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조각들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실패가 아니었다.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회의는 의미를 잃었다. 말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공기만 점점 무거워졌다.
그때 수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맑게 가라앉았다. 모두가 어둠 속으로 내려앉을 때, 그녀 혼자만이 잠깐 정신을 차린 듯했다. 어쩌면 그것이, 무너짐 속에서 찾아온 짧은 명료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일종의 루시드 인터벌처럼.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 남아 있는 공기를 다 삼키려는 듯,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러고 나서 입을 열었다.
“누굴 탓하는 게 아니었어요. 그저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왜 이렇게 된 건지 누군가 말해줬으면 했던 거예요. 말하지 않고 넘어가면, 같은 자리에 계속 머무르는 것밖에 없잖아요.”
지혜는 팔짱을 풀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정말, 그렇게 말만 바꾼다고 달라졌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안에선 단단히 닫힌 문이 느껴졌다.
“중요한 건, 그 말을 어떻게 꺼냈느냐잖아요. 지금처럼 말하면, 오히려 상황만 더 꼬여요. 기분이 나쁘잖아요. 이게 대화라고 생각해요?”
잠시 숨을 고른 뒤, 지혜는 덧붙였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수진 씨 말투 불편해요. 비꼬는 것처럼 들렸어요. 이제 와서 톤을 낮춘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누구 하나 꼭 책임져야 한다는 식으로 들렸고, 그건 불공평해요. 여기 있는 사람들, 그런 식으로 몰릴 이유 없어요.”
그 말이 끝난 뒤에도 수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눈길도 마주치지 않았다.
입술은 굳어 있었고, 턱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표정은 분명했다. 자신의 말을 계속해서 왜곡하는 이유가 뭘지 궁금했다.
기분이 나쁘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오히려 보여주고 싶었다.
“모욕하려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누군가는 말을 해야 하잖아요.”
수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이 서 있었다.
“다들 입 닫고 있으니까 아무도 시작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왜 그 말투냐고 따지는 게 뭐예요? 지금 중요한 건 말투예요, 아니면 내용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젖히며 지혜를 똑바로 바라봤다. 눈빛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도 말하지 않으면서, 분위기만 보고 넘어가자는 거잖아요. 그게 더 무례한 거죠. 중요한 건 상처를 주지 않는 게 아니라, 문제를 정확히 짚는 거예요.”
수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그냥, 아무도 말을 하지 않으니까 대신 말한 거예요. 지금처럼요. 피해 다니지 말고, 제대로 얘기하자고요.”
테이블 위의 종이컵이 미세하게 떨렸다. 누군가는 다리를 흔들었고, 또 다른 이는 볼펜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 창밖과 방 안, 모두 숨을 참고 있는 듯한 정적이 흘렀다.
“여기 있는 사람 중, 우리가 왜 이렇게 됐는지 정확히 말할 수 있는 분 계세요?”
지혜는 어이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문장은 잠시 멈춰 섰고, 침묵이 방 안을 채웠다.
“보세요, 수진 씨. 아무도 말하지 않잖아요. 말하면 불편하니까요. 때로는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요. 그게 어렵나요? 못 참겠나요? 사람들이 진짜로 몰라서 지금 이러는 건가요?”
지혜의 시선은 여전히 가늘게 떠진 채 수진을 향했다. 얼어붙은 강 위를 조심스레 내딛는 첫 발자국처럼, 팽팽하고 단정하며 차가웠다. 하지만 수진은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사과할 수 있어요.”
수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말끝에 잠깐의 숨을 머금고, 덧붙였다.
“제 말투가 불편했다면, 그건 제 책임이에요.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수진이 물러섰다. 그 순간 민형이 컵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딸각하고 소리가 났다. 컵과 테이블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마치 마침표를 찍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긴장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테이블 아래서 발이 교차했고, 손가락들은 자꾸만 팔짱을 풀었다가 다시 꼬았다. 그 순간, 지혜는 이렇게 끝내기 싫다는 듯 말을 이었다. 지혜를 말리거나 개입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하지만 불편함이 숨겨지지도 않았다.
“지금 그 말이 사과예요? 틀린 말이 아니라면서요. 결국 내가 민감하게 반응한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잖아요.”
