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이가 물었다. 꿈이 뭐냐고. 뜻밖이었다. 순간, 말이 막혔다. 대답을 준비할 틈도 없이 그 말이 툭, 심장 가까운 곳을 건드렸다. 진지하게 말하자니 무게가 느껴졌고, 대수롭지 않게 흘리자니 아이가 실망할 것 같았다. 나는 그 중간쯤 되는 대답을 고르기로 했다. “내 꿈은 축구공이 되는 거야.” 농담처럼 들렸고, 어쩌면 자기 풍자였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게 뭐야. 사람이 어떻게 축구공이 돼?” 그런 질문은 늘 아이의 얼굴에 먼저 그려진다. 나는 배를 내밀며 웃었다. “봐봐. 내 배. 볼록하잖아? 조금만 더 있으면 축구공이 될지도 몰라.”
그런데 아이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축구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마치 무언가를 정말로 이해한 사람처럼. 그 말투에는 망설임도, 농담도 없었다. 나는 말없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다시 나를 보지도 않고, 그냥 종이 위에 색연필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마치 방금 한 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을 지나치지 못했다. 그 짧은 한 마디가 심장을 둥글게 휘감고 돌았다. 아이의 말에는 문이 없었다. 계산도 조건도 없었다. 될 수도 있다는 말, 그것이 가능하다는 뜻인지, 허용한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단순한 수긍 앞에서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나는 내가 방금 무심코 던진 농담에, 아이가 생각보다 진지하게 반응한 것에 당황했다. 아니, 당황이라기보다는… 어떤 서글픔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왜 그런지 몰랐지만, 아이의 말은 내가 오래전에 마음속 어딘가에 넣어두고 잠가버린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것 같았다. “축구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 문장이 마음속에서 계속 울렸다. 다른 말로 바꿔도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 문장. 그 단순하고 기이한 문장 하나가, 아이가 아직 속하지 않은 세계의 문 앞에서 태어난 것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나를 뭉클하게 만들었다. 아이는 아직 어떤 가능성도 폐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 나는, 그게 부러웠다. 동시에… 두려웠다.
그날 이후, ‘꿈’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좋은 직장’, ‘안정된 자산’ 같은 것들이었다. 언제부턴가 꿈을 직업이나 계획처럼 여겨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실현 가능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꿈이라 부르지도 않았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만 진짜처럼 느껴졌고, 가능성이 낮으면 아예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목표를 ‘꿈’이라고 착각했고, 실패는 게으름이나 준비 부족 탓으로만 여겼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될 수 있는가’만을 먼저 따졌다. 그러다 보니, 아무것도 얻지 못한 현재에 멈춰 서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동안 꿈에 대한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던 이유일 것이다.
꿈은 그냥 될 수도 있는 거야라는 아이의 단순한 생각. 조건이나 가능성을 따지지 않는 태도. 상상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 아이 앞에서 나는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현실을 살아가는 어른에게는 너무 낯선 말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는 묘한 해방감이 있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 최고한 아이는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태도였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관대하지 않다. 감당해야 할 무게는 언제나 꿈보다 무겁고, 노력만으로 넘을 수 없는 벽도 많다. 그래서 내 꿈은 점점 흐려졌고, 불안이라는 이름의 바람에 흔들리며 사라지기도 했다. 책임이 가능성보다 먼저 떠올랐고, 계획은 꿈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꿈 대신 계획을 말하게 되었고, 그 계획이 실패할 확률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그렇게 꿈은 현실의 그림자 속에 숨어버렸다.
진심으로 축구공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런 말을 해도 된다는 것. 누군가가 그 말을 웃지 않고 들어준다는 것. 그 하루는 어딘가 조금은 덜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고 나서부터는, 말 한마디로 마음이 가벼워지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다. 말은 무거워졌고, 마음은 닫혀갔다. 그래서 그런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조금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하필 축구공이었을까. 웃으며 던진 말이었지만, 그 말은 마음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맴돌았다. 그냥 농담이라고만 하기엔, 어쩐지 진심이 조금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계속 굴러다니고 싶다는 마음, 누군가의 발끝에서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 목적 없이 흘러가는 지금의 나를, 잠시라도 누군가의 무언가로 존재시키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어른이 된다는 건, 때로는 자신을 조용히 포기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아이의 말은 그렇게 조용히 가라앉아 있던 내 안의 숨결을 건드렸다. 어설픈 농담이 오히려 진심에 가까웠던 이유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여전히 꿈에 대해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무엇이든 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시절은 지나고, 어느 순간부터 ‘될 수 있는 것’만을 떠올리게 되었다.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자꾸 머뭇거리다 보면,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누군가 “내 꿈은 축구공이 되는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웃지 않고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제법 괜찮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인 척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더더욱, 그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축구공이 되고 싶다’는 말은 사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조용히 굴러들어가고 싶었다는 마음, 아주 작게라도 누군가의 삶 속에서 의미가 되고 싶었다는 바람. 그런 마음이 농담처럼 흘러나올 수 있었던 하루는, 어쩌면 그 자체로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진심은 종종 농담의 옷을 입고, 가장 부드럽고 느린 방식으로 사람을 흔들고 지나간다. 마음을 두드리는 건 언제나 큰 외침이 아니라, 그렇게 무심한 말 한마디일 때가 있다.
