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왜 너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걸까

by inome

우리는 가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마음에 사로잡힌다. 누군가 일부러 지워버린 것도 아니고, 세상이 갑자기 등을 돌린 것도 아닌데, 어쩐지 조금씩 멀어져 간다. 거리의 소음은 그대로인데, 그 소리들이 나를 지나쳐버리는 것 같다. 마치 짙은 안개 속에 가려진 흐릿한 풍경처럼, 존재의 윤곽이 서서히 번져간다. 오래된 레코드판 위에서 바늘이 미세하게 튀는 순간처럼, 사소한 틈들이 반복되면 결국 전체가 어긋나 버린다. ‘있음’과 ‘없음’ 사이 어딘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리.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왠지 그 자리가 자신의 몫처럼 느껴진다.

왜일까, 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드는 걸까. 이유를 찾아 헤매다 보면, 결국 우리가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름이나 자리는 물론, 기억과 관계까지도 ‘내 것’이어야만 ‘나’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무엇인가를 잡으려 할수록 놓치는 것이 더 많다. 삶은 마치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쥐었던 모든 것이 서서히 사라진다.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그저 허무한 공허뿐이다. 그 공허 속에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자각이 서서히 퍼져나간다.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것은 결국 포기와 다르지 않다. 포기라는 말은 실패나 좌절을 뜻한다. 어떤 목표나 기대했던 무언가를 더 이상 붙잡지 않고, 그만두는 상태. 그 손을 놓아버린 순간, 우리는 스스로에게 ‘나는 이걸 가질 자격이 없다’고 인정하는 셈이 된다. 부끄럽거나 아픈 일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무너진 현실 앞에서 더는 버티지 못하는, 솔직한 인간의 고백이다.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인가를 가져야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가진다는 것과 닿아 있다. 우리는 자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무언가를 움켜쥐려한다. 손을 뻗고, 붙잡고, 그것이 놓칠 수 없는 권리인 양 행동한다. 땅이든, 시간이든, 기억이든, 혹은 관계든. 이 ‘가짐’이 없으면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그렇게 소유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우리 삶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무게는 때때로 우리를 지치게 하고, 아무것도 아닌 자리에 서게 만든다.

역사를 돌아보면, 소유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개인의 권리가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고, 강물과 숲은 그저 자연의 한 자락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 자연 속에서 ‘내 것’을 주장하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혔다. 농사를 시작하면서 모든 게 변했다. 땅을 나누고, 경계를 긋고, 씨를 뿌리고 울타리를 친 이에게 ‘주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내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힘과 권력이 되었다. 소유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권리라는 자리를 차지해갔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땅을 바라볼 때, 그 너머에 자신을 투영했다. 존재의 증명이 되었고, 때로는 숨 쉬기조차 버거운 짐이 되었다.

소유가 권리가 되는 순간, 가지지 못한 이들은 보이지 않는 경계 밖으로 밀려난다. ‘가짐’은 언제부턴가 울타리가 되었고, 그 울타리는 또 다른 경계를 만들어 냈다. 더 많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때로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생겨난 이 보이지 않는 선은 단순한 구분을 넘어 삶의 기회를 갈라놓고, 말의 무게를 달리하며, 사람의 존엄마저 저울질한다. 겉으로는 같은 하늘 아래 살아도, 가진 것의 차이는 그들을 서로 다른 세상에 놓이게 한다. 사회의 위치는 물론이고, 허락된 영역까지도 달라져버린다.