수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씀드렸어요.”
지혜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웃었다. 그 웃음은 조롱보다 조용했고, 대신 더 서늘했다.
“근데 늘 그래요. 처음엔 사과한다면서, 결국은 자기가 맞다는 얘기로 끝나요. 그런 식이면 아무도 진짜 얘기 못 하죠.”
“그럼 아무 말도 하지 말까요?”
수진이 날을 세웠다.
“애초에 그날 상인들하고 충돌 났을 때 아무도 입 안 떼셨잖아요. 그 자리에서 제가 말 안 했으면 아무도 설명 안 하셨겠죠.”
지혜의 목소리가 낮게 흔들렸다.
“그걸 자랑처럼 말해요? 그걸로 사람들 앞에서 팀원들을 깎아내렸잖아요.”
“깎아내린 게 아니라, 설명했어요. 우리 뭘 하러 왔는지 아무도 안 말했으니까.”
상황이 점점 과해지자 민형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다 같이 다시 정리하고.”
“아뇨, 민형 선배.”
지혜가 말을 끊었다.
“지금 중요한 건, 자꾸 누가 우리한테 뭐가 부족했는지, 왜 문제였는지 훈계하듯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수진이 입을 열었다.
“훈계요? 지금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더 훈계 같아요.”
“그만해요.”
이든이 끼어들었다. 굵고 낮은 목소리에 순간 모두가 이든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서로 말이 너무 거칠어지고 있어요.”
수진이 곧바로 반박했다.
“아니요, 이게 거칠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계속 침묵하고,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참고만 있으란 말씀이세요?”
지혜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맞섰다.
“당신이 지금 상처 주는 말들을 계속하고 있다는 건 생각 안 해보셨어요?”
수진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럼, 제가 혼자 민폐라고요?”
“지금처럼 사람 기죽이는 말투, 그게 협업이에요?”
지혜의 말에는 억눌렸던 감정이 섞여 있었다.
“우린 같이 하려고 모인 거지, 강의 들으려고 온 거 아니잖아요.”
수진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기죽였다고 생각하시는 건, 본인이 스스로—”
“됐어요.”
지혜가 손을 들어올렸다.
“이건 대화 아니에요. 당신 말하는 방식, 사람을 깎아먹어요.”
수진은 이제 비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한 번 내쉬는 한숨이 그녀의 대답이었다.
그녀가 느끼기엔 이 싸움은 끝나지 않는 줄다리기 같았다. 이미 줄은 끊겼고, 이제는 단지 습관처럼 당기고 있을 뿐이었다.
민형은 테이블 위의 노트를 펴다 말았다. 그는 어떤 중립을 지키려 애썼지만, 그런 중립은 결국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의 손끝에서 펜 뚜껑이 ‘딸깍’ 하고 또 한 번 닫혔다.
이든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마치 누군가의 삶을 잘못 재생한 사람처럼, 세상과 약간 비껴선 각도로 존재했다. 왼손은 이마를 짚고 있었다. 습관이라기보다 일종의 방어 같았다. 그는 생각하는 척하며 생각을 피했고, 듣는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건 단 하나, 모든 것이 조용히 정리되는 일이었다. 잠든 사이 방 안의 먼지가 사라지듯 말끔하게. 그러나 지금의 침묵은 정리라기보다 회피에 가까웠다. 누구도 정리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뒤엎는 이도 없었다. 그저 모두가 조용히 옆 사람에게 책임을 슬쩍 떠넘기고 있을 뿐이었다.
침묵은 무겁고 뾰족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대화는 언제나 같은 자리로 돌아왔다. 같은 말, 같은 표정, 같은 구조. 다만 한 바퀴 돌 때마다 모두가 조금씩 더 지쳐가고, 더 무관심해졌다. 그것은 상처보다 느리고, 훨씬 오래가는 소진이었다.
수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움직임은 결심이라기보다 탈출에 가까웠다.
“그게 편하신 거네요.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그녀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말을 더하는 순간, 다시 같은 자리로 되돌아올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마음을 정한 사람처럼, 지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든이 칠판 앞으로 가서 단어 하나를 지웠다. 누구도 그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보지 않았다. 그것이 ‘큐레이션’이든 ‘중개자’든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것이 사라졌다는 사실뿐이었다.
