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흔히 따뜻한 햇살 아래서 커피를 마시거나, 오래된 음악을 들으며 누군가의 눈을 바라볼 때, 그 순간이 행복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장면들을 모두 모아도, 행복이라는 단어는 쉽게 정의되지 않는다. 잔잔한 바다를 떠올리다 갑작스러운 파도에 흔들리는 일처럼 다가왔다가 금세 멀어진다.
아마 태어난 이상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감각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 느낌에 이름을 붙인 것이 ‘행복’이라면, 행복은 도착지가 아니라 방향에 가깝다.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 혹은 무엇을 위해 견디고 있다는 마음. 그 불확실한 움직임이, 삶을 붙잡게 만든다.
그렇다면 질문은 바뀐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걸까, 살기 위해 행복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걸까. 삶이 견디기 어려운 순간에도 계속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언젠가 ‘좋아질 것’이라는 상상 때문 아니었을까. 사람은 대체로 스스로를 설명하기 어렵고, 현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그래서 어떤 막연한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그 감정을 삶의 이유처럼 여기는 것은 아니었을까?
돌이켜 보면 정작 행복을 원했던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행복해져야 한다는 생각만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런 모순 속에서 사람은 자주 길을 잃는다. 무엇이 부족한지도 모르면서, 무엇을 더 가져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천천히 잊게 된다. 처음엔 무엇을 원했던가. 어디로 가고 있었던가. 그리고 왜, 계속해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믿었던가.
어떤 사람도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는다. 동의한 적도, 설명을 들은 적도 없이 눈을 뜨면 이미 빛이 있고, 공기가 흐르며, 말소리가 들려온다. 피부를 스치는 온기, 귀에 남는 울림, 눈앞에 흘러드는 색과 형태들. 그 모든 것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지만 너무도 빨리 익숙해진다. 감각은 말보다 앞서 도착하고, 그 익숙함은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세계라는 착각이 들 만큼, 삶은 그렇게 어떤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존재했다.
삶은 타인의 손 안에서 시작된다. 태어난 장소와 계절, 이름과 가족, 관계의 방식까지. 어느 것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없다. 이미 정해진 틀 안에서 사람은 말하는 법을 배우고, 웃고 울고, 기뻐하거나 분노하는 방식을 익힌다. 어느 날, 익숙했던 감정이나 생각이 사실은 배운 것이었음을,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선택받은 것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오지만, 그때는 이미 많은 것이 지나버린 뒤다.
우리는 자신만의 것이라 믿는 거의 모든 것을 사실은 받아들인 것이다. 사용하는 말, 감정을 다루는 방식,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조차도 이미 누군가의 손을 거쳐 왔다. 익숙함은 판단을 대신하고, 배운 기준은 생각의 방향을 정한다. 삶을 해석하는 도구가 외부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그러다 문득, 젖은 흙냄새나 낯익은 말투, 오래전에 스쳐 지나간 골목의 풍경이 강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특별할 것 없던 장면들인데도,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떠올라 현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어디까지가 스스로의 선택이었고, 어디서부터가 주어진 결과였을까. 오랜 시간 익숙해진 습관과 방식에서 벗어나도 ‘나’라는 감각이 가능할까. 그런 질문이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올라온다.
삶은 어떤 도식이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계획은 어긋나기 쉽고, 애써 쌓아 올린 것들도 어느 순간 뜻밖에 무너진다. 믿어왔던 것이 흔들릴 때면, 어디에 서 있는지 다시 확인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 시간 속에서 마음은 오락가락한다. 어떤 날은 주저앉고 싶고, 어떤 날은 한 발을 더 내딛고 싶어진다. 의지와 좌절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마침내 하나의 태도가 만들어진다. 끝까지 놓지 않겠다는 마음. 그 조용한 끈질김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바닥이 된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있다. 젖은 빨래의 냄새, 무심한 손길,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사소한 장면들이 불쑥 감정을 불러온다. 거창한 성취가 아닌, 특별할 것 없는 오후에 아무 예고 없이 찾아와 조용히 머문다. 그것은 감정 그 자체라기보다, 그 감정을 받아들이던 마음의 태도에 더 가깝다. 말로 옮기지 않아도 또렷하게 남는 순간들. 그런 장면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겉보기엔 비슷해 보여도, 각자가 서 있는 출발선은 다르고 짊어진 무게도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많은 것을 가진 채 걷기 시작하고, 어떤 이는 오랜 시간 무거운 짐을 안은 채 걸어간다. 이 차이는 단순히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이나 눈에 보이는 조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겪어온 시간과 상처, 감당해온 일들이 만든 무게다.