더 많이, 더 빨리 갖기 위한 경쟁이 일상이 되었다. 무엇인가를 남보다 먼저 손에 넣는 일이 능력의 증거로 여겨지고, 비교는 삶의 습관이 되었다. 이제는 ‘무엇을’보다 ‘언제’ 가졌는가가 더 중요해졌으며, 속도가 가치를 앞지르고, 효율은 감정을 밀어냈다. 어느 새 가격이 가치를 대신하고, 손에 쥔 양이 마음의 크기를 대신한다. 순간을 음미하기보다는 다음 것을 준비하는 일이 먼저다. 지금 이 자리에 머무는 일조차 불안하게 느껴진다. 이익이 되지 않는 기억은 쉽게 버려지고, 사람 사이의 온도는 점점 낮아진다.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그 권리를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소유는 타인의 동의와 신뢰를 의미한다. 어떤 물건이나 시간, 공간을 ‘내 것’이라 말하려면, 그것을 지켜줄 질서와 승인, 사회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타인의 동의 없이 성립되는 소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부산물이다.

자연은 약속하지 않는다. 나무는 물을 향해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동물은 먹이를 위해 서로의 영역을 넘나든다. 누구도 먼저 양보하지 않으며,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자기 몫을 향해 나아간다. 여기에 있는 규칙이 있다면, 그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지나간 일을 기억하고, 함께 뜻을 모아 다음을 정한다. 약속을 만들고, 그 약속을 지키는 일을 삶의 방식으로 삼아왔다.

공동체는 바로 이 약속 위에 세워졌다. 약속은 단순한 말의 교환이 아니라, 서로를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고 각자의 삶을 존중하겠다는 책임 있는 행동이다. 누군가의 것을 빼앗지 않겠다는 다짐과, 가진 것을 지킬 수 있도록 해달라는 호소는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선의만으로는 부족했다. 넘지 말아야 할선이 정해졌고, 이를 기반으로 법이 생겨났다. 이 법은 단순한 제약이 아니라 신뢰를 유지하고 소유를 보호하기 위한 질서이며, 공동체를 지탱하는 구조가 되었다.

서로를 해치지 않기 위한 약속은 신뢰와 질서로 이어졌고, 그 질서는 법이라는 형태로 정착했다. 법은 자유를 억누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구조였다. 신뢰는 제도 속에 자리 잡았고, 제도는 질서를 형성하며 관계를 이어주는 기반이 되었다. 그 틀이 무너지면 균형도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다. 경계는 배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설정되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고, 이름을 얻으며, 역할을 감당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렇게 관계는 형성되었고, 권리와 책임은 상호 간에 나누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공동체 내부에서의 권리와 책임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함께 짊어져야 할 규범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물리적 대상뿐 아니라 추상적 개념도 소유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땅과 사물에 더해 창의적 사고, 숙련된 기술, 고유한 언어 표현과 이름까지 개인의 소유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쌓아온 경험과 학습, 관계 속에서 형성된 신뢰, 주어진 시간과 집중의 성과까지 특정한 주체의 자산으로 여겨졌다.

무형의 자산은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 권력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이제 소유에 따른 권리와 책임은 개인 차원을 넘어서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역학 관계로 변모했다. 새로운 형태의 소유를 보호하기 위한 경계는 더 넓은 범위를 아우르도록 재구성되었고, 그 안에서 각 주체는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소유가 확대될수록 필연적으로 질문도 함께 늘어났다. 정당한 권리는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어떤 기준에 따라, 누구의 인정을 받아야 정당화되는가.

현실에서 권리는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특정 집단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자원을 독점했으며, 다른 이들은 제도 바깥으로 밀려나 기본적인 권리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불균형은 사회 전반에 선명한 경계를 그었고, 각자는 자신이 경계 안에 있는지 바깥에 있는지를 반복적으로 확인해야 했다. 권력은 경계를 넓히는 동시에 내부 질서를 더욱 강화하며 불평등을 고착시켰다.

사회적 위치는 시각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한 작용을 한다. 어떤 이는 그 앞에서 멈추고, 어떤 이는 아무런 제약 없이 더 멀리 나아간다. 심지어 사고방식이나 감정 표현, 사용하는 말투까지도 그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사회적 위계가 고정되면 사고의 흐름조차 쉽게 바뀌기 어려워진다. 삶의 전개는 생각보다 앞서가고, 방향은 예측하기 어렵다.

