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성공이라는 말이 견딜 수 없을 때

by inome

성공이라는 말은 늘 묵직했다. 때로 그것은 돈이었고, 권력이었으며, 누군가의 시선 안에 감춰진 질투였다. 드러나야만 가치가 있다고, 눈부셔야만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세상이 부러워할 때, 그제야 성공이라 여겼다. 그렇게 누구보다 빠르게, 더 높이 오르려 했다. 하지만 손끝은 자꾸 허공을 더듬었고, 결국 쥐고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 이상 올라설 곳이 없는 자리에서, 누군가는 고개를 들어 다시 빛을 찾았지만, 발밑에는 이미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찬란해 보였던 그 빛은 어쩌면 자신을 삼키는 어둠의 입구였는지도 모른다. 눈부신 성공 속에서 고립은 깊어졌고, 그 무게는 조용히 삶을 휘청이게 했다. 끝이라고 믿었던 곳은 단지 또 다른 시작이었고, 빛이라 여긴 그것은 오래전부터 내면에서 깜빡이던 경고등이었다.

성공한 삶은 단단해 보인다. 이름은 자주 회자되고, 그들의 선택은 세상의 방향을 바꾸며, 흔적을 남긴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는 우리는, 더욱 분명하게 성공처럼 보인다. 하하지만 남긴 것만큼 잃은 것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꼭대기에서도 공허를 느끼고, 어떤 이는 모든 걸 이룬 후에도 설명되지 않는 허기를 마주한다. 겉은 화려해도, 안은 텅 비어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환호 속에서 자신을 증명한다. 조명 아래에서만 존재를 확인하고, 그 증명이 외부로 향할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런 성공은 끊임없이 드러나야 유지된다. 반면, 또 다른 이에게 성공은 조용한 방 안의 온기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시선과 무관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일. 일상 속에서 작은 기쁨을 발견하고, 그 기쁨을 오래 품는 것. 드러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한 것.

성공을 타인의 시선에 기대어 정의한다면, 우리는 그저 위치를 확인하는 일에만 골몰하게 된다. 그렇게 오르기만을 좇는 삶은 종종 자기 자신을 놓치게 만든다. 하지만 누군가는 천천히, 제 속도로 걸어간다. 무엇을 놓쳤는지, 무엇을 잃었는지를 되짚으며. 엉킨 실타래를 푸는 마음으로,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삶을 다시 바라본다.

성공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끝없이 달려야만 하는 걸까. 아니면 주어진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한 걸까.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것과, 발밑의 흙을 느끼며 멈춰 서는 것, 그 두 가지는 정말로 다른 것일까. 어쩌면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아니 그런 의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길이 내가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강요한 것인지 판가름이 나는 일이지 않을까?

분명 어떤 성공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지켜낸 순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조용한 시간, 오랜 노력 끝에 얻어낸 작은 성취, 외롭고 지친 밤을 견디고 맞이한 아침. 그것도 성공일 수 있다. 그것을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그것이 스스로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면. 그 순간 성공은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는 일이다.

부든, 명예이든, 사랑이든. 스스로 선택한 방향으로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것. 목표를 이루었을 때 느끼는 충만함만큼이나, 그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흔들리고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서는 것.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돌아봤을 때, 자신이 걸어온 길을 후회 없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성공일지도 모른다.

성공은 하나의 형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는 화려하고, 때로는 소박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타인의 기대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쫓든,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될 때에만 성공은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문득 뒤를 돌아볼 수 있으면 된다. 어떤 순간에도, 어떤 모습으로든, 자신이 지나온 길을 후회 없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의 완성이 아닐까.

1982년 2월 18일, 부에노스아이레스. 테아트로 콜론의 대리석 기둥과 붉은 벨벳의 장막 아래,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가라앉아 있었다. 숨을 참는 관객들의 심장 소리마저, 오래된 목재 바닥 밑으로 흘러내려갔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한 음절이 터졌다.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 불에 그슬린 편지처럼, 살아남은 혼잣말처럼, 세상을 향한 긴 침묵 끝의 대답이었다.

투쿠만의 먼지 쌓인 마을, 이름 없는 거리에서 한 소녀가 태어났다. 그녀에게 노래는 단순한 재능이 아니었다. 견디기 위한 것이었고, 살아 있기 위한 유일한 이유였다. 그러나 그녀가 자라난 땅은 꿈을 허락하지 않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철도 노동자였고, 말보다 침묵이 많은 사람이었다. 가부장적인 그의 세계 안에서, 딸이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시절, 여성이란 집 안을 돌보는 존재였고, 무대란 남자들만의 것이었다. 그녀의 갈망은 그 질서에 반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죄책감 속에서 노래를 품어야 했다.