그 순간 방 안은 아주 잠깐, 시간 없는 공간이 되었다. 말도, 감정도, 위치도 멈췄다.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이미 서로로부터 멀리 밀려나 있었다.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 달라져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떴다.
불이 켜지기엔 아직 밝은 이른 시간이었다. 골목엔 문이 닫힌 가게들이 있었다. 간판 아래 걸린 셔터가 반쯤 내려앉은 채 골목을 따라 반복됐다. 한때는 퇴근길 사람들로 붐볐을 법한 자리였지만, 지금은 발자국 하나 없이 공기가 가볍게 울렸다. 누군가 삶을 접듯 천천히 불을 끄고, 문을 닫고, 간판을 빼낸 흔적들. 어둠이 오기도 전에 거리가 먼저 잠드는 풍경은 이상하리만큼 단정했다.
수진은 그 정적 속을 걸었다. 아까 봤던 구두 수선 노인이 떠올랐다. 라디오를 배경으로 바늘을 움직이던 손, 오래 쌓인 기술과 꾸준함이 아주 익숙하게 흔들리던 순간. 그 손끝에서만 세상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아주 작은 섬일지도 몰랐다.
쉽지 않았다. 감도 잡히지 않았다. 경험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문턱 밖에 서 있는 것뿐이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쉽게 현장 체험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동물원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관객과 다르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듯 보이지만, 닿지 못하는 자리. 이해가 아닌 구경에 머무르는 거리.
딱 오늘이 그랬다. 멀리서 보면 열정적인 사람들의 진지한 대화. 그러나 안쪽에서는 서로 함께 하기에는 사실을 증명하는 순간. 그 자리가 파했을 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포근하기까지 한 이 어스름 속에서 각자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변화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부드럽게 비어가거나 지나가고 있었다.
사업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다. 참고할 만한 모델도 있었고, 구도 역시 설득력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설명하지 못했다. 전달하지도 못했다. 아니,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실패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누구의 잘못이라 단정할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다. 그런 실패도 있다는 사실을, 수진은 조금씩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킥보드가 골목을 스쳐 지나갔다. 종이봉투를 단단히 묶은 가방이 덜컹거리며 멀어져 갔다. 어딘가 언밸런스했다. 이제 사람들은 걸을 필요가 없었다. 무엇이든 주문하면 되었고, 감정조차 목소리가 아니라 타이핑으로만 이어지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게 변화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확실한 건, 살아온 사람들과 살아갈 사람들 사이에 분명 다른 삶의 형태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건 그저 감이었다. 어떤 근거도, 증명도 없는. 다만 몸으로 느껴지는 온전한 감각이었다. 멍하게 걷고 있을 때 공터에 앉아있는 이든이 보였다.
다가가면서도 멈칫하고, 멈칫하면서도 다시 다가가는 — 그런 부자연스러운 보폭이 일정하게 반복되었다. 이든은 시선을 떨군 채였다. 오히려 그런 조심스러움이 그의 존재를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말 한마디 없었다. 움직임은 느렸지만 확실했다. 수진은 알 수 있었다. 이든도 자신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그러나 그는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마침내 발소리가 그의 앞에서 멈췄다. 어정쩡하게 선 채,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한 기운이 흘렀다. 이든의 시선이 흔들렸다. 머쓱하게 눈을 피했지만, 이미 늦었다. 둘의 표정에는 놀란 기색이 스쳤다가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덮였다. 들킨 사람의 반응 같았다.
“...어, 여기 계셨네요.”
그 틈을 타 수진이 멋쩍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작았다. 일종의 위안처럼 들렸다.
이든은 고개를 숙인 채 땅을 응시했다.
“네.”
짧은 대답이었다. 반가움도 불쾌함도 없었다.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감정이 묻어나는 순간이었다. 수진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디에 앉을지 망설이는 사람처럼. 몇 초쯤 그렇게 있다가, 옆 벤치에 조심스레 앉았다. 동작은 느렸고, 몸짓에는 자신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의 감정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며 말을 꺼냈다.
“그냥... 걷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어요.”
