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가 막바지에 이르자 모두를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마지막 과제는 비즈니스 모델 개발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엇인가를 만들고, 그것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일. 수진의 팀은 구두 수선과 제작이 밀집한 전통 골목을 사례지로 택했다. 이곳은 수십 년 동안 수제 구두 산업의 기술과 경험이 축적되어 왔지만, 현대적 관리와 디지털 유통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다. 팀은 이 오래된 구조 속에서 산업적·경제적 확장 가능성을 발견했다.
민형은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흩어져 있는 상점과 기능을 묶어, 전국 단위로 고객을 확보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가 구상한 모델은 ‘수제 구두 맞춤·수선 구독 플랫폼’이었다. 재단·수선·청소·보관 등 골목 내 흩어져 있던 기능을 묶어 구독형 패키지로 제공하고, 이를 앱으로 예약·정산할 수 있게 한다. 실제 제작과 수선은 골목 내 장인과 점포가 담당하고, 접수·상담·회수는 큐레이터 역할의 배달원이 처리한다. 자재 공급과 협력 장인 네트워크를 클러스터로 연결하면, 맞춤 제작·수선 산업 생태계가 지역 안에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이 구조의 핵심은 시장 확장이다. 골목 주민만으로는 수요가 제한적이지만, 앱 기반 플랫폼을 통해 전국 고객을 연결하면 전통 기술과 수제 산업이 전국 단위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골목은 단순한 상점의 집합이 아니라, 맞춤 제작·수선·자재 공급·배송을 포괄하는 산업 클러스터가 되고, 관련 일자리와 산업까지 지역에서 창출된다.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라, 전통과 현대 기술이 결합한 지속 가능한 지역 산업 모델을 구현하는 셈이다.
오전 10시. 팀원들은 현장에 모였다. 지혜와 민형은 점포 리서치를 맡았다. 평수, 운영 시간, 취급 품목, 회전률을 기록하고, 업주들과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수진은 잠재적인 고객군을 조사했다. 인근 거주자, 공유오피스 근무자, 연남이나 왕십리에서 유입되는 유동 고객층을 대상으로 간이 인터뷰와 니즈 조사를 진행했다.
이든은 수요예측 모델링을 맡았다. 지난 3년간 포털에서의 지역 검색량, 오프라인 수선업 매출 자료, 유사 서비스의 고객 이탈률 등을 분석해, 6개월간의 예측치를 도출했다. 수진은 사용자 여정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고객이 바지 기장을 줄이고 싶다고 가정했을 때, 모바일 앱에서 주문을 넣고, 전동 킥보드를 탄 큐레이터가 수거를 오며, 이틀 뒤 가공된 의류가 반납되는 일련의 과정. 그 동선을 그림과 단어로 조율해나갔다.
실험은 작고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골목 입구에 팝업 부스를 설치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제품 앱과 큐레이션 키트를 설명했다. 무카페인 드립백은 사은품처럼 제공됐고, 독립출판물은 브랜드 톤을 전달하기 위한 소품이었다. 관심을 보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부스가 설치되고 30분쯤 지났을 무렵, 근처 수선점을 운영하던 중년 남성이 다가와 테이블을 훑어보더니, 짧게 내뱉었다.
“이거 뭐하는 겁니까, 지금?”
그 말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이미 결론이 난 항의였다.
민형이 얼어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저희는 그냥… 과제 때문에—”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상인의 목소리가 냅다 끼어들었다.
“당신들 우리 뭐 하는지 보러 나온 거죠? 젊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사진 찍고 다니더니, 결국 이거 하려고 왔네. 우리 사장님들 뭐 하시나 확인해보고… 과제 뭐요? 이런 게 폭력이야. 이렇게 몰래 보고, 자료 삼고… 그게요. 우리 일터가 댁네 실습장입니까?”
민형이 얼떨떨한 얼굴로 한 발 물러섰다.
“아뇨, 그런 게 전혀 아니고요… 진짜 죄송합니다. 저희 그냥— 그냥 이 동네 분위기 같은 거… 알고 싶어서…”
다른 상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또 누가 시켜서 나온 거죠? 요즘 애들 다 이런 식으로 보고서 쓰고 나중에 임대료 올리고 나가라 하고… 다 해봤어요, 그런 거.”
“우리 뭐 하는지 보러 왔죠? 조사요? 어디서 시켜서 나온 거예요? 진짜 나가요. 지금이라도.”
민형이 다시 말하려다 멈췄다. 입술만 뻐끔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죄송합니다.”
수진은 눈을 피했다. 누가 잘못한 건지 애매했지만, 잘못된 상황이라는 건 확실했다. 격해지는 목소리가 동네를 채워갔다. 골목 안쪽에서 누군가 “사진 찍지 마!”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누가 먼저 카메라를 들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팀원들은 쩔쩔매기 시작했다.
