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피한 수순

by inome

다음 날, 팀은 다시 모였다. 비록 겉치레였지만 갈등은 공식적으로 봉합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저 ‘합리적인 조정’이었고, 다른 누군가의 표현처럼, ‘불가피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정작 회의실에 모인 이들 사이엔 긴장으로 날카로운 적막이 느껴질 정도였다.

PD의 경고는 강렬했다.
“그래도 성과는 하나쯤 보여야 하지 않겠어요?”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단지 ‘성과’라는 단어는 모든 상황을 추상화하고, 사람을 통계로 만들고, 감정을 문장 바깥으로 내보냈다. 건조한 효율을 드러내기 위한 계산된 제스처였다.

기세에 눌린 팀원들은 어떤 이견도 없었다. 그것은 동의라기 보단, 강력한 침묵이었다. 준비 과정은 간결했으나 분위기는 무거웠다. 상인들과의 사전 통화는 수진이 맡았다. 그녀는 전화를 걸기 전에 늘 잠시 망설였다. 1초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이 그녀에게는 영원히 늘어지는 엿가락처럼 느껴졌다.

“뭐, 다시 한다고요?”
“요즘 다 힘들잖아요. 솔직히 그런 거 하면 월세만 올라요. 그러면 나중에 손님이 더 빠져요.”

상인들은 이상하리만치 부정적인 미래를 단언했다. 마치 모든 것을 이미 경험해 봤다는 듯, 더없이 뻔하다는 듯이. 그것은 인과율을 완전히 이해한 존재만이 할 수 있는 말처럼 들렸다. 그래서 설득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의 감정 상태도 좋지 않았다. 무엇인가에 화가 나 있는 듯했고 잔뜩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때론 정중했지만, 근본적으로 관심이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오랜 시간 뿌리내린 불신이었을지 모른다. 그 모든 기분이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결국 팀은 기획을 바꿨다. ‘구독경제’는 슬그머니 사라졌고, 대신 ‘로컬 큐레이션’, ‘일상 속 이야기’, ‘점포 중심 안내소’ 같은 말들이 강조되었다. 그만큼 구상의 깊이는 얇아졌다. 수진은 회의록을 정리했지만, 제대로 읽지 않았다. 그녀는 이 프로젝트가 정말 끝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끝난 건지도 몰랐다.

민형과 지혜는 시장 안쪽 골목으로 향했고, 수진은 입구 근처 몇 곳을 맡았다. 전날 밤 재정비한 피치노트가 손에 들려 있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펼쳐보지 않았다.

첫 번째 상인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예, 뭐 들어는 볼게요.”
두 번째 상인은 주의를 당부했다.
“그냥 조용히 해주시면 돼요. 손님들 안 불편하게.”
세 번째 상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단지 입간판을 보며 고개를 한 번 천천히 흔들었다.

그 반응들은 공손했지만, 철저히 비협조적이었다. 수진은 웃었지만 마지막엔 웃지 못한 채 설명했다. 말을 줄이고, 문장을 접고, 숨을 고르는 일을 반복했다. 이미 수진조차 열정이 사라진 듯했다. 벌써 지겨워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혹은 기대할 수 없을 만큼 부정적인 앞날 때문일 수도 있었다.

참여는 동의받지 못하는 단어였다. 밤새 자료조사하며 토론을 통에 얻은 관계 기반 유통은 아무에게도 필요하지 않았다. ‘현장에 가야 한다. 현장에 답이 있다. 현장은 다르다’는 말은 공허했다. 수진은 그 말이 현장은 바꿀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거대한 음모 같았다. 그들의 실패가 기정사실화 되어있는 짜인 구조. 허튼 생각이라기엔 너무 딱딱 맞아떨어졌다. 아니면 그냥 너무 오래됐고, 겉보기보다 훨씬 단단한 습관 때문 일수도 있었다. 바꾸려면 일단 분해부터 해야 하는데, 나사가 이미 녹이 슬어 있었다. 렌치를 대고 한두 번 돌려보다가, 그만둘 수밖에 없는. 더 밀어붙였다가는 나사머리가 뭉개질 것 같았다. 그러면 그땐 큰일이 되어 정말로 되돌릴 수 없게 된다.

