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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Mar 18. 2025


성공

성공. 우리는 그 빛나는 고도를 향해 손을 뻗으며, 그 위에 반짝이는 것들을 좇았다. 돈이든, 권력이든, 혹은 누군가의 시기와 부러움이든, 그것은 반드시 눈에 띄어야 한다고 믿었다. 누군가가 손가락질할 만큼, 분명히 드러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빛은 정말로 우리가 바라던 전부일까? 그곳에 다다르면 끝일까, 아니면 그 빛 속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일까?

어떤 이는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번쩍이는 조명 속에서 실체를 찾는다. 그들은 그곳에서 존재를 증명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또 다른 이는 조용한 방 안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차 한 잔의 온기 속에서 스며드는 소소한 기쁨 속에서 성공을 찾는다. 그에게 성공은 외부의 시선과는 아무 상관없다. 그가 찾는 것은 누군가의 인정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삶은 단단해 보인다. 그들의 이름은 자주 불리고, 그들의 선택은 세상을 바꾸며, 자신이라는 존재의 흔적을 남긴다. 세상은 그들의 흔적을 뒤쫓고, 삶을 기념하려 한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누구도 자신의 위치를 혼자서 확인할 수 없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관계 속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공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한다.

그들의 발자취는 결코 온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남긴 것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앗아갔는지, 그 누구도 쉽게 알지 못한다. 때론 권력의 정점에서조차 문득 빈자리를 느낄 수도 있다. 모든 것을 가졌으나, 여전히 허기가 느껴질 만큼 고통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삶은 화려하더라도, 그 안의 공허함은 쉽게 채워지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성공을 단순히 남들의 시선에 맞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어쩌면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은 단순히 높은 곳에 오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성공은 끝없이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에서 비롯된 허망한 믿음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 발 한 발, 천천히 무언가를 찾는다.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만의 시간으로.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되돌아보며 계속해서 나아간다. 마치 엉킨 실타래를 풀듯, 혹은 퍼즐 조각을 맞추듯, 무엇을 지나치고 있는지, 무엇을 붙잡고 있을지를 계속해서 생각한다.

나는 또 다시 성공의 의미를 묻게 된다. 끝없이 달려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인가.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것과, 발밑의 흙을 느끼며 멈춰 서는 것, 그 두 가지는 정말로 다른 것일까. 어쩌면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아니 그런 의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길이 내가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강요한 것인지에서 판가름이 나는 일이지 않을까?

어떤 성공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지켜낸 순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조용한 시간, 오랜 노력 끝에 얻어낸 작은 성취, 외롭고 지친 밤을 견디고 맞이한 아침. 그것도 성공일 수 있다. 그것을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그것이 스스로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면. 그 순간 성공은 결국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는 일이다. 그것이 부이든, 명예이든, 사랑이든. 스스로 선택한 방향으로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것. 목표를 이루었을 때 느끼는 충만함만큼이나, 그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흔들리고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서는 것.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돌아봤을 때, 자신이 걸어온 길을 후회 없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성공일지도 모른다.

성공은 하나의 길로만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때때로 화려하고, 때때로 소박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타인의 기대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와 명예, 사랑과 안정, 권력과 자유. 무엇을 쫓든,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될 때에만 성공은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문득 뒤를 돌아볼 수 있으면 된다. 어떤 순간에도, 어떤 모습으로든, 자신이 지나온 길을 후회 없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일 것이다.

1982년 2월 18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테아트로 콜론. 그 거대한 오페라 극장은 고요함을 흡수한 채,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한 그 깊은 침묵 속에서, 목소리가 다시 어둠을 헤치고 나왔다. 그 목소리는 한때 세상에 가로막혔던, 숨겨져 있던, 그러나 결코 꺼지지 않았던 불꽃처럼 터져 나왔다.

투쿠만의 먼지 묻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 소녀는, 노래하는 일이 자신을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자라온 환경은 꿈을 펼칠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철도 근로자로, 매우 가부장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다. 딸이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다. 그 시대, 여성의 역할은 집안에서 가정적인 삶을 살며 가족을 돌보는 것이었고, 소녀의 꿈은 그 틀 안에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꿈을 꾸는 것조차 죄처럼 느끼게 만들었고, 그에 대한 갈등은 마음속에서 깊은 상처로 남았다.