꿈은 말없이 비워진 내면의 공간, 그 틈에서 태어난다. 흔들림은 결핍의 신호이고, 단단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직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받아들이기 위해선 자리가 남아 있어야 한다. 삶은 언제나 그릇의 가장자리에서 멈춘다. 닿을 듯 말 듯, 가득 찼지만 넘치지 않는 상태. 물은 그런 방식으로 하루를 담는다. 정확히는 담지 못한 채, 조금씩 흔들리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렇게 흔들리는 그 자리에, 사람은 꿈을 띄운다.
사람은 지금 가진 것이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그 빈자리에 무언가를 놓고 싶어진다. 그것이 꼭 크고 대단할 필요는 없다. 바라는 것들은 다르지만, 그 뿌리는 닮아 있다. 채워지지 않은 마음, 결핍,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나는 소망. 우리는 그 작은 틈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비로소 알아차린다.
꿈은 완성되지 않은 퍼즐 같아서, 어떤 조각은 딱 맞고, 어떤 조각은 영영 어긋난다. 맞지 않는 조각은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맞는 조각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그렇게 삶은, 실패와 가능성, 채움과 비움의 반복 속에서 우리를 조금씩 앞으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꿈이란 단순한 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살아 있고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아주 오래된 그리움처럼, 조용히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것. 그리고 어느 날, 아이처럼 천진하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응, 축구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 말 속엔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단순하지만 명징한 진실이 담겨 있다.
우리는 그 애매한 경계에서 하루를 견딘다. 채워지지 않았지만 비어 있지도 않은, 미세한 파동 위에서. 꿈은 그 위에 떠 있는 작은 불빛 같다. 손에 잡히진 않지만 사라지지 않는. 그래서 우리는 매일 그 빛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배운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아이처럼 말할 수 있게 된다. “응, 축구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 말은, 삶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꿈이 있다는 증거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생각한다. 그날들은 확실한 얼굴도, 분명한 약속도 없이 마음속 어딘가에서 흐릿하게 움직인다. 그것이 기다림인지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종종 그 이름 모를 날들에 마음을 걸고 살아간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건 그런 방식인지도 모른다. 손에 쥔 것보다 쥘 수 없었던 것들을 더 오래 기억하고, 지나간 일보다 다가오지 않은 일 앞에서 더 많은 감정을 쏟는 일. 그래서 어떤 하루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도 긴 여운을 남기고, 어떤 시간은 흔적도 없이 지나간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감정이고, 남는 것은 모양이 아니라 흔적이다.
그 흔적은 때로 ‘꿈’이라고 불렸고, 때로는 ‘바람’이라 했고, 혹은 이름 없는 어떤 것이라 불렸다. 그러니까 꿈은 대단한 것도, 거창한 것도 아니다. 잠든 밤의 환상도 아니고, 커다란 미래의 설계도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자리를 견디게 해주는 조용한 무언가. 그것이 있어 우리는 오늘을 버티고,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때때로 스스로를 다잡거나 놓아주기도 한다.
꿈은 어쩌면 자유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향하는 방향을 스스로 허락하는 것. 나조차 외면했던 진심을 따라가보는 일. 그 고요하고 단단한 내면에서 꿈은 자란다. 자유란 단지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외로움까지도 끌어안고 스스로를 책임지는 일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타인의 기대와 세상의 기준에 맞추며 살고,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여전히 이름 붙이지 못한 어떤 감정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이 길의 끝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라, 그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매일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매일을 살아내는 용기. 사랑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는 반복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아이에게 말했던 축구공처럼, 인생은 때로 아무 방향도 없이 굴러간다. 하지만 그 목적 없는 흐름이야말로 우리를 멈추지 않게 하는 유일한 에너지다. 직선으로만 굴러가지 않기에, 가끔은 이상한 곡선을 그리며 미끄러지기에, 삶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나를 흔들고, 깨어 있게 만든다. 어긋남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리듬을 발견하고, 어긋남 끝에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비틀거리면서도 굴러가고, 굴러가면서도 살아낸다.
내가 걷는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계속 걸을 수 있는 것은, 그 걸음 하나하나에 내가 지키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닐지 몰라도, 나에게는 하루를 살아가는 방식이자 존재의 증거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지나간 시간 속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언젠가 돌아보게 될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것. 그것이 희망이든, 결핍이든, 사랑이든, 상처이든, 또는 그 모든 것을 품은 어떤 자유이든.
그래서 오늘도 나는 무언가를 바라며,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마음을 안고, 여전히 모르는 내일을 향해 조용히 걷는다. 끝내 정의되지 않을 이 시간의 마음을, 나는 조심스럽게 ‘꿈’이라 불러본다. 꿈이란, 어쩌면 살아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