“과제입니다.”
“수업의 일환이고요.”
“현장 반응만 보려고요.”
말들이 엉키듯 겹쳤다. 논리보다는 방어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변명이 되지 못하는 단편들이 허둥지둥 흘러나왔다.
누군가는 서류를 꺼내 들고 승이서를 찾기 시작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만 접자”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렇게 말 쉽게 하지 마요.”
한 상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하루 열고 버티는 게 어떤 건지 당신들이 알아요? 이 동네가 그냥 놀이터로 보입니까?”
말이 뚝 끊겼다. 순간, 공기가 납처럼 무거워졌다.
그때, 이든이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말없이 상인 앞에 섰고, 부스의 그림자가 그의 어깨 위로 드리웠다. 그는 짧게 숨을 들이켠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절차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물건을 팔려는 건 아니었고, 누군가를 조사하거나 보고하려는 목적도 아닙니다. 단지 현장 실습 중이었는데… 불편하셨다면 지금 바로 철수하겠습니다.”
그는 한 박자 정도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근데, 사장님.”
고개를 아주 살짝 기울이더니,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화를 내세요?”
그 말은 조용했고, 단단했다. 방어도 공격도 아닌 단호함이었다. 하나의 물음표였지만 경고였다. 상인은 아무 대답 없이 그를 잠시 바라봤다. 누가 봐도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화를 꺾기보다는, 그 화가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태도였다. 수진은 멀리서 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손가락으로 빈칸을 정확히 짚어낸 것 같은 순간 같았다. 사람마다 사연이 붙어 있었고, 그날은 유난히 그것들이 잘 보였다.
상황이 정리 된 듯 그는 다른 팀원들을 돌아보며 짧게 말했다. “일단 다 걷죠.”
팀원들은 체념한 듯 부스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드립백을 수거하고, 인쇄물을 가방에 넣고, 접이식 테이블을 접었다. 조용한 해산이었다. 이든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상대방이 어느 정도 감정이 가라앉았다고 판단되었을 때, 그제야 부스 바닥에 남은 테이프를 떼어내기 시작했다. 손끝은 특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건 문제를 해결한 것도 상황을 감춘 것도 아닌 지켜야할 선을 그어주는 행동에 가까웠다. 이건 수업이고, 과제고, 실제 영업이 아니라는 말보다, 누군가 직접 고개를 숙이고 먼저 그 자리에 발을 들이는 것이 상황을 더 빨리 이해시키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이 프로젝트는 애초의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스를 철수한 직후 팀은 다시 모였다. 사람들의 표정에는 일종의 얼룩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예기치 않게 맞은 파편자국이었다. 민형이 마른 입술을 다물고, 흰 칠판 앞에 섰다. 손에는 검은 마커가 들려 있었다. 천천히 선을 긋고, 작은 글씨로 비즈니스 모델 캔버스를 다시 그려나갔다. 고객 세그먼트, 가치제안, 채널, 관계, 수익원, 자원, 활동, 파트너, 비용 구조. 몇몇 항목은 어색할 정도로 빠르게 채워졌다.
회의는 조용히 지나갔다. 몇 마디 말이 오갔지만, 대개는 바닥을 스치듯 흐르다 멈췄다. 마커 펜 하나가 책상 위에 굴러 있었고, 뚜껑은 어딘가 사라진 채였다. 잉크는 천천히 마르고 있었다.
민형이 거의 들리지 않게 말했다.
"이런 식이면 안 되는 거겠죠."
누구도 대꾸하진 않았다. 이든은 팔짱을 낀 채 칠판을 바라봤다. 칸이 나눠진 비즈니스 모델 캔버스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 위에 적어둔 몇몇 단어는 이제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선택한 방식이 문제였던 거죠. 그냥 장사하러 나온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그 말은 틀린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전부를 설명하지도 못했다. 애초에 잘못된 계획이었는지, 단순히 소통의 실패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냥… 우리가 뭘 하려는 건지, 왜 여기서 이런 걸 하고 있는 건지, 설명이 안 된 거예요.” 수진의 목소리였다.
처음에 팀원들은 각자 무엇을 하려 했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기들끼리만 유효한 언어였다. 바지 수선을 어떻게 큐레이션할지, 수선소를 어떻게 묶을지, 회수와 배달을 누가 담당할지. 그런 것들은 도면 위에서만 가능했고, 골목 안에서는 작동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묻지 않았다. 대신 쏘아붙였다. “왜 남의 장사 터에서 이러냐고, 장난하냐”며. “그냥 나가달라”고.