따라서 물음이 생긴다. 이 경계는 정당한가. 누구는 왜 가로막히고, 누구는 왜 쉽게 지나가는가. 소유의 간극은 왜 좁혀지지 않는가. 이 간극에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익숙하게 받아들여온 ‘자유’라는 단어에 다시 시선이 머문다. 보편적으로 열려 있다고 믿었던 자유는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너무나 쉽게 제한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이 따라붙는다. 현재의 삶은 과연 선택의 결과인가, 아니면 애초부터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인가.

자유를 바라지 않는 이는 없다. 그것은 누군가의 허락이나 눈치를 의식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질문은 개별적 욕망이 아닌, 사회 구조 전체를 향하게 된다. 현재의 자유는 어떤 방식으로 보장되고 있으며, 그 자유가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주어지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생존은 손의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 건네는 과정에서 삶은 이어졌다. 이 행위는 특별한 사고 없이 반복되었고, 마치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오늘날 같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도 노동에 대한 평가는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노동의 가치가 균등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제 숨길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노동 가치의 불균형 현상 뒤에는 ‘소유’라는 개념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예전에는 노동이 땅을 일구거나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지금은 언어, 감정, 정보, 취향 같은 무형의 요소들이 노동에 포함된다. 사람들은 이런 비물질적 결과물을 통해 사회적 위치를 확보하고, 그 위치를 유지하는 데 집중한다. 노동은 생계를 위한 활동이라기보다는, 배제되지 않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일로 바뀌고 있다.

산업화 시기의 노동자는 하루 대부분을 공장에서 보내야 했다. 그들이 만든 생산물은 다른 이들의 수익이 되었고, 그들은 시간과 체력을 교환했을 뿐이었다. 이 상황은 누군가의 이기심이나 윤리 결핍에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당시 사회의 구조가 그런 방향으로 짜였기 때문이다. 누구의 노동이 길었는가보다, 누가 수익의 흐름을 설계했는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지금은 자산이 사람의 위치를 정한다. 위치는 경계가 되고, 그 경계는 다시 시선과 판단을 바꾼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어떤 이들은 그 하루를 통해 여유를 확보하고, 어떤 이들은 생존에 겨우 닿는다. 구조가 만들어 놓은 자리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생각조차도 그 자리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먼저 삶이 주어지고, 그 삶에 맞는 해석이 뒤따른다. 이 역순은 구조의 단단함을 보여주는 증거다.

기업은 이제 감정까지 노동의 일부로 간주한다. SNS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일상을 공유하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업의 이익에 기여한다. 개개인의 감정과 표현이 자산처럼 처리되고, 그것이 다시 수익 구조에 편입된다. 이 과정은 노동과 보상의 관계를 흐리게 만든다.

놀라운 변화다. 과거 자본은 토지와 같은 유형 자산을 바탕으로 움직였다. 지금은 금융이 중심이 되었고,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노력을 들여도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어떤 이들은 일자리를 구해도 수입이 부족하고, 어떤 이들은 움직이지 않아도 이익이 생긴다. 노동의 가치는 일정하지 않으며, 그 차이는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시간을 내어 생활을 유지한다. 하지만 전부를 쏟아도 하루치 생활이 안 되는 사람도 있고,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많은 자원을 얻는 사람도 있다. 이는 개인의 선택이나 능력보다 더 깊은 원인에서 비롯된다. 자산의 격차가 이미 삶의 무게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기준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어떤 것을 ‘내 것’이라 부를 수 있을 때, 불확실성은 줄고 규칙은 명확해진다. 그러나 그 규칙 안에서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시작점이 없는 이들은 계속해서 밀려난다. 결국,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을 담보로 내세워 하루를 쓰고, 다음 하루를 구한다.