사람마다 짊어진 삶의 무게는 다르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각자의 사정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고통을 마주할 때, 괜히 비교하거나 함부로 말하기보다는 잠시 멈춰 듣고 싶어진다. 그 마음은 꼭 착하거나 예의 바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그렇게 버텨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비난보다는 이해를, 거리감보다는 조심스러운 가까움을 택하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시간이 흐르면, 지키고 싶었던 것들도 어느새 멀어진다. 한때 자신을 설명한다고 믿었던 말들, 관계들, 태도들조차 조금씩 손에서 놓인다. 외부의 변화가 그 이유일 때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건 마음속 무게중심이 천천히 옮겨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삶의 자리에서 조용히 한 발 물러선 뒤에야 비로소 묻게 된다. 무엇이 사라졌는가보다, 끝까지 남은 것은 무엇인가를.
그제야 드러난다. 선명한 감정보다 더 오래 남는 건, 그 감정을 안고 살아낸 시간과 그 안에서의 선택들이다. 끝내 꺼내지 못한 말, 지나고 나서야 이해한 마음, 이미 돌아서면서도 놓지 못했던 생각들. 겉으론 사라진 듯해도 삶의 바닥 어딘가에서 계속 버텨왔던 흔적이다. 말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지만 그런 것들이 삶을 조용히 붙들고 있었음을, 그제야 알아차리게 된다. 쓸쓸함보다 단단함을 남긴다. 그리고 바로 그 단단함이, 상실 이후의 삶을 버텨내는 방식이 된다.
어떤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대도 없고, 기대할 이유도 없고, 그저 시간만 흐른다. 세상이란 게 원래 그런 거라고 말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까. 하지만 그런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아주 작게, 그러나 확실하게 남아 있는 무엇. 흔들리는 날들 사이에서 끝내 놓치고 싶지 않은 감정 하나. 때로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그 감정이 하루를 붙드는 힘이 된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변화 앞에서, 단단하게 마음을 먹었다고 믿었던 날조차 허무하게 무너진다. 단 한 사람의 말, 예상하지 못한 눈빛, 계절의 끝에서 문득 떠오른 냄새 같은 것들이 방향을 틀게 만든다. 그럴 때면 내가 뭘 붙들고 있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하지만 저녁 무렵, 창문을 스치는 바람결이나 따뜻하게 식은 찻잔 하나를 마주하며, 아, 오늘을 끝까지 살아낸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생각하게 된다. 이유를 먼저 안 것이 아니라,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이유들. 살아 있다는 건 늘 그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어떤 감각을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누구나 끝을 향해 걷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길 위에는 포기하지 못한 마음들이 따라붙는다. 닿을 수는 없더라도 끝까지 품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면, 다음 하루는 또 열리게 마련이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 한 소절, 오래전 기억을 되살리는 냄새 하나, 말없이 건넨 물 컵 하나. 그런 것들이 삶을 잡아준다. 그 모든 건 의미를 부여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해 있던 것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더라도, 의미가 없던 것이 아니다. 단지 아직 의미로 도착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떤 순간들은 설명보다 오래 남고, 확신보다 깊은 질문을 남긴다. 그 질문은 내일의 시작이 된다. 완벽한 하루는 없다. 다만, 자신만의 속도로 흔들리면서도 걸어가는 하루가 있을 뿐이다. 같은 길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이 된다. 모든 걸 붙들려고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다다른 감정 하나만 지켜내도 된다. 삶은 반복처럼 보이지만, 매 순간은 새롭다. 그것이 끝을 알면서도 다시 시작하고, 어긋난 길 위에서도 조용히 방향을 되짚을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살다보면 실패가 쌓이고, 기대는 배신당하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감정은 피어나고, 미완을 수용하는 태도는 삶의 방향을 부드럽게 틀게 만든다. 모든 것을 이뤘는데도 공허할 수 있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데도 충만할 수 있는 까닭은 감정의 결이 단선적인 성취-실패의 도식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삶은 논리보다는 감각, 이성보다는 정서에 의해 지속된다.