이든은 말이 없었다. 어쩌면 그 말을 믿었는지도, 어쩌면 거짓이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진은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왠지 지금은 더 말이 없고, 더 무표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표정을 감추는 법을 익힌 사람 같았다. 하지만 침묵 안에 감정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다만 이든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아까 말이에요…”
수진이 먼저 말했다.
이든은 그제야 그녀를 바라봤다.
“서로 좀 심했죠.”
말을 꺼내놓았지만 이어갈 자신은 없었다. 다시 입술을 다물었다.
이든은 고개를 살짝 돌려 다시 허공을 봤다. 정확하게 어디를 보고 있는지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그의 눈에는 이야기들이 채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요. 근데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요.”
“왜요?”
“우린 다들 다른 이유로 여기에 있고, 다른 방식으로 뭔가 버티고 있고… 그런 사람들이 한 프로젝트로 묶여 있으면, 언젠가는 터지죠. 익숙해요. 결국 그렇게 되는...”
수진은 이든이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래도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누군가 근처 공터에 떨어뜨린 물병이 철퍽 하는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 소리가 둘의 대화를 끊었다.
서로에게 집중하기에는 뭔가 공통의 주제를 찾기 어려웠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그만큼 겹쳐진 부분이 미세했다.
“전에 살던 곳에선, 그냥 조용히 하면 다들 괜찮아 했어요. 눈에 띄지 않고, 말도 많이 하지 않고, 그렇게 버티면 됐죠.”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근데 여긴, 그게 잘 안 되네요. 말을 해야 하고,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래서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이든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대꾸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말들이 마음에 조용히 내려앉긴 했다.
“전…”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전 사실 이 팀이랑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너무 진지했어서 그게 좋았어요. 근대 실패를 너무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놀랐어요.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어요. 근데 지금은 어쩌면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수 있겠구나하는 생각도 들어요.”
수진은 조용히 자기 손등을 문질렀다.
“그래서 그냥, 한 번은 사과하고 싶긴 해요. 진짜로요. 내가 너무 내 방식대로만 굴었던 것 같아서. 굳이 그렇게 나서는 태도는 저도 좋아하지 않거든요.”
이든은 숨을 한번 길게 내쉬었다.
그건 무슨 대단한 용서도 아니고, 다짐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속의 탁한 공기를 빼내는 행동에 가까웠다.
“그런 거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근데… 이걸 다시 한다고 해도, 달라질까요?”
“모르죠.”
“그럼 왜 해요?”
이든은 공터 한가운데 굴러다니던 축구공을 가리켰다. 모양이 버려진 건 아닌 것 같았다. 누군가 실수로 놓고 갔을 것이다. 버릴 만큼 낡지 않았다. 이든은 이 공터에 왔을때부터 계속 축구공을 보고 있었다.
“누가 저 공을 찾아갈진 모르지만, 꼭 주인이 찾아갔으면 좋겠네요. 그거면 충분할 때도 있잖아요.”
“축구공이요? 무슨— 아, 저기 축구공이 있네요.”
수진은 불쑥 튀어나온 단어가 괜히 반가웠다. 그 말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공터 한가운데 굴러다니는 축구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얼마 전의 기억이 스쳤다. 수진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든이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때 수진은 그의 얼굴이 왜 낯설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기억의 조각 하나가 맞춰진 듯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축구공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저 생각났어요. 축구선수셨죠?”
이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요.”
그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짧은 대답 뒤로 남은 침묵이 이미 많은 걸 말해주고 있었다.
수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오래된 기억을 더듬듯 말했다.
“아, 저… 축구 팬이에요. 서울 팬. 어릴 때부터요. 경기 자주 갔어요.”
이든은 무겁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씁쓸하게 웃었다. 팬이라면, 어릴 때부터 팬이라면 알 수도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어떤 기사가 그 이름을 헤드라인에 올렸는지. 이든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수진도 왜 그런지 이미 알았다.
“그랬군요.”
짧은 대답이었다. 목소리에는 방어도, 해명도, 변명도 없었다. 마치 오래된 벌을 다시 한 번 받아들이듯, 무력하게 내려놓은 기색이었다.
수진은 말이 점점 빨라졌다. 하지만 조심스러웠다.