익숙한 구조는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면, 변화가 있어도 감지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무감각은 구조의 지속에 기여한다. 그래도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누가 가장 먼저 하루를 시작했고, 누가 가장 많은 이익을 얻는가. 노동은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전부가 투입되는 일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무게에 눌리고, 다른 누군가는 그 무게를 딛고 올라선다.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선택의 가능성이 하나밖에 없을 때, 그것은 선택이라 부르기 어렵다. 결정이 아니라 반응에 가까운 상황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라는 단어는 이 조건을 가려버리고, 책임은 개인의 몫이 된다.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조차 스스로 결정했다고 여기게 되는 이 구조는, 자산 중심의 세계 인식과 결합하면서 더 단단해진다.

선택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가진 가장 직접적인 자원, 즉 몸을 통해 생존을 꾀하게 된다. 교육도 자본도 사회적 연결망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남는 건 오직 자기 신체뿐이다. 몸은 가장 손쉬운 노동 수단이자, 사회가 마지막까지 요구하는 자산처럼 작동한다. 이때 몸은 생계를 위한 거래의 대상이 되고, 경쟁의 기준이 되며, 때로는 상품이 되곤 한다. 그 누구도 스스로를 팔고 싶어 시작하진 않았지만, 다른 가능성이 없을 때 몸은 점차 시장의 언어로 호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몸마저도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갖는다. 인간에게 있어 몸은 감각과 의식, 정체성의 기반이며, 사회적 관계의 출발점이다. 실제로 불법적이긴 하지만 대리모 계약을 통해 여성의 자궁이 임대되고, 신체를 자산처럼 장기 밀매를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성매매도 그 영역이다. 그 뿐만 아니라 스포츠와 같은 합법적 계약에서도 몸은 평가 대상이자 계약의 항목이 된다.

현실에서는 이미 우리의 몸이 다양한 방식으로 숫자로 계산되고 있다. 노동은 시급으로 환산되고, 보험료는 건강 상태에 따라 다르게 매겨지며, 얼굴이나 몸매는 알고리즘에 의해 점수를 받는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은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는 말은 점점 공허한 구호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법은 여전히 중요한 기준을 지키고 있다. 법에서 ‘물건’이라 부르는 것은 사람이 만질 수 있고, 움직이거나 관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 전기, 식물, 그리고 많은 경우 동물도 이에 포함된다. 즉, 법은 감정이나 의식을 가진 존재가 아닌, 비인격적인 대상을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당연히 인간과 그 신체는 이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인격을 가진 존재로, 소유하거나 처분할 수 없는 존재라는 개념은 법의 기본 정신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우리는 그동안 이를 잊고 있었을 뿐, 인간은 결코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결코 어떤 경우라도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물론 물질 중심의 논리 위에서는 사람을 소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주장할 수 있다. 인간의 신체도 물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노동력과 신체 조건은 시장에서 거래 가능한 자원으로 여겨지며, 이를 통해 생겨나는 가치가 곧 인간을 자원의 일종으로 취급하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소유의 범주로 설명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만에 하나 누군가 자신의 몸을 판매한다고 하더라도 정말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다. 몸을 판매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닌, 판매된 물건처럼 취급받게 된다. 신체의 소유권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면, 신체의 주체가 본래의 '자기'를 잃는 셈이다. 판매된 몸은 더 이상 그 사람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으며, 그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는 판매자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결정된다. 즉, 자신이 누구인지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의 손에 의해 지배받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신체의 거래가 이루어지면, '나'라는 존재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물리적인 존재로서의 몸은 타인의 손에 놓이게 되고, 그러한 변화는 단순히 소유권의 문제를 넘어서는, 존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사람은 자신을 팔지 않으며, 타인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것은 결국 인간으로서의 자아와 존엄을 잃는 길로 이어진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소유의 의미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몸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곧 ‘나 자신’이다. 내가 나를 소유한다고 말하는 순간, 나를 나의 바깥에 두게 되고, 스스로를 분리된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대상이 아니다. 목적이며, 삶 그 자체다.

