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결국 혼자 내려왔다. 준호와 함께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기차표도, 숙소도, 식당도 그렇게 맞춰져 있었다. 며칠 전, 그것도 새벽, 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아니라는 말과 함께, 좀 쉬고 싶다고 했다. 흐트러진 목소리였다. 더 캐묻지는 않았다. 묻지 않아도 지혜는 알고 있었다. 그녀 때문이 분명했다. 하지만 오래된 친구의 침묵에는 손댈 수 없는 영역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태도였다.
그래도 그때 준호는 분명 담담했었다.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벼웠다. 어쩌면 그의 이별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걷히듯, 숨을 쉬는 일이 조금은 수월해지는 느낌. 준호와 마주 앉아 있을 때마다 어디선가 따라와서 끼어드는 것 같은 불편함이, 이제는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오히려 마음이 조금 느긋해졌다. 오래 웅크리고 있던 긴장도 스르르 흩어졌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라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 이상은 아니라고. 다만 그렇게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굳이 새벽에 전화까지 해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홀로 버스에 탄 순간부터는 꼭 있어야 할 조각이 빠져나간 것처럼 허전했다. 마냥 설렐 것 같았던 기대도 사라졌다. 감정이 무엇인지 분명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원래부터 혼자였던 것처럼 굴면 된다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 비어 있는 것 같은 감각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허전함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준호가 옆에 있었다면, 지혜는 더 부지런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쉴 새 없이 계획을 내뱉고, 잠시의 공백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이야기를 채웠을 것이다. 잘난 척처럼, 아니면 자신을 입증하듯, 떠들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조금은 더 괜찮은 인간 같았다. 준호 곁에서는 그래야만 했다.
낯선 창밖, 단조로운 엔진 소리, 혼자인 지혜는 다르게 작동했다. 생각은 뒤로 미뤄졌고, 결정은 어정쩡해졌으며, 어깨의 각도마저 흐물거렸다. 정확히 무엇을 하러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물론 모든 것이 완전히 비워진 건 아니었다. 도착할 곳, 예약해둔 숙소. 이미 앱에는 미래의 어느 지점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점과 점 사이, 연결되지 않은 선이었다. 선을 잇지 못하면 공간을 확보하지 못할게 뻔했다.
설사 공간이 마련된다고 해도 그 빈 여백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지혜는 머뭇거렸고 그 상황이 이상하게도 불편했다. 낯설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없지는 않았지만, 원래 있어야하는 것이 없는 것임은 분명했다. 연습게임도 없이 곧바로 실전에 뛰어는 초짜의 불안 같았다.
지혜의 숙소는 예전엔 어부의 집이었다. 오래된 나무틀이 그대로 드러난 천장, 덧댄 창문, 바닥에 깔린 무채색 타일이 조금씩 들떠 있었다. 특별히 예쁘지도 않았지만, 그 낡음이 이상하게 마음을 붙잡았다. 지혜는 가방을 내려놓고 마루에 앉아 한참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 대신 바람이 울었고, 마당으로 들어온 고양이가 창틀 아래를 서성이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해가 저물 무렵, 지혜는 미리 저장해둔 맛집으로 향했다. 항구 끝에 붙어 있는 허름한 식당이었다. 낡은 간판 밑으로 불빛이 번졌고, 창문마다 김이 서려 있었다. 문을 열자 기름 냄새와 젖은 나무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자리로 안내받자 중년의 여자가 다가왔다. 메뉴판은 종이에 연필로 쓴 글씨였고, 손때로 가장자리가 번들거렸다.
지혜가 생선정식을 주문하자 여자가 잠시 멈췄다.
“그건 2인분부터 돼요. 1인분은 안돼요.”
짧은 말이었지만, 그 사이로 식당의 기름 냄새가 더 짙어졌다. 지혜는 대답하지 않고, 잠깐 손끝으로 젓가락 포장을 매만졌다. 어딘가 먼 곳에서 누군가 그릇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아주머니의 말이 떨어지자 공기 속의 열기가 아주 얇게 바뀌었다. 지혜는 숨을 들이켰다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 요즘은 흔했다. 장사도 힘들 테고, 단정 짓기 어려운 불편함이 이곳저곳에 묻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분위기가 낯설지는 않았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배달앱에서 음식을 고르다 1인분 주문이 막혀 있었다. 화면 속 문구 — “2인 이상 주문 가능” — 이상하게 싫은 말이었다. 혼자 먹는다는 건 언제부터 이렇게 불편한 일이 되었을까. 단순한 한 끼에도, 설명되지 않는 프리미엄이 붙어 있었다. 지혜는 그 불합리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더 이상 놀라지 않는 자신이 낯설어 할 뿐이었다.