“아빠가 데려갔어요. 가족들과 원정도 다녔어요. 안 가본 경기장이 없어요. 그래서 그냥 축구는 제 삶의 한 부분 같아요. 내 인생에서 축구를 빼버리면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
이든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듣고만 있었다. 축구가 누군가에겐 가족의 추억이자 삶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지금의 그에게는 더 큰 아이러니처럼 다가왔다. 자신에게 남은 건 무너진 경력과 이름뿐인데, 그녀는 아직 자신의 기억을 반짝이며 말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응원하는 재미였거든요. 북 치고, 다 같이 노래 부르고. 근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진짜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막상 경기 시작하면, 선수들보다 팬들이 더 절박한 느낌이랄까. 지면 하루 종일 기분 안 좋고, 이기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근데 이게 너무 웃겼어요. 그게 머라고. 누가 월급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좋아하는 거잖아요. 돈은 선수들이 벌고 우리는 돈쓰고 스트레스 받고”
이든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숨길 게 없다는 듯, 그저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 네가 아는 그대로야. 그게 나였고,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야.’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는 그 무엇도 꺼내놓지 못했다.
그녀는 괜히 웃음을 흘리며, 말을 멈췄다.
“아, 죄송해요. 너무 갑자기 말 많았죠…?”
이든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수진은 자신이 너무 말을 많이 한 건 아닐까 싶어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딱히 나쁘지 않다는 걸 눈치 채곤 다시 말을 이었다.
“특히 N석에서 응원할 때요. 다 같이 뛰고, 소리 지르고, 땀범벅 되고, 그렇게 소리 지르다 보면요… 무슨 정화되는 느낌? 그런 게 있어요. 되게 뭐랄까. 카타르시스요. 딱 그 단어 같아요.”
이든은 고개를 아주 조금,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끄덕였다. 마치 말이라는 건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려 나오는 것처럼 잠시 침묵했다.
수진은 그 침묵이 그냥 공백이 아니라, 뭔가 무겁게 눌린 시간 같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덧붙였다.
“…아, 죄송해요. 선수였던 분 앞에서 제가 너무 가볍게 말했죠? 그냥 팬 입장에서 느낀 걸 떠든 거라… 선수는 다르죠?”
그녀는 행복한 듯 작게 웃었다.
“근데, 그거 알아요? 사실 선수들이 가슴에 달린 마크가 심장 위에 있잖아요. 골을 넣고 그걸 꽉 잡은 채 우리 쪽으로 달려올 때면 나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요. 그땐 아무 생각도 안 나요. 그 순간만큼은 세상하고 하나가 된 느낌이에요. 마치 세상 전체가 하나로 이어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버리죠.”
“근데 그게 너무 짧아요. 그 한순간이요. 그래도 그 짧은 해방감 덕분에 우리도 숨통이 트여요. 그래서일까요, 어느 순간부터 그걸 기다리게 됐어요. 도파민 중독자처럼요.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에요.”
이든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말을 이어가야 할지, 그만둬야 할지 잠시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수진의 말을 받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것은 배려라기보다는, 어쩌면 수진이 가진 기류에 자연스레 끌린 결과였다. 사람들은 쉽게 그녀의 말을 흘려듣지 못했다. 그녀의 말에는 꾸밈없는 감정이 묻어 있었고, 그 진심이 대화를 묘하게 단단하게 만들었다. 싸움을 해도 그건 비슷했다. 감정이 부딪히면, 오히려 더 깊이 들어가는 쪽으로 흘러갔다. 마치 서로의 안쪽을 더 잘 보기라도 하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나는… 축구를 할 때면 공보다 사람이나 공간이 먼저 보여요. 누가 빈 공간을 만들었는지, 누가 두 박자 늦게 따라갔는지. 공이 움직이기 전에, 사람부터 움직이는 순간이 있거든요.”
그는 잠시 기억을 꺼내 듯 말을 멈췄다.
“어떤 코치님은 공을 보고 반응하라고도 하지만, 나는 사람을 봤어요. 내 생각에 수비는 늘 먼저 움직여야 하니까요. 늦게 반응하면 이미 다 지나가버리니까. 그래서 계속 상상하고 또 상상했어요. 그렇게 반복하다보니 이상하게 몸이 먼저 기억하더라고요. 근데 나중에 깨닫게 된 건 그 코치님의 말이나 제가 하려던 축구나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었어요. 말은 다른데 의미가 같았어요. 그게 참 묘했어요.”