인간은 자율성을 갖췄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 누구의 소유도 – 자신의 몸조차도- 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자유는 가능해진다. 이 전제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인정하는 사회의 최소한의 윤리이며, 법과 제도의 토대다. 그러나 오늘날 이 원칙은 점차 흔들리고 있다.

사회는 이미 감정과 시간이 계약의 대상이 되고, 몸은 수치로 환산되는 현실에 있다. 인간은 점차 거래 가능한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과거 노예제가 인간에게 값을 매겼다면, 오늘날은 감정노동, 알고리즘에 의한 외모 평가 등을 통해 점진적으로 다시 수단으로 소비된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이 위협받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삶은 자주 중심을 잃고, 자유는 방향을 잃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개인의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생존의 압박 속에서 대안 없는 선택을 한 이들에게조차 자율적 결정이라 말한다. 그러나 선택지가 차단된 환경에서의 결정은 결코 온전한 자율이라 보기 어렵다. 진정한 자율성을 보장하려면 현실적인 대안과 충분한 정보 접근이 전제돼야 한다. 그러니 기회의 공정을 원한다는 착각이 지향해야하는 가치라고 믿는 이유일 것이다.

처음엔 누구도 자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걸 모른다.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필요한 말만 주고받으며, 쌓아야 할 숫자들을 관리하고, 잠드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사람은 무사하다는 착각 속에 머문다. 하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기 시작할 때쯤엔 이미 너무 늦은 경우가 많다. 손에 쥔 것들은 분명 늘어났는데, 나라는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있다.

문제는 단지 제도가 삐걱거린다는 데 있지 않다. 이 사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효율과 생산성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을 판단하고 분류한 결과다. 쓸모없는 말은 잘려나가고, 돌봄과 기다림은 시간 낭비로 여겨진다. 그런 구조 안에서 밀려난 이들은 어느새 가벼운 존재로 취급된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라져도 되는 사람. 누구도 찾지 않고, 누구도 묻지 않는 상태. 그것이 지금 많은 이들이 겪는 무중력의 감각이다.

무언가를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결핍은 개인의 탓이 된다. 더 노력했어야지, 더 잘 선택했어야지. 하지만 이건 누군가의 과도한 축적이 만든 그림자의 결과다. 누군가가 공간을 독점할 때, 다른 이들의 자리는 자연스레 줄어든다. 그러니 사라짐은 선택이 아니라 결과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삶의 바깥에서 다른 방향을 모색한다. 덜어내고, 물러서며, 중심에 서지 않는 삶을 택한다. 그들은 말한다. 존재는 소유가 아니라고. 인간의 무게는 성과로 환산되지 않으며, 하루를 견디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그렇게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자신을 단련하고, 누구의 기준에도 들지 않는 방식으로 묵묵히 하루를 채워간다.

인간은 결국 사라지지만, 남는 건 함께 보낸 시간, 주고받은 눈빛, 말 없는 곁의 무게다. 진정한 풍요는 쌓는 데서 오지 않는다. 덜어내도 무너지지 않는 마음, 비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관계,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가치다. 이 구조는 사람의 선택이 만든 것이며, 동시에 그 구조가 사람을 다시 만든다. 우리가 지금 외면하는 것은 단지 타인의 실패가 아니다. 그건 우리 모두의 미래이기도 하다.

“왜 너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걸까.” 그 질문은 너를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물음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저기 누군가의 일이 아니라, 이 구조 안에서 조금만 비틀리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가장자리다. 그러니 이제 방향을 묻자. 더 빠른 경쟁이 아니라 더 깊은 이해로, 더 높은 성취가 아니라 더 많은 존재의 존중으로. 그래야 우리는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keyword
이전 16화성공이라는 말이 견딜 수 없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