어머니는 그녀의 꿈을 지지했지만, 아버지의 강압적 태도에 의해 늘 갈등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위로 속에서 꿈을 이어가지만, 아버지의 반대와 불안을 함께 짊어지고 있었다. 그 갈등은 그녀가 세상과 싸우는 과정의 시작이었고, 음악은 그 싸움에서 유일한 도피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는 한동안 노래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음악을 통해 돈을 벌 수 없었던 시기, 소녀는 가정부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경제적 궁핍에 처해 있었고, 그 시절의 고통은 그녀의 음악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녀는  가정부로서의 일과 예술가로서의 꿈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살아갔다. 가정부로 일하며 생계를 이었지만, 그 안에서 그녀는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예술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소녀는 결국 코르도바의 남미 포크음악 페스티벌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아르헨티나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군사 독재의 어둠 속에서, 예술과 음악은 체제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메르세데스는 저항의 아이콘으로서, 군부의 억압 속에서도 음악을 통해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려 했다.

그녀의 노래는 아르헨티나 사회의 고통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그녀 자신도 계속해서 상처를 받았다. 군부는 그녀의 음악을 위협적으로 보고 억압했으며, 그녀는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생사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싸움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그녀에게는 그 목소리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더 많았다.

소녀의 삶은 단 한 순간도 순탄치 않았다. 어린시절도 어른이 되었을 무렵도 그랬다. 결혼생활도 다르지 않았다. 첫 번째 결혼은 예술적 경로와 개인적인 삶을 맞추려는 시도의 결과였으나, 갈등이 깊어지면서 결국 이혼을 맞이했다. 두 번째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혼으로 끝났다.

그녀의 삶은 상처로 채워졌다. 삶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고, 예술과 사랑, 갈망과 상실의 끊임없는 싸움이었다. 사랑의 갈망은 항상 그녀를 움직였지만, 그 사랑은 자주 그녀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사랑을 찾는 것과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 사이에서, 그녀는 끝없이 상처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노래는 계속해서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다. 그녀는 죽음과 공포의 시절 속에서 그 누구보다 강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그 싸움이 언제나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성공 뒤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게 해주었지만, 그녀 자신은 여전히 과거의 아픔을 잊지 못했다.

1982년, 군사 독재의 어둠이 걷힌 후, 그녀는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무대에 섰다. 그러나 그 무대에서, 그녀는 자신이 과거에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으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노래 속에는 실패와 성공, 승리와 좌절을 넘어서, 깊은 갈망이 담겨 있었다. 삶의 무게가 짓누를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 무게를 견디기 위한 내면의 힘이 되어 주었다. 그녀는 단순히 노래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지속했던 존재였다.

그녀의 노래는 그녀가 죽은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사라진 그녀의 이름은 여전히 그 목소리 속에 살아 있었고, 그 목소리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다른 이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목소리," 그녀의 유산은 단순히 과거의 기억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정신이 되었다. 메르세데스 소사, 그녀는 성공을 넘어서, 사람들에게 갈망과 희망을 심어준 존재였다. 그 갈망은 단지 그녀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었다.

메르세데스 소사는 스스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할까? 무대 위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그녀의 목소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그녀의 이름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하지만 그녀는 늘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겼다. 음악이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었지만, 그 음악도 결국 자신이 겪은 고통을 이겨내는 유일한 도피처일 뿐이었다. 사랑을 찾으려 했지만, 그 사랑은 늘 고통을 동반했고, 결국 그것이 그녀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그녀를 성공한 여인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녀는 그 성공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든 적이 없다고 믿었다. 세상은 그녀를 높이 평가했지만, 그 높이의 끝에서 느꼈던 것은 끝없는 공허함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그녀에게 진정한 성공이란, 아마도 자신이 고통 없이, 갈등 없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평화를 찾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자신의 삶을 밀고 나간다. 경쟁은 공기처럼 스며 있고, 사회는 멈추지 않고 속도를 요구한다. 그러나 끝없이 달리는 사이, 우리는 가끔 멈춰 서서 묻는다. 이 길이 어디를 향하는가. 누구를 위해 달려가는가. 그러다 보면 알게 된다.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 태어나는 순간부터 기회는 다르게 주어진다. 부는 대물림되고, 교육은 신분을 결정한다. 어떤 문은 열려 있고, 어떤 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노력하지 않았다고, 더 애쓰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떤 노력은 그저 벽 앞에서 흩어지는 바람일 뿐이다.