수진은 그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낯선 사람들이 와서 무언가를 하려는 걸 봤고, 그것이 실제로 위협이든 아니든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문제가 시작부터 있었던 것 같았다. 최소한 누군가가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할 거라고 설명을 했어야 했다. 아니, 설명이라는 말조차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설득도 이해도 아니고, 그냥 아주 짧은 공감. 우린 침략자가 아니라는 그 말만 있었어도 결과는 조금 다를 수 있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팀은 철수하고 말았다. 부스를 접었고, 설문지도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다. 누가 잘못했는지 무엇이 잘못된 건지도 애매했다. 실패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상태인지도 불분명 했다. 그 경계는 생각보다 구분하기 어려웠다. ‘작동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작동하기 전에 멈춘 것’이었다. 그래서 그 무엇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수진이 한숨을 크게 내쉬며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 진짜 이게 뭔가요? 우리 뭐 하는 건지 제대로 설명도 안 하고, 왜 이렇게 되는 건데?”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카로웠다. “이러고 나서 누가 제대로 이해하겠어요? 상인들한테 우리가 뭘 하려는지 말도 안 했는데, 당연히 오해가 생기죠.”
이든이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건 우리가 잘못한 부분도 있어요. 하지만 너무 쉽게 쫓겨나는 건…”
“그냥 쫓겨난 게 아니라, 우리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거잖아요!” 수진이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시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는 거죠. 설명이 부족했고, 그걸 보완할 방법을 찾아야 해요.” 조심스러운 민형이었다.
“그럼 그걸 미리 했어야죠.” 수진은 뾰족하게 말했다. “우리가 왜 그 자리에서 막힌 건지, 왜 오해받는 건지 좀 솔직하게 마주해야 한다고요.”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고, 누군가는 눈을 피했다. 수진은 숨을 고르며 자리에 앉았다. “이런 게 다 힘들지만, 숨기면 아무것도 못 바뀌어요. 우리가 제대로 얘기해야 해요. 불편하더라도.” 수진이 목소리는 신경질적으로 높았다. 그래서인지 모두가 눈치를 살폈다. 그때 지혜가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지혜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수진 씨, 좀 심한 거 아니에요? 처음부터 아무도 그런 얘기 꺼내지 않았잖아요. 우리 모두 당황했고, 누구나 그런 상황에선 침착하기 어려워요. 갑자기 ‘왜 설명 안 했냐’고 남 탓하는 게 솔직히 그건 아니잖아요. 누구 책임인지 따지기 전에,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게 먼저 아닌가요?”
수진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반성하자고 하잖아요. 자꾸 둘러대고 피해 다니면 또 갑작스러운 일에 우왕좌왕하다 말건가요?”
민형이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누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지혜 편을 드는 것이었다.
“다들 그만 좀 하죠. 서로 공격하는 거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요.”
“공격이라니요? 이게 공격이에요?”
수진은 짧게 웃었다. 마치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든 사람처럼. 억울함이라기보다는 어이없다는 표정에 가까웠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좀 씁쓸했고 어딘가 멀어진 느낌이었다.
수진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다. 특히,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한쪽으로 밀려나는 느낌은 너무 생소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욱 받아들이기 싫어했다.
결국 민형을 향해 터지고 말았다. 꼬투리 잡는 건 싫어했지만 구석으로 몰리는 건 더 싫었다. 그래서 반응했다. “그럼 민형 씨는 그냥 이대로 덮고 가자는 거예요?”
말끝이 약간 떨렸다.
“그래요, 좋아요. 그럼 덮어요. 덮자고요. 그런데요,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뭐 하죠? 놀러 온 건가요? 진짜로?” 그 말을 끝내고 수진은 다시 웃었다. 아까보다 짧았고, 조금 더 단정했다. 멋진 사람들이 가끔 짓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한 그 웃음이었다.
지혜는 그 웃음을 놓치지 않았다. 수진의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주 정확히 그것만을 꺼내 들며 물었다. “웃어요? 왜 웃죠? 그거 비웃는 거죠?”
수진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요?”
“아니, 그냥. 지금 그게 웃기냐고? 지금 이 상황이?”
지혜는 점점 또렷하게 감정을 전했다.
“그리고 여기에 놀러온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들 애쓰고 있는데 왜 말을 그렇게 하죠? 지금 와서 누굴 탓하고 싶은 건가요? 수진씨만 옳아요? 수진씨만 잘했냐고요?”
“그니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거 아니에요? 자기 빼고 다 무책임했다는 거. 계획도 없이, 공감도 없이, 생각도 없이, 다 같이 대충 했다는 거. 수진씨가 뭔데 누굴 나무라는데요? 수진씨. 뭐 되요?” 목소리가 점점 더 거칠고 단단해졌다. 마치 수진이 상처받아서 아팠으면 하는 것 같았다.
“그건 당신 생각이죠.” 수진의 항변도 만만치 않았다. “내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아니, 수진씨. 그런 말 했잖아요. 방금. 설명 안 했고, 준비 안 됐고, 이 상황 우린 예상 못 했고… 그게 다 우리가 멍청하다는 말이잖아.” 민형이 뛰어들었다.
