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예전엔 언제나 모자랐는데, 지금은 이상할 만큼 남아돌았다. 시계는 계속 움직였지만, 자신만 멈춰 있는 것 같았다. 휴대폰이 깜박였다. 지혜가 톡을 보냈다.
-야.
-얼굴 좀 보자. 할 말 있음. 지금 딱 네 앞에 앉아야 할 타이밍임.
지혜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늘 뭔가를 끝까지 끌고 가는 사람이었다. 역시나 곧이어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패턴이 일정했다. 사전작업이 끝나면 본작업이 따라왔다.
-지금 출발하면 한 시간쯤? 네 집으로 감. 피자는 네가 시켜. 반반. 그리고 제발 치즈크러스트는 하지 마라.
허락은 필요 없다는 투였다. 이상한 녀석이었지만, 늘 장난 같기도 하고 진심 같기도 했다. 준호는 그런 지혜에게 언제나 문을 열어주었다. 필요하면 연락했고, 바쁘면 잠시 뜸하게 지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둘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같은 반에서 삼 년을 보내고, 같은 동아리에서도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서로의 존재는 특별하지 않아도, 없으면 허전한, 일상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겹쳐져 있었다. 한때 같은 여자아이를 좋아한 적도 있었다. 물론 둘 다 거절당했고, 그 일은 금세 지나갔다. 그런 식으로, 서로의 삶에 깊이 얽히지는 않았지만, 늘 곁에 있는 편안한 관계가 이어졌다.
지혜가 도착했을 때 피자는 지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집에 들어와 자리를 잡더니 피자를 크게 베어 물며 갑자기 여행 브이로그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이름은 ‘트래블이지’ 어때? 좀 있어 보이지 않아?”
준호는 피식 웃었다. 지혜의 얼굴과 그럴듯한 이름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점이 없었다. 그녀의 말은 산발적이어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해하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브이로그 같은 영상을 만드는 일은 어쩐지 지혜와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같이하자. 여행 브이로그. 넌 보디가드 해. 그냥 옆에만 있어. 그뭐 싫으면 촬영이나 편집 같은 거 해도 좋고 프로듀싱도 괜찮아. 하여튼 같이해.”
진지한 얼굴이었다. 확실히 디자인을 했던 친구라서 그런지 새롭긴 했다. 아니 새로움에 민감하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가끔은 좀 있어 보였다. 대신 산발적이었고 흐름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지혜의 모든 것은 준호와 달랐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신뢰하는 이유였다. 딱 자기가 생각하는 반대편에 지혜가 있을 것 같은 확신.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준호는 맥락 없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이름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대체로 브이로그는 이름과 상관없이 흘러가 버리는 법이었다.
“못 해. 카메라도, 말도, 편집도.”
“그럼 그냥 옆에만 있어. 걷기만 해도 돼. 네 표정이 캐릭터야.”
“그래서 더 싫어. 내 얼굴이랑 목소리, 화면에 나오는 거 자체가 이상해. 내가 하는 말 억양도 별로고, 표정도 부자연스럽고… 그냥 다 어색하고 민망해.”
지혜는 웃음을 삼켰다.
“야, 요즘은 그런 게 매력이라니까. 꾸며낸 거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너 일부러 힘 안 주고 있어서 좋은 거라고.”
“나는 그 힘 안 주는 척하는 것도 싫어. 그냥 귀찮아. 뭐 하나 찍자고 세팅하고, 촬영하고… 생각만 해도 피곤해.”
“너 진짜 요즘 애 맞냐?”
“응. 근데 나 같은 요즘 애도 있어.”
지혜는 입꼬리를 비틀고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너 성격상 그럴 줄 알았어. 그래도 혹시 몰라서 한번 찔러본 거지.”
“미안.”
준호는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지혜는 물러서지 않았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럼 여행이라도 같이 가자. 그냥 옆에만 있어주면 돼. 카메라는 신경 안 써도 되고, 네 얼굴도 안 찍을 거야. 혼자 가면 너무 무섭고 어색하단 말이지.”
찬물을 한 모금 삼켰다. 고개를 조금 돌렸다.
“그게 더 싫거든. 그리고 나, 지금 실연상태라 꽤 아파. 그냥 좀 내버려둬.”
말투는 여전했지만, 속도는 전보다 느려져 있었다. 지혜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야, 헤어졌어? 그럼 바람 좀 쐬러 가야지. 넌 그냥 옆에서 실연당한 남자처럼 조용히 걷기만 하면 돼. 원래도 말 없잖아. 배경음도 필요 없고, 마이크도 안 찰 거야. 그냥 실루엣으로라도 화면에 잡히면 그게 제일 좋아. 나 혼자 걷는 건 너무 창피하거든.”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위험한 신호였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계약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이행하든 하지 않든, 두고두고 괴롭힐 무기를 스스로 만들어주는 셈이었다.
“너, 걸으면서 굳이 대화 안 해도 되는 여행. 얼마나 귀해. 너한테 딱이야.”
“그건 좀…” 준호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진짜 화면에 안 나와도 돼?”
“절대 안 나온다. 네가 싫으면 다 지운다. 편집은 칼같이 할게.”