어느 순간 그의 말은 독백이 되었다. 수진에게 설명한다기보다, 스스로에게 확인하듯이. 조용하고, 단단한 어조였다. 그러다가 이든이 피식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웃음에 가까운 근육의 움직임에 가까웠다. 그래도 수진의 입장에선 오늘 처음 본 미소였다.
“집중이 가증 중요하죠. 결국엔 거기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나요. 그래서 경기하다보면 사실 그게 제일 어려워요. 집중하는 거. 그걸 계속 유지하는 거. 그래서 경기 끝나면 몸보다 정신이 더 피곤할 때가 있어요.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다 쏟아버린 느낌이 들때요.”
“알아요. 그 마음. 진짜,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지면 괜히 내가 뭘 잘못한 것 같은 기분 들죠. 선수 마음을 안다는건 아니었어요. 죄송해요.”
그 순간 수진은 갑자기 뭔가가 머릿속에서 툭,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수진은 말을 멈추고, 한참동안 이든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이든의 옆얼굴을. 가로등 빛이 거의 수평으로 기울어 있었고, 벤치 끝에 앉은 그의 턱 선에만 옅게 닿았다. 수진은 선명하지 않은 윤곽에 시선을 멈췄다. 그 순간 정말 낯익은 그의 얼굴이 불쑥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자신을 숨기고 싶었지만 그리 주의 깊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삶은 자신보다 더 지루하고 피곤했을지도 모른다.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시간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다. 그래서인지 지금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차갑게 변해버렸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별히 궁금해 할 필요는 없었다. 눈앞의 사람은 그저 ‘이든 씨’일 뿐이니까.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단순한 거리두기야말로 오히려 관계를 오래 유지하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마음도 있었다. 한때 무척이나 좋아했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우연히 다시 펼쳐 본 느낌이었다. 문장을 따라가다 문득 “아, 맞아, 이 장면” 하고 중얼거리게 되는 그런 순간처럼. 수진은 몸을 아주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이든은 여전히 말없이 앉아 있었고, 그 얼굴은 반쯤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
“...잠깐만요.”
그녀가 무언가 결심한 듯, 갑자기 말을 꺼냈다.
이든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표정도 바뀌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침묵 속에서 분명히 느꼈다. 그가 이 모든 걸 이미 겪었고, 충분히 익숙하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어쩌면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이 조용히 넘기고 있다는 것.
수진은 입술을 한 번 다물고, 손끝을 무릎 위로 모은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공터에는 바람이 잠깐 멈춘 듯했고, 벤치 아래 흙먼지는 햇빛을 받아 느리게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이든은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마치 그 이름을 처음 듣는 것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수진의 눈동자는 놀라움과 어떤 낭패 같은 감정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말해요.”
그는 짧게 말했다. 어떤 말을 해도 괜찮다는 것 같았다.
그 말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눌려 있던 기억들을 조용히 풀어놓았다. 그녀가 경기장에서, N석 한복판에서, 목이 쉬도록 응원하던 시절. 그라운드 저 멀리, 중앙에서 허리를 굽힌 채 공을 따라가던 누군가의 실루엣. 그리고 그가 예상보다도 빠르게 경기장 밖으로 사라졌을 때 느꼈던 묘한 상실감.
그게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그녀를 벅차게 만들었다.
그녀는 갑자기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그건 감정을 삼키는 숨이었다. 말로 꺼내면 무너질 것 같은 감정들.
“저 사실 진짜 너무 궁금한 게 있었어요.”
그녀는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이든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대꾸 없이 그녀를 기다렸다. 그리 불편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진의 조심스러운 모습에 아주 작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섰다. 그것은 누군가의 오래된 기억 속에서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받는 사람의 미소였다.
“그때 정말…전 이든 선수가 우리 팀에 오길 바랐어요.”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말했다. 질문이 아니었지만 질문이었다. 왜 오지 않았냐는.
이든은 시선을 될 수 있으면 멀리 흘렸다.