상인들은 그게 현실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현실이라는 건 결국 도전의 연장일 뿐 바꾸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굳이 바꾸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신념의 영역이라고 해야 했다. 눈치 빠르게 지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신념은 설득되지 않는다. 이미 경험이 있었다. 논리도, 감정도 통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끝까지 손에 쥐고 놓지 않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변화는 거부된다. 그것과 맞서는 일은, 바람을 향해 삽을 드는 일과 비슷했다. 삽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바람은 베어 지지 않는다. 그래서 차라리 자기 이익을 좇는 게 훨씬 현명한 일이었다.

노력은 이미 패배한 일에 대해서 계속 설명을 붙이는 공허한 일이었다. 흐지부지하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그날 오후, 수진은 입간판 하나를 시장 벽에 기대어 놓았다. 날이 흐렸고, 골목 안쪽은 축축하게 젖은 콘크리트 냄새로 가득했다. 나무판에 얇게 출력된 설명문은 습기 때문에 모서리가 조금 말려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손끝으로 눌러 펴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손에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천천히 다시 가방 안에 넣었다. 그 과정에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마치 다음 일정으로 이동하기 위한 수순처럼 느껴졌다.

저 멀리서 민형과 지혜가 천천히 걸어왔고, 이든이 가게 유리창 너머 안쪽을 잠깐 들여다보더니 별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나직한 한숨소리가 났지만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거기엔 실망도 분노도 없었다. 단지 선을 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은 있었다. 그래도 수진은 좋았다. 이든과 조금은 각별해졌다고 생각했다.

새삼 노력을 평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성과’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민망한 일이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기엔 또 애매한 정도의 시도는 있었다. 전단지를 몇 번이 나 새로 작업했고, 상인들에게 치근대고 대차게 쫓겨나는 경험도 해봤다. 뭐 결과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지만 과정에서는 꽤 괜찮은 장면도 있었다. 지혜는 영상 클립을 짧게 잘라 SNS에 올렸고, 민형은 한 상인을 인터뷰한 1분짜리 오디오 파일을 따로 만들었다. 수진은 그것들을 조합해 ‘소개 게시물’을 하나 올렸고, 좋아요는 열여섯 개쯤 찍혔다. 이든은 마지막까지 데이터를 정리했다. “한 번은 해봤다”는 말을 남길 수 있을 정도의 양으로 충분했다.

‘공유’, ‘참여’, ‘재정비’, ‘구독’ 그런 단어들은 그럴듯했지만, 역시나 상인들도 소비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프로젝트는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누구도 정식으로 그것이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토론도 시작되지 않았다. 그냥 모두가 그 상태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앉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입간판을 거둬올지 말지에 대한 짧은 논의가 있었고, 그것이 전부였다. 모두 각자의 노트북을 닫았고, 일정표에서 해당 항목이 삭제되었다. 더 이상 새로운 알림이 오지 않았다. 그것은 문을 닫고 불을 끈 게 아니라,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던 방이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어두워진 것과 비슷했다.

지혜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어쩌면, 실패라는 건 이런 방식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 근데 진짜 생소하네요. 전 운이 참 좋은 편이었는데...”

그녀는 여전히 현실적인 구조가 아니라 상인들의 신념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자기들 입으로 말하는 현실. 실제로는 선택이라고 불러야 할 도전이었다. 변화란 역시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상대가 있어야 했다. 도전하고 성공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실패하고 무너지는 사람이 동시에 존재해야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 보면 이번엔 그 상대가 없었다. 그러니 바뀔 것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이 골목 안으로 조용히 불어왔다. 무심하고, 아주 작지만 확실한 움직임이었다. 지혜의 머리카락이 조금 흩날렸다. 특별한 장면은 아니었다. 그것을 알아채지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지혜는 그 감각이 흔들리는 것도, 휘청 이는 것도 아닌, 단지 누군가의 시선에서 빠져나온 그저 평범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아가지 않으면 이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직감.