사람을 끝내 움직이는 힘은 방향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불안 속에서도 ‘계속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야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야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갈 수 있다.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매 순간을 살아냈다는 사실 자체로 삶은 의미를 갖는다고 말이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조용한 기쁨이 있다. 그것은 계획보다 강하고, 목표보다 오래 남는다. 그 기쁨이 하루를 지속하게 만드는 진짜 힘이다.
누구는 낯선 방 안에서, 또 다른 이는 북적인 거리에서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를 고민한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궤도를 따라갈 때야 비로소 실마리가 찾아진다. 그것은 정답에 도달하는 일이 아니라, 방향 속에서 발견되는 작고 확실한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이다. 때론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그 과정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된다.
길을 잃어보면 단단해진다. 그 찰나의 고통을 통과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갈 희망을 얻게 된다. 막상 원하는 자리에 다다르더라도 발밑은 공허로 바뀌고,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무언가를 움켜쥐려 손을 뻗었으나, 그 끝엔 허공만이 있었던 것처럼.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마음은 찢어진 천처럼 힘없이 늘어진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된다. 우리가 좇았던 것은 처음부터 실체가 없는 신기루였음을. 그럼에도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무엇을 위해 걷는지도, 무엇을 잃지 않으려는지도 불분명하지만, 멈추는 법을 배우지 못한 몸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간다. 그 걸음 속에서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발을 내딛을 뿐이다.
삶은 가끔 숨을 쉬기조차 조심스러워지는 풍경 속에서 시작된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속도에 맞춰 걸음을 조절해야만 어딘가에 속할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면 살아 있는 척을 먼저 익히고, 느끼는 일은 그다음이 된다. 그렇게 버릇처럼 참고 견디다 보면 문득 거울 앞에 멈춰 서게 된다. 하지만 그 거울은 이미 오래전에 빛을 잃은 유리처럼, 나를 비추지 않는다. 겉모습은 그대로인데, 그 안의 나는 점점 불분명해진다.
감정이라는 건, 꼭 단단한 벽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날 아무런 예고 없이 무너진다. 무너지는 건 벽이 아니라 내가 먼저다. 큰 소리로 자신을 증명하던 자존심은 조용히 구겨지고, 남는 건 말없이 가라앉는 무기력뿐이다. 하지만 그 무기력 속에서도 사람은 어딘가를 향해 손을 뻗는다. 기대면 부서질 걸 알면서도, 빈손으로는 견딜 수 없어 무엇이든 움켜쥔다. 어떤 이는 그것을 삶이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그것이 삶을 흉내 낸 반복일 뿐이라 말한다.
그 반복은 아주 작은 틈에서 깨어진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더라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작게 갈라진 틈이 계속 자란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틈을 지탱한다. 어떤 이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그 안을 메우고, 또 다른 이는 계속해서 흔들리며 무언가를 느끼려 애쓴다. 흔들리는 순간마다 잠깐 피어나는 감각을 붙잡기 위해 더 큰 움직임이 필요해지고, 그렇게 사람은 점점 자극에 익숙해진다.
자극에 익숙해진 삶은 낯설게 비껴나간 감정을 되찾기 위해 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견디기 위해 시작된 움직임이, 어느 순간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일상이 된다. 일상은 더 이상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비슷한 불안을 견디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 반복은 하나의 흐름이 되고, 흐름은 곧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유행은 언제나 새로운 얼굴로 나타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엔 서로 닮은 두려움과 갈망이 있다.
우리는 그 흐름에 발맞춰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한때는 나만의 길이라 여겼던 자리에서 수많은 발자국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고, 조금은 달라졌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때론 같은 자리를 빙빙 돌더라도, 다르게 느껴보려는 몸짓이 분명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는다.
삶이라는 건, 어쩌면 반복되는 순간들 속에서 조금씩 변해가는 감각들의 모임일지도 모른다. 결핍이라는 건 결코 무언가가 부족한 게 아니라, 삶이 스스로 만들어낸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고, 견뎌내고, 다시 일어나 걷는 그 모든 순간이 어쩌면 누군가가 말한 행복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