준호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셔츠 밑단을 내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근데 진짜 한 번뿐이다. 다음부터는 네 혼자가.”
지혜는 피식 웃었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 ‘한 번’이 몇 번째인지, 따질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이미 가방을 메고 있었다. 출발 시간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흐름은, 이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준호도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갈지 정하지 못했다. 하루쯤이면 결론이 날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리스트는 점점 지워졌고, 지도를 펼쳐도 눈에 들어오는 곳은 없었다. 지혜는 서울을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준호는 반박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게 당연한 말처럼 들렸다.
브이로그는 처음이었다. 어떤 톤으로 찍을지, 얼마나 말을 할지, 카메라는 누가 들지조차 정하지 못했다. 준호는 며칠 동안 영상을 찾아보며 분석했지만, 따라 한다고 해서 될 일 같지는 않았다. 차라리 무작정 어딘가에 가서, 발길 닿는 대로 걷고, 그 풍경을 담아내는 게 나았다. 힘들면 힘든 대로. 오히려 그런 편이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관광지는 제외했다. 복잡한 곳은 질색이었다. 바다, 오래된 건물, 느리게 움직이는 일상. 좁은 해안도로, 트럭 하나 지나가는 거리. 그런 곳이면 충분했다.
지혜는 낚시가 가능한 방파제 이야기를 꺼냈다. 특별할 것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디로 가자는 말보다 무엇을 하자는 말이 덜 피곤하게 느껴졌다. 방파제라는 단어에는 사람 손이 덜 닿은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붙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서두르지 않고, 누구도 무언가를 완성하려 하지 않는다. 준호는 문득 그런 장소라면 조금은 괜찮을 것 같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리, 주차된 채로 한참 움직이지 않은 트럭, 사용되지 않는 간판에 덧붙여진 QR코드가 그리 뒤처지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곳. 그런 장소는 시간이 고여 있다. 버티는 도시. 어쩌면 지금 지혜가 생각하는 여행도 아마 그런 종류일 것이다. 머리가 흩날리는 장면이나, 간판이 흔들리는 소리, 멀리서 기계가 작동하는 금속음 같은 것들이 묻어 있는 영상을 만들고 싶었다.
서울에서 이른 아침에 출발한다면, 무리해서 당일치기 정도는 가능할 것 같은 거리. 가끔은 목적지라는 것이 단순히 시간과 거리를 측정하는 숫자 이상이 될 때가 있다. 게다가 거기엔 군데군데 촬영하기 좋은 장면이 흩어져 있고,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도시이면서도 어쩐지 관광지 같지 않은 도시를 찾았다. 설명이 없어도 되는 거리. 지도는 불규칙하게 접힌 종이처럼 뒤틀려 있고, 도착한 사람은 어디서부터 발을 옮겨야 할지 잠시 망설이게 된다. 그런 도시였음 했다.
“항구가 있었으면 좋겠어.”
준호가 말했다. 둘은 자주 그렇게,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지혜는 생각을 멈추고 준호를 바라봤다.
“항구?”
“응. 그냥 바다도 있고… 좀 한계지 같잖아.”
준호는 생각보다 꽤 진지하게 말했다.
“한계지?”
“어, 뭐랄까, 육지의 끝 같은 느낌. 더 이상은 없다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
준호는 그런 말을 하고 나서, 스스로도 뭔가 잘못된 단어를 쓴 게 아닌가 싶은 눈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봤다. 지혜는 준호의 설명을 듣더니 무슨 말인지 알아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이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야, 너 진짜… 뜻이나 알고 쓰냐? 한계지가 뭔지 몰라?”
준호는 당황한 얼굴로 물을 마시려다 말았다.
“어? 한계를 의미하는 땅 뭐 그런거 아냐?”
“한계지는 행정구역 맞닿은 곳이야. 육지 끝이 아니고요.”
지혜는 웃었다. “진짜, 중학교 때 졸았지?”
큰 잘못은 아니었지만 뻘쭘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지혜의 말을 인정해주기도 싫었다.
“아니, 나도 대충은 알고 있었어. 근데 그냥… 어감이 좋잖아. 끝 같고. 뭔가 느낌 있잖아.”
“느낌? 너 머릿속 느낌? 그 느낌어디에 있어? 해안가 사람들 서러워 웃겠다. 아니야?”
준호의 눈에 지혜가 웃는 모습이 담겼다. 피자를 씹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치 세상에 넘지 말아야할 선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그녀는 경계 위를 아무렇지 않게 걸었다. 자신도 언젠가는 그랬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경계선. 누군가 긋고, 모두가 당연히 인정하는 선.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선. 그리고 이서와 자신 사이에 그어진 새로운 선. 그것은 익숙하고 안전했던 세계가 분열되어 나타난 새로운 힘의 방향을 의미했다. 달라진 방향. 어쩌면 그것이 지금 이서와 자신을 잘 설명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 그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직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준호는 무심결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말이 막혔다. 이런 식으로 몰리는 상황을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싫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뻔뻔했다. 지혜는 그런 준호의 그 애매한 표정을 보며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건 지혜가 이겼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