마지막 라운드에 진출한 팀은 ‘루트서울’이었다. 이 팀은 정돈된 브랜딩과 깔끔한 프로토타입, 외부 전문가의 전략 제안까지 포함한 자료를 제출해 심사위원단을 설득했다. 그들은 도시에 흩어진 빈 건물들을 하나의 앱으로 연결하고, 문화기획자와 투자자를 매칭하는 구조를 제안했다. 발표 당일, 그들은 단정한 슈트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차분하게 브리핑을 마쳤고, 관객들의 박수는 명확하고 길었다.

무대 스크린에는 각 팀의 프로젝트 영상이 순서대로 상영되었다. ‘루트서울’의 영상이 상영되자, 객석은 숨을 죽였다. 드론으로 촬영한 도시 전경, 인터뷰, 매끄러운 자막, 역동적인 시연. 마지막엔 브랜딩 로고와 함께 “도시의 빈 공간에 당신을 초대합니다”라는 슬로건이 깔끔하게 떴다. 조명이 서서히 켜졌고, 박수가 쏟아졌다. 누군가는 벌써 협력 가능성을 문의했다.

그에 비해 수진의 팀은 발표는 조심스러웠고, 데이터는 부족했고, 추진 계획은 느슨했다. 시범 영상을 본 일부 심사위원은 대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영상은 지혜 덕분인지 아름다웠지만, 실질성이 모호했다.

“감성은 좋으나, 확장성은 부족합니다.”
“참여 방식이 불분명하네요.”

이런 말들이 회의실 벽을 부딪치며 가라앉지 않았다. 그것들은 가라앉는 대신 벽에 부딪쳐 다시 튕겨 나왔다. 마치 총탄처럼. 정확한 각도로 쏘아진 문장들은 벽과 벽 사이를 튕기며 되돌아왔고, 그 궤적은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총괄 PD는 이번 라운드에서 탈락한 팀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8개 팀이었고, 수진이 속한 팀도 그 중 하나였다. 간단한 격려와 박수가 이어졌지만, 그것은 체념과도 같았다. 다른 테이블에서는 안도의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탈락한 팀들은 모두 형식적으로 다시 모였다. 정리 모임처럼 보였다. 수진의 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종이컵에 커피를 따르다 멈췄고, 이든은 물병을 들고도 마시지 못했다. 그 순간 PD가 말했다.
“여러분이 했던 고민, 우리가 다 봤어요. 그 마음은 절대 헛되지 않아요.”

PD의 말은 헛된 위로였다. 말이 끝나자 참여자 중 절반이 짐을 챙겨 떠났다. 몇몇은 서울로 돌아갔고, 몇몇은 아예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공용 노트북도 반납되었고, 그동안 모아둔 회의록은 압축 파일로 정리됐다. 누군가가 만든 팀 로고는 쓰레기통에 반쯤 구겨져 들어갔다. 수진의 팀원들은 남았다. 이유는 저마다 달랐다. 수진은 분명했다. 실패를 한 장면이라도 더 기억하고 싶어서였다. 이틀 뒤, 쇼케이스때 자세하게 보고싶었다.

마지막 밤을 위한 루프톱 파티는 없었다. 하필 전날 저녁부터 예보된 비가 서울을 덮었다. 대신 그들이 함께 기거했던 숙소의 공유부엌에서 이별행사가 치러졌다. 평소와는 달랐다. 음악을 틀지 않았고, 주문한 피자상자와 맥주가 준비되었다. 말은 많지 않았고 간혹 들리는 웃음은 분위기와는 어긋나 있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고,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이거, 치우고 가야겠죠?" 민형이 말했다. 혼잣말인지 제안인지 애매한 어조였다. 지혜는 말없이 종이컵을 모았다. 이든은 맥주를 비우고 있었다. 수진은 노트북을 닫았다. 부엌 밖으로는 빗줄기가 얇은 커튼처럼 흘렀다. 며칠 전만 해도 서로의 아이디어를 종이에 써 붙이며 다퉜던 것이 믿기지 않았다. 지금은 종잇조각 몇 장만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글이었고, 누군가의 그림이었고, 누군가의 바람이었지만, 의미는 사라졌다.

“이제 어디 가세요? 뭐 하실 거예요?” 수진이 물었다. 말끝에 얇은 숨이 섞여 있었지만, 그 속엔 조심스러운 내일이라는 온기가 배어 있었다. 꼭 묻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둘 다 말하지 못하는 어떤 약속을 건네는 듯했다. 이든이 과감하게 잡아주면 될일이었다.