그녀는 늘 아버지의 반대와 불안을 등에 지고 살아야 했다. 꿈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기적에 가까웠지만, 그 꿈은 언제나 불안과 죄책감이라는 그림자와 함께 움직였다. 그녀가 세상과 싸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그리고 음악은, 그 싸움 속에서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성년이 된 메르세데스는 한동안 노래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음악을 통해 돈을 벌 수 없었던 시기, 가정부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경제적 궁핍에 처해 있었고, 그 시절의 고통은 그녀의 음악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녀는 가난한 현실과 예술가로서의 꿈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살아갔다. 가정부로 일하며 생계를 이었지만, 그 안에서 그녀는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예술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그녀가 가수로서 성공을 거둔 건 코르도바의 남미 포크음악 페스티벌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아르헨티나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군사 독재의 어둠 속에서, 예술과 음악은 체제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메르세데스는 저항의 아이콘으로서, 군부의 억압 속에서도 음악을 통해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려 했다.

그녀의 노래는 아르헨티나 사회의 고통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그녀 자신도 계속해서 상처를 받았다. 군부는 그녀의 음악을 위협적으로 보고 억압했으며, 그녀는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생사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싸움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그녀에게는 그 목소리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더 많았다.

삶은 단 한 순간도 순탄치 않았다. 어린시절도 어른이 되었을 무렵도 그랬다. 결혼생활도 다르지 않았다. 첫 번째 결혼은 예술적 경로와 개인적인 삶을 맞추려는 시도의 결과였으나, 갈등이 깊어지면서 이혼을 맞이했다. 두 번째 결혼도 마찬가지로 이혼으로 끝났다.

그녀의 삶은 상처로 채워졌다. 삶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고, 예술과 사랑, 갈망과 상실의 끊임없는 싸움이었다. 사랑의 갈망은 항상 그녀를 움직였지만, 그 사랑은 자주 그녀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사랑을 찾는 것과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 사이에서, 그녀는 끝없이 상처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노래는 계속해서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다. 그녀는 죽음과 공포의 시절 속에서 그 누구보다 강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그 싸움이 언제나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성공 뒤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게 해주었지만, 그녀 자신은 여전히 과거의 아픔을 잊지 못했다.

1982년, 군사 독재의 어둠이 걷힌 후, 그녀는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무대에 섰다. 그러나 그 무대에서, 그녀는 자신이 과거에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으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노래 속에는 실패와 성공, 승리와 좌절을 넘어서, 깊은 갈망이 담겨 있었다. 삶의 무게가 짓누를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 무게를 견디기 위한 내면의 힘이 되어 주었다. 그녀는 단순히 노래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지속했던 존재였다.

그녀의 노래는 그녀가 죽은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사라진 그녀의 이름은 여전히 그 목소리 속에 살아 있었고, 그 목소리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다른 이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목소리," 그녀의 유산은 단순히 과거의 기억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정신이 되었다. 메르세데스 소사, 그녀는 성공을 넘어서, 사람들에게 갈망과 희망을 심어준 존재였다. 그 갈망은 단지 그녀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었다.

메르세데스 소사는 스스로를 성공한 사람이라 여겼을까. 그녀의 목소리는 무대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이름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은 늘 외로움과 고통으로 흔들렸다. 음악은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었지만, 동시에 현실의 아픔을 견디기 위한 유일한 피난처이기도 했다. 사랑을 원했지만, 그 사랑은 늘 상처를 남겼고, 그로 인해 마음은 더 깊은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

세상은 그녀를 높이 평가했지만, 정작 그녀가 느낀 건 고요한 무대 뒤에 찾아오는 공허함이었다. 외부의 찬사보다, 그녀가 진심으로 바랐던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의 평화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에게 진짜 성공이란,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도 스스로를 잃지 않고 고통을 견뎌낸 삶, 그 안에서 잠시라도 편안함을 찾는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자신의 삶을 밀고 나간다. 경쟁은 공기처럼, 사회는 멈추지 않고 속도를 요구한다. 그러나 끝없이 달리는 사이, 우리는 가끔 멈춰 서서 묻는다. 이 길이 어디를 향하는가. 누구를 위해 달려가는가. 그러다 보면 알게 된다.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 태어나는 순간부터 기회는 다르게 주어진다. 부는 대물림되고, 교육은 신분을 결정한다. 어떤 문은 열려 있고, 어떤 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노력하지 않았다고, 더 애쓰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떤 노력은 그저 벽 앞에서 흩어지는 바람일 뿐이다.