그녀는 고분고분 2인분을 주문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브이로그용 카메라를 꺼냈다. 테이블 끝, 물컵과 냅킨 사이 좁은 틈에 삼각대를 세웠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게 손끝으로 감았다. 이 공간은 낯선 만큼,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숨소리조차 카메라에 남을 것 같았다.
지혜는 초점을 맞췄다. 화면 안에는 고등어, 된장국, 그리고 반찬 몇 가지가 놓였다. 프레임 속에 자신의 얼굴은 없었다. 대신 불빛이 반사되어 음식 위를 얇게 덮고 있었다. 지혜는 그 빛을 가만히 바라봤다. 순간, 창문 밖 어딘가에서 낯선 바람이 스쳤다. 그 소리에 맞춰 고등어의 껍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혜는 그 장면을 집중해서 봤다. 마치 자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무언가 다른 생이 시작되는 것처럼. 그것은 다른 사람이 봐줬으면 하는 한편의 연극이었고 또는 실제로 무엇인가라도 담기기를 바라는 두마음이 있었다.
음식은 금세 나왔다. 구운 고등어 한 마리, 된장국, 그리고 여러 가지 반찬들. 지혜는 숟가락을 들어 밥을 한 입 뜨려던 순간, 왼편에서 작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쯧.” 흠칫했다. 처음엔 그냥 소리만 들었다. 우연이겠지, 그렇게 넘기려 했다. 그러나 몇 초 뒤, 등 뒤에서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요즘 저런 애들이 참 많아. 민폐야, 민폐…”
지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음식을 가져다주었던, 화장을 짙게 한 넉넉한 얼굴의 아주머니였다. 그 짧은 순간, 지혜는 문득 생각했다. 왜 저렇게까지 화장을 했을까. 감추고 싶은 게 있는 걸까. 주름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일 같은 것 말이다. 직원인지 사장인지 알 수 없었다.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이모,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말끝에 가느다란 떨림이 스쳤다.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아주 익숙하지만, 어딘가 단단하게 벼려진 말투였다. 아주머니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식탁을 닦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혼잣말이야. 근데 혼자 와서 밥 먹는 것도 좀 그런데, 허락도 없이 촬영까지 하고… 좁은 식당에서 안 그래?”
지혜는 어이가 없었다. 처음부터 반말인데다, 이미 들어올 때 촬영한다고 말해두었다. 허락도, 반대도 없었기에 당연히 카메라를 켰다. 그래서 2인분을 주문했다. 식당 안엔 손님이 두 테이블뿐이었고, 그게 얼마나 민폐인지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이없음은 곧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비난을 섞어 말을 뱉는 그 태도, 그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 그리고 너무나 정당한 얼굴.
그 모든 게 지혜를 멈추게 했다. 순간, 오히려 자신이 뭔가 잘못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저기요, 저 저기 저분에게 물어도 봤고, 이모 아니 아주머니가 말씀하신데로 2인분도 시켰는데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부엌에서 묵묵히 일하는 다른 아주머니를 가리켰다. 하지만 맞장구 쳐주지 않았다. 사람이 별로 없는 식당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목소리도 더 울려 크게 느껴졌다.
“아 그래? 알았어. 똑똑하네. 그럼 빨리 드시고 나가주세요.”
아주머니는 밀리지 않았다. 장사를 이렇게 해도 되는지 싶었다. 불친절을 넘어 이 낯선 사람들 때문에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 같았다. 얼마나 대단해서 이렇게 말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지혜는 입을 다물었다.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굳이 싸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분명 자신은 손님이었다. 조금은 응석을 부려도 괜찮은 신분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응석은커녕 애처럼 굴지 말라는 눈치를 받는 중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재빨리 패배를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는 게 어쩌면 상황을 모면하는 길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채로 싸워야 했지만, 그럴 자신은 없었다. 지혜는 짧게 말했다.