이든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의 지붕과 그 위에 걸린 전선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걸어가고 있었지만,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든은 천천히 대답했다.

“당분간은... 어딘가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아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마치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말하듯 속삭였다.
“이제는 실패가 너무 익숙해서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아요. 평생 실패만 했어요. 그걸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죠. 천천히.”

수진이 원했던 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큼 무거웠다. 뭔가 어긋나는 것 같았다. 해야 할 말이 분명했는데도 하지 못했다. 정작 예의를 차리고 있었다. “그럼요. 다음이 있을 거라고 믿어야죠. 아니면, 만들어야 할 테고요. 하지만 또 부딪힐 거예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같아요.”

지혜도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민형은 조용히 옆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기분 좋은 것도, 완전히 불편한 것도 아닌, 애매한 안도감과 희미한 불안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아마 모두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관계가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하지만 그걸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아직은 괜찮다는 듯한 공기를 서로 나누고 있었을 뿐이다.

“그럼, 단톡방은 계속 할까요?” 수진이 말을 꺼냈다. 목소리에 살짝 떨림이 묻어났다. 아주 가볍게 던졌지만, 거부하기 어려운 요구였다. ‘아직은 서로 완전히 놓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는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지혜 잠시 생각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가끔 근황도 전하고. 그리고 우리도 화해해야죠. 이제.”

수진은 고개만 끄덕일 뿐 화해에 대해 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맞아요. 완전히 끊기면, 더 멀어질 것 같으니까요.”
수진이 말하자마자 민형은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꾹꾹 눌렀다. 곧 톡에 ‘응, 좋아요.’라는 단답형의 메시지가 올려졌다.

쇼케이스는 끝났다. 박수 소리는 짧았고, 사회자의 마지막 멘트도 대충 넘겨졌다. 조명이 천천히 켜지고, 사람들은 서둘러 뒷정리하거나 누군가를 찾아 움직였다. 수진과 이든은 기둥 옆 좁은 공간에 서 있었다. 부스를 가진 팀들도 아니었고, 발표를 한 것도 아니었다. 며칠 전 탈락한 팀. 오늘은 ‘관람 가능’이라는 운영 메일을 보고 그냥 온 것이었다.

분위기는 명확했다. 관계자, 발표자, 관람자 — 그리고 그 외. 그들은 그 외였다. 부스 옆에서는 발표팀 대표가 노트북을 열어놓고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 앞에 작은 무리가 서 있었고, 명함이 오갔다. 누군가는 “저희도 공공 쪽 프로젝트 같이 해보고 싶었거든요”라고 말했다. 목소리는 또렷하고, 웃음소리는 밝았다. 수진은 손에 쥔 가방 끈을 말없이 만지작거렸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 젊은 남자, 행사 스태프인지, 아니면 어디 문화재단 관계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두 사람을 향해 반쯤 웃으며 말했다.

“혹시, 오늘 참여하신 분들이신가요?”

이든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기회 되면 연락 주세요. 요즘 이런 프로젝트도 많아져서요.”

수진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명함을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눈에 뛰지 않기 위해 최대한 정중하려 했다.

남자는 곧 다른 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저쪽에 계셨네”라고 말하며 누군가를 따라갔다. 짧은 교류, 그 정도였다.

수진이 조용히 말했다.
“왜 거짓말해요?”

이든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거짓말은 안 했어요. 그냥 가만히 있었죠.”
그는 시선을 돌려 구석에서 사람들과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저 사람이 그냥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발표 같은 건 보지도 않았을 텐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지나가며 커피컵을 떨어뜨렸다.
뚜껑이 열리며 바닥에 커피가 흩어졌고, 아무도 그걸 오래 쳐다보지 않았다.

잠시 후, 이든이 말했다.
“우리, 이제 갈까요?”
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조용히,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현장에는 여전히 밝은 조명이 있었고, 박수를 받았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이 받은 박수는 없었다. 박수를 받을 기회조차 없었으니 당연했다.

