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작고 까만 강아지를 기른 적이 있었다. 처음 데려온 날, 손바닥만 한 몸이 낯선 구석을 두리번거렸고, 나는 그걸 가만히 따라다니곤 했다. 털은 보드랍고 눈은 말똥말똥했다. 자꾸 꼬리를 흔들어댔는데, 얼마 후 그게 좋다고 말하는 방식이란 걸 곧 알게 됐다. 어느새 나는 녀석을 품에 안는 걸 좋아했다. 따뜻한 숨결이 팔에 닿으면 내 심장도 덩달아 느릿해졌다. 지켜준다는 기분, 그 애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루가 즐거웠다.
하지만 그런 날들이 오래가진 않았다. 어느 날, 그 애는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사고였다.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작은 몸은 이미 식어 있었고, 숨결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부르면 대답할 줄 알았고, 안으면 다시 꼬리를 흔들어줄 거라 믿었다. 어떤 말에도, 어떤 움직임에도 그 애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마음이 무너진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았다. 눈물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냥 모든 게 멈춘 것 같았다. 소리도, 시간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도.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고, 무슨 행동도 의미 없었다. 아프기보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감각.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는 순간 나는 무기력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사랑하는 존재를 잃는다. 불시에 찾아오는 것 같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진 일이다. 익숙하던 하루가 그대로 반복되고, 하늘은 어제와 다름없이 맑거나 흐릴 뿐, 세상은 조금도 흔들림 없다. 그럼에도 상실은 낯설고, 이상하고, 어쩐지 믿기 어려운 환상처럼 다가온다. 예상하거나 준비할 수도 없이. 그래서 더욱 믿기 어려운 일이 된다.
시작이 있는 모든 것은 끝이 있다고, 삶은 단 한 번도 그 순서를 바꾸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서일까. 뒤늦게 서야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짧은 틈 사이 무엇을 놓쳤는지 묻게 된다. 설명이라도 덧붙여야 이 고통에 윤곽이 생길 것 같아서. 하지만 어떤 이별은 시간이 흘러도 이해되지 않고, 어떤 빈자리는 끝내 익숙해지지 않는다. 말은 계속해서 쌓이지만, 정작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이 이별이다.
모든 감정을 붙잡을 필요는 없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야 비로소 사라지는 마음이 있다. 살다 보면 그런 감정들이 찾아온다. 이름 붙이기도 전에 울컥 올라오고, 이유를 묻기도 전에 사라지는 마음들. 그럴 땐 괜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말로 꺼내는 순간 더 깊어지는 감정이 있고, 자꾸 만지면 아물지 않는 마음도 있다. 가만히 두면, 언젠가는 가라앉는다. 마치 바다 밑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돌처럼.
우리는 늘 이유를 찾고, 이름을 붙이고, 감정을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어떤 감정은 설명하려는 순간 무너진다. 알 수 없어도 껴안아야 하는 날들이 있다. 불안을 안고 걷고, 설명할 수 없는 상실 앞에 조용히 멈춰 서야 하는 날들. 그런 순간들이 모여 삶이 된다.
사람은 울고, 멈추고, 다시 걷는 반복 안에서 회복된다. 이해가 아닌 수용으로, 해석이 아닌 시간으로. 꼭 알아야만 지나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떤 감정은, 그냥 흘려보낼 줄 알 때 비로소 지나간다.
상실을 겪은 사람들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문득 마음이 아직 제자리에 닿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새로운 걸 시작하는 게 조심스러워지는 이유도 거기 있다. 기대를 품고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 두렵기 때문이다. 감정은 여전히 흔들리는데, 그 흔들림이 또 다른 상처로 이어질까 봐, 마음이 먼저 스스로를 멈춰 세운다. 그걸 아마 이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다치지 않기 위해, 무뎌지기를 선택한 것이다.
고통을 반복해 겪어야만 그 무게를 감당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억누르기보다는, 그 감정이 이끄는 방향으로 잠시 따라가는 일이 오히려 마음을 덜 어지럽힌다. 시간은 흐른다. 마음이 저항 없이 가라앉고, 흩어졌던 감정들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 온다. 그때서야 우리는 다시 누군가와 마주 앉을 수 있다. 말보다 눈빛이, 설명보다 존재가 위로가 되는 시간. 함께 걷고 가만히 머무는 시간이 더 많은 걸 전한다. 그제야 알게 된다. 침묵이 얼마나 따뜻한지를.