결핍. 그것은 인간이 지닌 그림자다. 누구나 내면에 숨겨 둔 어두운 틈, 채워지지 않는 부분. 그 틈은 절대 잠잠하지 않다. 고요 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이고, 갈망을 일으킨다. 우리는 그 갈망에 이끌려, 점차 그 틈을 메우기 위해 서로를 덮친다. 마치 물속에서 달려드는 상어떼처럼. 타인을 짓누르고, 부수며, 때로는 상처를 남긴다. 생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마치 숨을 쉴 수 없을 때처럼 싸운다. 실패는 내면의 벽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쌓인 죄책감과 불안이 뿌리를 내린다. 그 불안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씨앗이 된다. 무기력은 흐릿한 안개처럼 퍼져나가고, 희망은 서서히 녹아내린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싶어진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가며, 존재 자체를 잃어버린다.

우리는 바람에 실린 씨앗처럼, 날아가는 중이다. 어딘가에 도달할 것인가, 아니면 바람에 휘둘려 흩어질 것인가. 순응하는 것이 항상 틀린 것도 옳은 것도 아니다. 그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어디인지, 그 바람이 불고 있는 방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를 어디로 이끌려는지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 바람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끝까지 붙잡아라. 결국 우리는 다시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우리는 나약하다. 때로는 뿌리가 흔들리고, 힘이 부족하다. 그러나 생은 결코 고독한 여정이 아니다. 우리의 고요도, 폭풍도, 모두 다른 바람과 함께 엮여 흐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면의 어두운 구름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그것을 뚫고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폭풍 속에서도 언제나 함께 비바람을 헤치고 나아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침묵 속에서 인내하고, 고통 속에서 도전해야 한다. 고립과 억압의 벽을 넘어설 때, 우리는 자신을 굳게 지켜야 한다. 세상을 마주할 때,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단호한 마음으로, 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가진 힘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간을 견디고 기다려야 한다. 언젠가 우리가 꿈꾸던 삶이 현실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하나로 모여, 거대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때,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관계. 우리는 그 물결 속에서 떠내려간다. 매일, 어떻게 보일지 모르는 수면을 가로지르며, 때로는 끝없이 가라앉을 것 같은 깊은 곳에 빠져들기도 한다. 타인의 시선은 무겁고, 그 안에서 우리는 자주 숨을 쉬기 어렵다. 마음은 바람에 실려 날아가듯, 가볍게 젖고, 그 후엔 금세 마른다. 어제의 상처가 오늘의 침묵으로 이어지고, 그 침묵은 점점 더 깊은 고요를 만들어간다. 희망은 때로는 흐르는 강물처럼 잠시 떠오르다가, 또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나 강물이 말라버린다고 해서 강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희망이 사라졌다고 해서 삶이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지만, 그 흐름은 더디고, 물살은 더욱 조용히 밀려온다.

억압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익숙함을 가장한 채 어느 순간 기준이 되어 사람들의 판단을 이끈다. 불평등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책임처럼 보이도록 설계되어, 문제의 구조는 감춰진다. 복종은 외부의 강제를 넘어 반복되는 행위 속에 정착하고, 점차 의문은 사라진다. 질문하지 않거나, 질문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이 구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된 질서처럼 받아들여진다. 말하지 않는 쪽이 덜 위험하고, 움직이지 않는 쪽이 더 안전하다는 판단 아래, 사람들은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킨다. 균형처럼 보이는 이 상태는 실은 침묵과 체념 위에 놓여 있다. 역할은 고정되고, 거리감은 유지된다.

그렇다고 삶이 이 질서를 따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기준이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지 되묻는 일이 남는다. 무엇을 멈출지, 어디까지 받아들일지, 또 무엇을 다시 설정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게 된다. 억압을 구조의 결과로 보고, 불평등을 개인의 실패로 환원하지 않는 태도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그것은 선택 이전의 인식이다.

성공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정해진 방향을 따라가는 대신, 그 방향이 왜 당연해졌는지를 되묻는 일. 앞서가야 한다는 요구 앞에서 멈춰 서 보는 일. 물론 그런 선택은 때로 실패처럼 보일 수 있고, 실제로 손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기준이 낡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감지하는 사람들, 다른 식의 판단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때, 구조는 아주 조금씩 다른 쪽으로 움직인다. 변화는 언제나 소수의 불편함에서 시작된다. 그러니 이 또한 성공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단, 그것이 성공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낭만적 희망보다는 현실적인 용기를 더 많이 요구하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keyword
이전 15화절망이 찾아왔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