“네,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짧고 차가운 기분이 식당을 채웠다. 그것은 분명 패배였다.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한 숟갈, 또 한 숟갈. 그러나 음식은 제 맛이 나지 않았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사실 지혜가 제 맛을 알리는 없었다. 그냥 그 맛이 기분 좋게 하지 않았다. 고등어의 살점은 여전히 부드러웠고 된장은 적당히 짰지만, 무언가 씹을 때마다 씁쓸함이 혀끝에 맴돌았다. 지혜는 결국 끝까지 먹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억울함보다 크고, 분노라기엔 부족하며, 그냥 넘기기에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카메라는 그 모든 과정을 기록했다. 지혜가 갈등하며 야린 눈빛을 흘리는 장면까지도. 카메라는 인정 따윈 없다. 그저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과 몸짓, 미세한 떨림을 냉정하게 담아냈다. 게다가 공간을 채운 모든 소리까지 빠짐없이 저장했다. 그것은 아무런 쓸모없는 것들 이었다. 애초의 목적과는 전혀 관련 없는 부스러기 같은 것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온 지혜는 편집을 시작했다. 원래 계획했던 포인트를 하나씩 지워나갔다. 화가 가시지 않았다. 첫 영상인데 완전히 망쳤다고 생각했다. 그때 아주 짧게 준호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하고 생각했다. 영상은 쓸 만한 게 없었고, 좋은 말을 덧붙이기엔 상처가 너무 컸다. 차라리 다음에 올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이 기분만은 남겨두고 싶었다. 그래도 카메라가 열심히 일하지 않았는가. 메모리칩을 뜨겁게 달궈가며 모든 걸 담지 않았는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이 겪은 일과 느낀 것, 그날의 일을 하나하나 담아냈다. 어쩌면 지혜의 인생에서 가장 정직한 편집이었다. 디자이너였던 그녀는 편집의 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떤 건 가리고, 어떤 건 드러내고, 또 어떤 건 빈공간으로 남겨 보는 이를 그 공간에 가두어 버리는 잡기술도 잘 이해했다. 준호는 늘 그런 짜깁기 좀 하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 그건 분명 크리에티브였다. 강약이 잘 섞인 하나의 창작. 창작자라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거나 혹은 해야만 하는 일에 가까웠다.
지혜는 빠르게 영상을 짜깁기해 업로드했다. 섭섭함은 비교적 자세히 담았지만, 솔직히 기대는 없었다. 새벽 시간은 확산에 저항이 없었다 — 차가 막히지 않아 평소보다 빨리 목적지에 닿듯, 영상도 거침없이 멀어져 갔다.
그날 새벽, 영상은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퍼졌다. 단순한 제목, ‘혼밥하다가 들은 말’. 썸네일도 특별한 효과 없이 식탁 위 고등어구이 사진과 눈물이 맺힌 얼굴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반응은 거셌다. 댓글은 순식간에 수백 개로 불어났고 브이로그 채널은 하루 만에 구독자가 몇 천 명 늘어났다.
“가게 이름 박제합시다. 당장.”
“이런 데는 불 질러야 돼.”
“저딴 인간들이 밥을 판다고? 역겹다.”
문장들은 짧았고 단어마다 독이 묻어 있었다. 누군가는 손에 피를 묻힐 각오로, 누군가는 돌을 던질 상상을 하며 글을 남겼다. 그 와중에 차분한 척 하는 댓글도 있었다.
“이건 단순 불친절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악입니다. 뿌리째 뽑아야죠.”
겉으로는 분석 같았지만 실제로는 고문 도구를 고르는 손길과 다르지 않았다. 지혜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대중의 분노가 자신과 같은 온도로 달궈져 있었고, 그건 단순한 응원이 아니었다 — 마치 같이 잡아 찢자는 신호였다. 표적은 식당이었고, 자칫하면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질 수 있었다. 지혜에게는 이상하게도 기회가 보였다. 문제는 식당이 아니라, 이제 대중의 꺼지지 않는 화(火)여야만 했다. 복권에 당첨된 듯한 생각이 스쳤다. 누군가 “어그로”를 끌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갑자기 납득이 되었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사람들은 지혜의 영상을 보았다. 댓글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숫자는 매시간 불어나며 현실감을 잃어갔다. 헤아리기 어려운 문장과 단어들이 끝없이 쏟아졌다. 짧은 호응, 장황한 분석, 엉뚱한 농담, 그리고 전혀 모르는 이의 진심 같은 고백까지. 지혜는 그것들을 하나씩 눈으로 훑었다. 수십만 명의 흔적, 수십만 개의 시선. 그들이 화면 너머에서 같은 장면을 바라봤다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새벽에, 점심시간에, 아마도 누군가는 퇴근길 전철 안에서 이 영상을 보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다음 편을 원했다. 이미 정해진 각본이 있다고 믿는 듯했다. 다음 장면, 다음 대사, 다음 결말. 하지만 지혜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아니, 준비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무대 뒤에서 대본을 손에 쥔 채 시간을 끄는 배우처럼, 스스로의 대사를 잊어버린 상태였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이 혼란은 기어코 지혜를 드라마 속 인물로 만들어버렸다. 단지 대본에 적히지 않은 표정을 짓고, 감독이 없는 무대에서 카메라가 자신을 따라다닐 뿐이었다.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지만, 시간은 댓글 창의 스크롤 속에 붙잡혀 있었다. 창을 닫는 순간, 사람들이 함께 사라질 것만 같았다.