삶은 설명되지 않은 채 반복되는 일이 있고, 말이 닿지 않는 순간도 있다. 억지로 해석하려 애쓰기보다, 이해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쪽이 삶에 더 가까워진다. 돌아보면 자주 이해에 집착했고, 함께 걸어야 할 순간에도 통제를 앞세웠다. 그 선택은 비겁함이었고, 때론 외면이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지나온 삶의 일부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함께 멈추는 건 아니다. 다 끝났다고 여긴 감정이 되살아나고, 사라졌다고 믿었던 마음이 불쑥 돌아온다. 그렇게 보면 삶은 직선이 아니라 순환이다. 마치 길가의 민들레처럼, 시작도 끝도 말할 수 없는 것. 시선 밖에서 피어나고, 흩날리는 씨앗이 반복되듯. 사라진 자리 위에 마음은 늘 새로운 시작을 데려온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고, 소멸은 수많은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시작은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 민들레가 흙을 뚫고 올라오는 순간일 수도, 바람에 실려 떠나는 씨앗일 수도, 누군가 무심히 던진 시선일 수도 있다. 정의할 수 없다면, 시작은 언제나 진행 중이다. 시작이라는 말 안에는 이미 흐름이 있고, 흐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랑은 끝을 모르기 때문에 시작되는 게 아니다. 끝이 있음을 알면서도 마음을 여는 일이기에 더 단단하다. 이별의 예감은 늘 사랑의 중심에 있다. 그 모순을 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있다.
슬픔이 두려워 멈춘다면, 어떤 감정도 받아들일 수 없다. 상실은 반드시 온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과 다를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을 붙드는 용기. 불안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슬픔을 건너 다시 웃는 일. 감정은 그렇게 이어지고, 삶은 계속된다. 끝을 품은 시작, 다시 시작되는 끝. 사랑은 그 반복 속에서 깊어진다.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겠지만, 그것들은 고리처럼 이어진다.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 수 없고, 어디로 향할지도 모른다. 같아 보이지만 매번 다르고, 반복 속에서 조금씩 달라진다. 꽃이 피고 지고 다시 피듯, 그 안에는 말없는 질서가 흐른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늙는다. 매일 조금씩 낡고, 줄어들고, 무너진다.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늙는다는 말이 사라짐을 뜻하진 않는다. 변화는 소멸이면서도 축적이다. 하루의 끝에 또 다른 하루가 남고, 몸이 느려지는 만큼 마음은 깊어진다.
끝은 죽음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완전히 끊기는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떠나도, 그가 남긴 감정과 기억, 사랑과 말들은 어디에선가 조용히 이어진다. 다른 얼굴로, 다른 삶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분명한 일인지. 죽음을 안다는 사실이 사람을 단단하게도 만들고, 쉽게 무너지게도 한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사람은 영원을 꿈꿔왔다. 다시 돌아오는 계절에 마음을 놓았고, 남겨지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붙잡으려 했다. 문화와 기록, 믿음과 말—그 모든 건 사라지지 않으려는 마음의 조각들인지도 모른다.
세계는 끊임없이 무언가가 시작되자마자 사라지고, 사라지는 그 순간에 다른 것이 태어난다.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어떤 질서가 존재한다는 감각을 얻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규칙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이 무너질까 두려워 오래도록 붙들어온 사유들. 어떤 존재들은 위로 향하고, 어떤 존재들은 아래로 떨어진다. 부유하는 것과 가라앉는 것 사이, 삶은 규칙이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그 움직임엔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고, 모든 것은 마치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을 알고 있는 듯 제 경로를 따른다.
