠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품은 감정이 우리 안의 어떤 감정을 건드릴 때, 우리는 법이라는 이름보다 먼저 연민을 떠올린다. 그 연민 속에는 정의가 아닌 삶의 조각들이 있다. 법을 지키는 일과 사람을 이해하는 일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흔들리는 이유일 것이다.
한 아이가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를 죽인 사람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아이는 칼을 들었다. 아이는 법정에 섰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보았다. 법정 한 구석에서 아주 작은 아이가 서 있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법’과는 조금 다른 것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의 복수를 이해하려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 속에는 정의를 떠올리기도 했을 것이다. 복수를 넘어선 감정,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흐름을 넘어서 법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연민과 불안이었다.
법은 거기까지 가지 않는다. 사연보다 사실을 보고, 울음보다 진술서를 본다. 그리고 그 정직한 거리 두기 덕분에 세상은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반드시 선을 그어야 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선을 아무 의심 없이 수긍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그리고 사회는 시대와 환경, 문화 속에서 변화한다. 실제로 과거에는 명예살인이나 보복살인이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던 때도 있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법’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오래된 이름이었다. 가족, 부족, 신. 어떤 이름이 붙었든 간에, 규범은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고, 그 기준은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법이 무엇이든, 그것은 인간이 정교하게 만든 발명품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래된 감정들—분노, 슬픔, 연민—을 다룰 수 없는 무딘 도구다. 정교하면서도 무딘. 그것이 법의 본질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도구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겨두는 것이다. 이유를 묻는 일. 사정을 헤아리는 일. 그리고 말을 잃은 사람들 곁에 조용히 머무는 일.
빵을 훔친 사람에게, 혹은 누군가를 잃고 누군가를 해친 사람에게, 법은 차가운 형량으로 응답할 것이다. 그게 법의 역할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도 여전히 사람으로 남고 싶다면, 그때는 법이 아닌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정당화도, 변호도 아닌, 단지 ‘이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들. 우리는 아직 그런 말들을 잘 쓰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그 말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말해야 할 것 같다.
왜 우리는 냉정한 그 법을 끝끝내 지키려고 할까? 법을 지키려 하는 까닭은, 그 법이 완전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우리를 지탱해줄 마지막 구조물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상실이나 분노, 굶주림과 절망 앞에서 우리는 너무 자주 무력해지고, 그 무력함을 덮기 위해 ‘질서’라는 이름의 테두리를 붙잡는다. 그래야 마음이 덜 흔들린다. 그래야 혼란 속에서 나라도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도둑질이나 상해 같은 범죄는 피해를 정확히 측정하거나 동일하게 보상하기가 어렵다. 누군가가 물건을 훔쳤을 때 동일한 물건을 반환하거나 동일한 가치로 보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상해의 경우에도, 같은 수준의 폭력을 되돌리는 것이 적절한 해결책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과잉 대응으로 새로운 피해가 발생하거나 심지어 사망 사건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피의 복수'는 본래의 피해를 복구하기보다는 새로운 갈등과 채무 관계를 생성할 뿐이며, 진정한 정의 실현에는 한계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복수를 개인의 판단에 맡기지 않고 국가에 위임하고 있다. 법률에 따라 범죄를 심판하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처벌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려 한다. 이는 개인의 감정적 대응을 억제함으로써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장치다. 그렇다고 해서 옳고 그름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과 경험, 그리고 도덕적 가치관이 다르고 여전히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이러한 다원적 관점은 옳음이 갖는 보편성이 얼마나 허술한가를 보여줄 뿐이다.
아이를 위해서 우리는 여러 질문들이 제기할 수 있다.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 살인범의 평온한 삶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아이의 마음속에는 많은 혼란과 억울함이 있을 것이다. "왜 살인자의 형량은 가벼운가?" "왜 국가는 범죄에 상응하는 응당한 보복을 실행하지 않았을까?" "왜 피해자는 억울하게 살아가야만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피해자와 그 가족의 고통을 외면한 채, 가해자가 평안히 살아가는 상황에 대한 깊은 분노와 실망을 나타낸다. 결국 아이는 '복수'라는 감정으로 그 상황을 해결하려 할 수 있다.
이 질문들은 아이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같은 방식으로의 복수가 허용될 수 없다는 도덕적 기준도 이 사회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의 감정, 죄책감, 분노에 대한 공감은 단순하지 않다. 아이가 엄마를 잃은 슬픔과 억울함이 보상받지 않았다고 느낄 때 아이는 살인범에 대한 복수의 정당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이 허락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날 명분을 얻게 된다는 뻔한 결론에 도달한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불충분하다는 주관적인 느낌에 따라, '자기 정의'를 실현할것이고 그것은 정의의 실현이 될 것이다. 결국 복수는 본질적으로 고통의 연쇄를 끊지 못하고, 오히려 또 다른 고통을 낳기 시작한다.
한 사람이 느낀 상실과 분노가 또 다른 사람의 상실과 분노로 이어질 때, 우리는 어디까지 그 감정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결국 사회는 개인의 감정에 따라 정의가 흔들리는 공간이 되고, 공적인 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정의는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공정한 기준이어야 하지, 누구의 분노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복수의 유혹은 언제나 조심스럽게 경계되어야 하고, 그 감정은 마땅히 헤아려야 하되, 제도 바깥의 폭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다.
물론 복수를 통해 정의가 회복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 어떤 이들은 폭력의 악순환을 멈추고, 공정한 절차 안에서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감정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다룰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결국 지켜야 할 것은 감정보다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다. 법과 제도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 불완전함조차 제도의 틀 안에서 논의하고 수정해 나가야 한다. 아이의 분노와 상실은 외면되어서는 안 되며, 그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 감정의 유혹에 끌려가 폭력이 반복되는 사회인가, 아니면 고통을 딛고도 질서를 지켜내는 사회인가. 이 질문은 아이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옳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불변의 진리라기보다, 그 시절과 그 순간, 우리가 선택한 생활양식에 가깝다. 사람과 사회가 처한 환경, 경험, 가치관에 따라 ‘옳음’은 계속 달라지고 움직인다. 그래서 같은 사건 앞에서도 해석과 판단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복수에 대한 욕망도, 법과 제도가 만들어내는 정의도 모두 그 안에서 작동하는 삶의 방식이다. 감정과 제도가 충돌할 때, 우리는 어느 쪽이 더 ‘옳다’고 단정 짓기보다, 다름을 통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