비는 며칠간 성가시게 내리다가 갑자기 멈췄다. 서울의 거리는 여전히 젖어 있었고, 곳곳에 얕은 물웅덩이가 만들어졌다. 부풀어 오른 아스팔트 위로 자동차 바퀴가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이든은 하루 종일 아무 데도 나가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약속도 없었고, 굳이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 이유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문득 어린 시절의 놀이터를 떠올렸다. 축축한 운동장, 붉게 녹슬어 있는 철봉기둥, 바람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덜컹 소리를 내는 쇠그네. 오후 다섯 시. 하늘은 흐리거나 맑거나 상관없이 균일한 색이었고, 그 시간에 그는 오로지 축구공을 바라보며 달렸다. 공이 발끝에 닿을 때마다 모래가루가 튀었고, 운동화도 그 모래에 닳아갔다. 몇 번이고 넘어지고, 웃고, 다시 뛰고. 그리고 곧 엄마의 부름이 들릴 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그 시절의 기억은 이상하게 밝게 느껴졌다. 소리도, 빛도, 냄새도. 그것은 어떤 확신이었다. 엄마한테 혼날 일을 걱정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순간.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한심스러울지 그때는 전혀 몰랐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어떤 시간 속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그 혼란스러움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렇게 말없이 있는 시간이 천천히 꾸역꾸역 흘러보내고 있었다. 그때 차라리 축구를 멈추고 조금만 더 일찍 집에 돌아갈 걸. 그것은 후회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늘 같은 시간까지 머물렀다.

프로젝트가 끝난 지 며칠이 지났지만, 민형의 머릿속은 여전히 흐릿하고 무거웠다. 서울의 여름비는 멈췄다. 하지만 그가 쓴 기획서와 중간보고서들에는 여전히 물기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손끝이 습기처럼 무거울 정도로 질척였다.

그는 계속 같은 일을 반복했다. 글자로 빽빽한 종이를 몇 장 넘기다 말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동네 맞춤형 수선 구독 서비스’. 그렇게 제목을 적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자신은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었다. 기획 단계부터 이미 반쯤은 만족해버린 태도였다.
'그게 문제였지.'

수선은 소비로부터의 탈출이자, 시간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구독이라는 구조는 그것을 시스템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을 엮으면 ‘순환경제’라는 단어 하나로 도시재생의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가장 기초적인 전제부터 틀렸다는 걸 그는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동네 수요자들이 뭘 원하는지를 전혀 몰랐어.”

노트 한 귀퉁이에 그렇게 적고 나서, 민형은 고개를 떨궜다. 주민 설문조사는 있었지만, 그건 형식이었다. 고령층 주민들은 “수선 같은 건 그냥 손으로 때우지”라고 답했고, 젊은 1인 가구들은 “차라리 새로 산다”고 말했다. 그 신호를 그는 처음부터 보았고, 무시했다.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했다. 사실은 무시가 아니라, 그 불편한 데이터를 '의도적으로 안 보고' 넘어간 거였다.

더욱 심각했던 건 상인들의 생각조차도 몰랐고 내부 팀 간의 시선 차이도 컸다. 어떤 상인은 “동네 장인들의 삶을 연결하는 감성 마케팅”을 원했고, 팀원중 누군가는 “결제 이탈율 15% 이하 유지”에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주민과의 커뮤니케이션은 “구독을 설명하는 데만 일주일”을 써야 한다는 투덜거림으로 대충 하고 말았다. 민형은 그 중간에서 누구 하나 설득하지 않았고, 말리지도 않았다. 그저 “잘 되겠지.”라고만 했다.

그는 다시 노트에 펜을 들었다. 실패 요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썼던 논문처럼. 도시 연구자의 마지막 자존심 같았다.