삶은 한결같지 않다. 어떤 순간은 활짝 열리고, 어떤 순간은 서서히 끝을 향해 기운다. 무너진 자리마다 새로운 움직임이 생겨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삶은 일정한 형식을 거부한다. 완벽한 삶은 없다. 누구나 예상하지 못한 틈을 지녔고, 어떤 이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때로는 무심히 지나간 순간들이 있고, 그 의미를 되새기지 못한 날도 있다. 그럼에도 질문은 멈추지 않는다. 아마 그 물음이, 삶을 이어가도록 하는 힘일 것이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름을 만들고 구분을 시도하게 했다. 사라질 것들 사이에서 남을 수 있는 것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어떤 구조도 금방 균열을 드러냈다. 견고해 보이던 형식에는 처음부터 틈이 있었고, 필연처럼 여겨졌던 일조차 우연으로 뒤바뀌었다. 그때 사람들은 알게 된다. 분명해 보이는 설명이 불안을 덮을 수 있고, 이성의 언어가 오히려 혼란을 감출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도 누군가는 의미를 붙들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부서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구조를 세우고, 언어로 닿지 않는 것들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설명할 수 없는 사유가 조용히 형태를 갖춰간다.
세상은 저절로 움직이는 법이 없다. 무엇이든 이유가 필요했다. 그래서 정당성 없는 일은 불안하게 여겨졌다. 보이지 않는 규칙들이 사물의 자리를 정렬했고, 움직임은 어느 방향으로든 고정되었다. 어긋남은 허용되지 않았고, 예외는 예외로 인정되지 않았다. 마치 이 세계는 본래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는 듯, 내일마저 예측 가능한 미래의 일부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정적은 길지 않았다. 규칙에서 벗어나는 징후들이 조금씩 나타났다. 익숙한 질서는 겉으론 유지됐지만, 내부에는 불일치가 퍼졌다. 한때 중심이라 여겨졌던 자리는 더는 중심이 아니었다. 세상은 누군가의 무대가 아니었고, 모든 것이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변화는 작았다. 물결 위 먼지처럼 감지되지 않는 떨림으로 시작됐다. 처음엔 단순한 오차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미세한 어긋남이 결국 방향을 바꾸는 힘이 되었다. 경계는 흐려졌고, 손에 익던 감각은 낯설어졌다. 그 흐름 속에서, 오랫동안 신뢰했던 것들—심지어 빛조차—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틈 사이로 들어온 빛은 항상 같지 않았다. 어떤 때는 나뉘고, 어떤 때는 겹쳤다. 바라보면 하나였고, 돌아서면 둘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착시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시선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었고, 세계는 보는 방식에 따라 형태를 바꿨다. 보는 순간, 세상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열린 사건이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된 확신이 흔들린 순간이었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시간에도 세계는 그대로일까.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선택은 어떤 자리를 가질 수 있을까.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안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그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물음이 방향이 되었다.
한동안 많은 이들이 자신이 있을 자리를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겼다. 모든 것이 계산 가능한 세계, 틀 안에서 반복되는 삶.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 자리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불확실해졌다. 어쩌면 그 위치는 바라보는 이가 만들어낸 모양일 뿐이었다.
불확실한 질서 앞에서 많은 이들이 멈췄다. 어떤 이는 두려움에 발을 떼지 못했고, 어떤 이는 방향 없이 움직였다. 누군가는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을 더듬었고, 누군가는 닫히지 않은 문 앞에 머물렀다. 선택되지 않은 길이 남겨진 이 풍경 앞에서, 그는 숨을 고르며 조용히 질문을 꺼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단 하나일 수도 있다. 이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매 순간 정직하게 질문을 던지는 일. 확정되지 않은 시간에, 아주 작은 흔적을 남기는 일. 그렇게 그는, 아직 끝나지 않은 삶의 형태를 조금씩 만들어갔다.
사람들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세계를 상상해왔다. 닿을 수 없는 가장자리, 침범할 수 없는 경계. 그것은 믿음이자 상상이었고, 때로는 진리라 불렸다. 쉽게 부서지지 않는 신념과 끝나지 않는 무엇이 머무는 장소. 시간의 마지막에서나 만날 수 있는 완전한 곳.
하지만 영원은 늘 멀리 있었다. 손닿을 듯 가까워졌다가도 사라졌고, 다가갈수록 뒤로 물러났다.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그 순환 속에서, 바라보는 일이 멈추지 않았다. 버티는 시간 안에서 사유는 자라났고, 그것은 진리를 얻는 힘이 아니라, 진리를 잃고도 무너지지 않는 마음이 되었다. 어쩌면 영원은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되풀이되는 시간에 깃들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