결핍. 그것은 인간이 지닌 그림자다. 누구나 내면에 숨겨 둔 어두운 틈, 채워지지 않는 부분. 그 틈은 절대 잠잠하지 않다. 고요 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이고, 갈망을 일으킨다. 우리는 그 갈망에 이끌려, 점차 그 틈을 메우기 위해 서로를 덮친다. 마치 물속에서 달려드는 상어떼처럼. 타인을 짓누르고, 부수며, 때로는 상처를 남긴다. 생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마치 숨을 쉴 수 없을 때처럼 싸운다. 실패는 내면의 벽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쌓인 죄책감과 불안이 뿌리를 내린다. 결국, 그 불안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씨앗이 된다. 무기력은 흐릿한 안개처럼 퍼져나가고, 희망은 서서히 녹아내린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싶어진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가며, 존재 자체를 잃어버린다.

우리는 바람에 실린 씨앗처럼, 날아가는 중이다. 어딘가에 도달할 것인가, 아니면 바람에 휘둘려 흩어질 것인가. 순응하는 것이 항상 틀린 것도 옳은 것도 아니다. 그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어디인지, 그 바람이 불고 있는 방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를 어디로 이끌려는지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 바람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끝까지 붙잡아라. 결국 우리는 다시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우리는 나약하다. 때로는 뿌리가 흔들리고, 힘이 부족하다. 그러나 생은 결코 고독한 여정이 아니다. 우리의 고요도, 폭풍도, 모두 다른 바람과 함께 엮여 흐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면의 어두운 구름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그것을 뚫고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폭풍 속에서도 언제나 함께 비바람을 헤치고 나아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회는 결국 찾아온다.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침묵 속에서 인내하고, 고통 속에서 도전해야 한다. 고립과 억압의 벽을 넘어설 때, 우리는 자신을 굳게 지켜야 한다. 세상을 마주할 때,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단호한 마음으로, 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가진 힘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간을 견디고 기다려야 한다. 언젠가 우리가 꿈꾸던 삶이 현실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결국 하나로 모여, 거대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때,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관계. 우리는 그 물결 속에서 떠내려간다. 매일, 어떻게 보일지 모르는 수면을 가로지르며, 때로는 끝없이 가라앉을 것 같은 깊은 곳에 빠져들기도 한다. 타인의 시선은 무겁고, 그 안에서 우리는 자주 숨을 쉬기 어렵다. 마음은 바람에 실려 날아가듯, 가볍게 젖고, 그 후엔 금세 마른다. 어제의 상처가 오늘의 침묵으로 이어지고, 그 침묵은 점점 더 깊은 고요를 만들어간다. 희망은 때로는 흐르는 강물처럼 잠시 떠오르다가, 또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나 강물이 말라버린다고 해서 강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희망이 사라졌다고 해서 삶이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지만, 그 흐름은 더디고, 물살은 더욱 조용히 밀려온다.

억압은 바람처럼 지나간다. 소리 없이 스며들고,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불평등은 흐르는 물처럼, 마치 자연의 법칙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모든 틈을 채운다. 복종은 녹슬지 않는 기계처럼, 점차 몸에 배어간다. 강한 자는 바위처럼 더 굳어지고, 약한 자는 물결처럼 점점 더 흩어져 간다. 결국, 그 불균형은 세상의 리듬이 된다. 우리는 그 리듬에 맞춰, 불안정한 균형을 맞추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균형이 곧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생은 언제나 방향을 선택하는 여정이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지 않을 것인가, 어디까지 받아들일 것인가, 언제 그만둘 것인가. 그러나 그 모든 질문보다 중요한 하나가 있다. 우리는 무엇을 바꿀 것인가. 억압을 자연스러운 바람으로 여기지 않는 것, 불평등을 단지 개인의 고통이 아닌, 깊은 뿌리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 된다. 그리고 그 작은 깨짐이 때로는 세상을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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