이든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래 앉아 있던 사람이 갑자기 움직일 때처럼, 무릎을 한번 두드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만 좀 하지 그래.”
피로가 짙게 배어 있는 말이었다.
“지금 와서 누구 잘했나 못했나를 따져서 뭐 나오는데.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하죠. 다들 힘들잖아. 그거면 됐지”
수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나는 누구 하나 멍청하다고 말한 적 없어. 그냥 우리가—”
지혜는 수진의 말을 재빠르게 막았다. “좀 더 솔직해 질까요? 거기서 수진씨도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가만히 뒤에 서서 말도 안 하고 있었잖아! 우리가 뭘요? 설명 안 했다고? 아, 진짜. 그럼 그걸 왜 이제 와서 얘기하죠?” 지혜의 말은 노골적이었다. 수진을 혼자로 만드는데 빈틈이 없었다. “매번 그랬어요. 중간에 끼어들어 아는 척하고 남을 깎아내기 좋아하는 버릇.”
“잠깐만, 이건—. 아니 다들 왜 그래요? 적당이라는 말 몰라요? 그만해. 지금은 말을 섞을수록 더 엉킬뿐이에요.”
지혜가 한숨을 쉬며 탁자 위에 손바닥을 쳤다. 머그컵이 쓰러지고 물이 흘렀다. 수진도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뭐? 이걸로 끝내자는 거예요?” 시간 있어요? 심사는 다음 주예요. 준비 다시 못 해. 이대로라면 우린 정말 끝나요!”
수진의 말은 거의 도발에 가까웠다. 그때 이든이 테이블 한쪽을 강하게 밀었다. 접힌 삼각 POP가 바닥에 떨어졌고, 커피가 바닥으로 뚝뚝 흘렀다. 소리도 만만치 않게 집중하게 했다.
“제발요. 이제 싸울 거면 나가서 좀 싸우세요. 싫으면 그냥 빠져. 왜 끝까지 자존심 부리면서 분위기 망쳐요? 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되거든. 여기서 실패하면 진짜 막막해. 그런 감정싸움, 지금은 들어줄 여유 없어요.”
지혜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그냥 참아요? 지금 나만 감정적인 거야? 나만 열 받는 거냐고? 내가 틀려? 그리고 이든씨는 왜 반말이지?”
이든도 참지 않았다. “맞잖아. 당신들 둘이서 지금 말 끊고, 짜증내고, 화내고 있잖아. 당신들은 여유로울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그리고 처음부터 불만 있었으면 미리 얘기했어야지. 지금 와서 터트리면 뭐가 바뀌는데?”
“그만해요.”
민형이 다시 조용히 말했다.
“우리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진짜. 지금 여기서 더 싸우면, 이 팀 자체가 끝이에요.”
“아니, 그게 문제예요!”
지혜가 소리쳤다.
“왜 무조건 싸우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시작은 저 여자가 했잖아. 왜 감정 터지면 안 되는 거야? 아니 진짜, 우리가 지금 무슨 사회성 기르는 교육 받는 것도 아니고, 분위기 망쳐놓고 그 얘기도 못해?”
지혜가 말을 던진 건 거의 반사처럼 보였다. 참는 게 미덕이라는 식의 분위기가, 어떤 교양처럼 강요되는 게 그녀에겐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말투는 날카로웠지만, 그 안에는 감정 자체보다 더 오래 묵은 피로가 섞여 있었다. 참아왔던 게 터졌다. 어쩌면 그걸 터뜨릴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게 먼저 지친 얼굴이었다.
민형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였지만 눈을 감지는 않았다. 손끝이 가만히 떨렸다. 그 순간, 말보다는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였다. 한 문장. 어떤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늘 그렇듯 말 자체보다 말을 선택한 사람이 문제였다. 지혜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숨을 들이켰고, 수진은 어깨를 조금 숙인 채 시선을 피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곤, 방 안은 일제히 감정을 숨겼다.
민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그러나 망설임 없이.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셔츠 등판은 땀에 젖어 있었고, 그의 손끝엔 어느새 핏기가 가셨다.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는 말을 붙일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때 이든이 손에 쥐고 있던 노트를 벽으로 던졌다. 힘을 주어 던진 것도 아니었다. 단념에 가까운 제스처. 바람 빠진 소리가 벽에 부딪혔고, 낙서 가득한 노트는 천천히 회전하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반응은 없었고, 눈빛만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말들이 서로 심하게 어긋났고, 감정은 방향 없이 솟았다. 피로감이 방 안에 붙었다. 누구도 타인의 입장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고, 아무도 먼저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지 않았다. 중재는 사라졌고, 말릴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다들 말리는 것을 그만둔 상태였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무너지고 있었다. 문제는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아마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가올 시간의 경계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