“오보였어요. 나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리고 당시 분위기상 서울로 가는 게 쉽지 않았어요. 제가 갓 입단했을 때이기도 했고, 나름 전 유소년 출신이었어요. 짧았지만 제 축구인생의 시작과 끝이잖아요. 어린 시절이 추억을 쉽게 버릴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땐 그 무엇보다 우리팀, 내팀은 정해져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저랑 같은 포지션의 선배가 있었고요. 기억하시려나 모르겠는데, 국대급 선수였고, 저는 경쟁해야 했어요. 그 무렵 서울에서 연락이 왔어요. 출전 시간과 주전 보장을 조건으로 제안을 했던 건 맞아요. 고민했지만 결국 거절했어요. 그런데도 기사가 나간 거죠. 잘못 알려진 거예요. 그때 에이전시 담당했던 형이 술자리에서 흘린 소리가 와전 된거였어요. 하필 그 자리에 기자가 있었어. 그래서 완전히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닌데 사실이 아니었죠.”
이든의 목소리는 아쉬움이라기 보단, 그냥 있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이 지닌 단단한 어조였다.
수진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근데… 왜 축구선수였다고 말 안 했어요? 우리, 그래도 한팀으로 꽤나 함께 하고 있었는데.”
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잠시 후, 그런 말을 했다.
“축구 얘기하면 자꾸 예전 생각이 나서요. 그러면, 다시 돌아가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때 그 벤치, 그 재활 병동, 그 MRI 소리… 그리고 욕먹었던 기억. 경찰도 생각나요. 그 전 과정이 연결되어 있어서 지금도 편치는 않아요. 그러니까,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수진씨는 그때 제 기사 기억 안나요? 전...”
그 말은 가볍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입술까지 올라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 같은 말. 이든은 짧은 숨을 내쉬고 나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는 약간 내려가 있었고, 눈은 다시 멀리 흙먼지가 쌓인 구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진은 그 말에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잠깐, 아주 짧은 숨을 들이켠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판단도 없이, 대신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그러고는 말없이 그의 옆으로 이동했다. 벤치에 앉을 때 그녀의 무릎은 바닥을 조심스럽게 딛었고, 그 움직임은 잠시 주변의 바람결을 바꿔놓았다.
멀리서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퍼졌다. 바로 머리 위엔 빛이 없었고, 벤치 아래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고 부드럽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자는 무너지는 듯 하다가 또렷하게 이어졌고, 조금 뒤로 기울어 있었다. 눈으로 보고 있어도 실감이 잘 나지 않는 선들. 마치 이 둘의 감정선 같았다.
이든은 옆에 앉은 그녀를 바라봤다. 눈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지만, 표정은 살짝 느슨해졌다. 긴장을 풀면 가장 먼저 드러나는 건 안도도 아니고 웃음도 아니었다. 그냥, 표정을 굳게 만들고 있던 감정이 조용히 옆으로 빠지는 순간이 도드라지는 것이다.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공터의 축구공을 바라봤다. 먼지가 얇게 덮여 있었고, 약한 바람에 조금씩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그 순간 이든의 입술이 너무 빨갛게 보였다. 수진이 참 좋아하는 색이었다.
그 순간, 바람이 잠시 멎은 듯했다.
수진은 무릎 위에 올린 손끝을 아주 조금 옆으로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크지도, 급하지도 않았지만, 이든은 알아챘다. 벤치 위의 간격이 천천히 좁혀졌다.
가로등 빛은 멀리서만 희미하게 닿았고, 두 사람의 얼굴은 반쯤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림자보다 더 가까운 것은 서로의 숨결이었다. 한쪽이 내쉬면 곧바로 다른 쪽이 들이켰다.
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두 눈이 마주한 순간, 오래 눌러 두었던 것들이 조용히 풀렸다. 머뭇거림도, 숨겨두었던 질문도 사라졌다. 남은 건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기대는 움직임뿐이었다. 어느새 벤치 위엔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바람에 날리던 먼지는 흩어졌다가 이내 내려앉았다. 시간조차 숨을 죽인 듯, 그들은 오랫동안 아무 말 없었다. 숨을 들이쉬기에 딱 맞는 밀도로 공기가 달라졌다. 말이 없어도 괜찮은 침묵이 불편하지 않게 머무를 수 있는 온도였다. 그날, 두 사람은 오래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