지혜는 밤을 지나 새벽까지 화면을 켠 채 앉아 있었다. 알림은 쉴 새 없이 쌓였고, 화면 위 붉은 숫자는 초 단위로 바뀌었다. 몇 개를 열어보았다. 욕설이 있었고, 격한 동의의 말도 있었다. 엉뚱한 제안도 있었다. 대부분은 등을 두드리는 응원이었지만, 어떤 문장은 묘하게 살이 붙어 있었다. 읽다 보면 문장 너머에서 가벼운 호흡이 전해졌다. 실제일 수도, 아니면 새벽의 조용한 공기가 만들어낸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 속에서 하나, 유난히 길게 늘어진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프로필 사진은 작고 흐릿했지만, 이름 옆에는 작은 파란색 표식이 붙어 있었다. ‘시장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첫 문장은 진지했다.
“우리 시의 시민 한 분이 불쾌한 일을 겪게 해서 정말 송구합니다. 이 도시를 대표해 사과드립니다.”
누군가가 만든 장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스크롤을 내릴수록 문장은 길어졌고, 불필요한 비문 하나 없었다. 단어들은 차가운 물속 조개처럼 깔끔하게 자리 잡았다. 오랫동안 정치인의 손끝에서 다듬어진 문장처럼 느껴졌다.
지혜는 잠시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화면이 꺼지자 방 안은 한 톤 어두워졌다. ‘진짜일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곧바로 이름을 검색창에 넣었다. 공식 프로필이 떴다. 얼굴, 이력, 비슷한 형식의 보도자료들까지. 마지막으로 링크를 눌렀다. 계정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 순간,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새벽 1시 48분, 그때 보낸 사과문. ‘이 시간에?’
비로소 지혜는 문장 하나하나가 오래 물에 담가둔 나무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그 시간의 진중함이 마음을 두드렸다.
답장을 보냈다.
“괜찮습니다. 저도 모든 가게나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더 좋은 모습을 알리고 싶습니다.”
전송 버튼을 누른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새 알림이 떴다. 화면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곧장 답이 왔다.
“혹시 다시 방문하실 기회가 있다면, 이번에는 다른 좋은 모습도 경험해보시길 바랍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몇 군데 추천드릴 수도 있습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자랑이나 과장은 느껴지지 않았다. 겸손한 어투였지만, 도시의 체면과 자존심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예의는 바르지만, 동시에 엄중한 경고와 함께 건네는 초대장 같았다. 그 순간 지혜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어쩌면 사람들이 모르는 도시의 속살을, 자신만을 위해 열어보이겠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고. 이런 제안은 흔히 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혜는 굳이 서두르지 않았다. 며칠 후에 연락드리겠다는 짧은 문장을 전송했다. 대화창은 닫혔지만, 머릿속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단순한 친절이나 예의가 아니었다. 상황의 흐름을 자신의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가슴 한쪽이 미묘하게 부풀었다. 어쩌면 행운을 넘어선 기회를 잡을 순간. 무대의 막은 오르지 않았지만, 조명이 어느 쪽을 향할지 지혜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도 의도대로 기록할 수 있고, 편집할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각색도 가능했다.
문득 그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물밑의 교류를 이야기로 엮어낸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대중은 결말을 기다리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은 계산 따위 모르는 대인배처럼 보일 수 있다.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한 그릇의 음식에 간을 조금 더하는 정도. 그렇게 하면 맛이 더 오래 입안에 남는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묘하게 낯설었다. 계획과 기대, 그리고 약간의 흥분이 섞인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