서비스 구조의 이식 실패 –
과거 공장지대에서 문화와 상업이 어우러지는 새로운 복합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는 곳. ‘구독경제’라는 모델을 적용하는 것은 관념적으로는 흥미로웠지만, 실제로는 여러 한계에 부딪혔다. 주민들의 소비 행태는 여전히 즉흥적이고, 정기결제에 대한 신뢰도 낮았다. 구두 수선 역시 계획처럼 정기적으로 이용되는 서비스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우발적으로 찾는 행위였다. 이런 상황에서 ‘순환경제’라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공급자 네트워크의 한계 —
지역 수선 장인들은 대부분 은퇴를 앞두었거나, 가족 단위로 운영하는 단기 생계형 업장이 많았다. 일부는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의지를 보였지만, 시스템화에 대해서는 깊은 회의감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시스템에 들어가는 순간, ‘자기 일이 더 이상 자기 일이 아닌 것 같다’는 허탈함을 토로했다. 결국, 진정한 변화는 공급자 네트워크의 단단한 벽 앞에서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지역 커뮤니케이션 실패 —
초반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돌아온 질문은 “여기 뭐 하러 온 거예요?”였다. 주민과 상인들은 그들을 전문가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외부에서 침입한 낯선 사람들이었다. 신뢰는 처음부터 없었고, 그들의 존재는 끝까지 ‘실험의 대상’으로만 인식되었다. 무엇보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불안은 깊었다. 월세 상승과 기존 상인들의 밀려남을 우려했지만, 그들은 그런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고, 해소하지도 못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지역과 간극이 벌어졌고, 신뢰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이어졌다.

내부 팀 내 인식 불균형 —
기획자, 마케터, 리서처는 각기 다른 전문 영역과 용어 체계 속에서 작업했다. 어떤 날은 브랜드 전략에 집중했고, 또 다른 날에는 재무 분석과 예산 추계에 몰두했다. 하지만 명확한 공동 목표 설정이나 공통된 이해는 부재했다. 자신 역시 이 복잡한 소통의 틈바구니에서 일관된 방향성을 찾지 못했다. 내부 팀의 상이한 언어와 관점은 프로젝트 전반에 걸쳐 전략적 혼선을 초래한 가장 주요한 원인이었다.

민형은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연결시켜주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연결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형은 의아했다. 연결된다는게 꼭 좋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결되어지는 순간 개성은 사라진다. 서로를 배려하고 관계를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결된다는 거 굳이 현장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지 않은가.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되지 굳이 골목상점에 방문할 이유는 없다. 하루나 이틀 머물러야 하는 거리도 한 시간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어쩌면 애초에 문제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민형은 생각했다.

밤이 깊었다. 커피는 식었고, 창밖에는 다시 빗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몇 시간째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머리는 복잡했고 몸은 오히려 굳어 있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공모 결과 메일을 다시 한 번 열어보았다. "탈락"이라는 두 글자는 놀랍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다만, 오래전 후배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그 모델은,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전문가도 아니었고 단지 가끔 여행 다니면서 브이로그 만드는 친한 동생이었다. 그래서 들은 척만 했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후배의 번호를 눌렀다. 두 번의 신호음 뒤에 그가 받았다.

“어 형?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음… 그냥. 너 한 번 떠올라서.”

“갑자기?”

“그 프로젝트 말이야. 우리 이번에 떨어졌어.”

“프로젝트? 아…네 그렇군요.”

“그때 너, 이 모델 실패할거라고 했었지?”

“아…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아요.”

“응. 맞아. 너 그런 얘기 했었어. 나는 대충 넘겼는데.”

말을 하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땐, 네 말이 걸리긴 했는데, 이번에 그냥 밀어붙였거든. 그럴 수밖에 없던 타이밍이었고. 그래서 더 찝찝하네. 네가 한 말을, 그 순간에 아무렇지 않게 넘긴 내가.”

후배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이미 너무 늦었으니까.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 사실이다. 어떤 순간에는 꼭 그래야만 한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뭐랄까, 고해성사처럼, 마음속 깊이 고여 있던 말을 조심스레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는 그런 장면. 누가 들어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면 그냥 꺼내놓는 것만으로도 숨이 좀 쉬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건 어딘가 이상해 보였고, 팀원들에게 솔직하게 실패할 서울 있는 계획이었다고 털어놓는 건 더 어색했다. 사람들은 진심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적당히 포장된 확신과, 미리 정리된 결과만을 원했다.

게다가 이미 늦었다. 어떤 일에는 타이밍이라는 게 있었고, 민형은 그 순간을 그냥 흘려보냈다. 주저했고, 계산했고, 내뱉는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그들은 다들 바빴고, 그 역시 그랬다. 애초에 그 계획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걸 말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되뇌었다. 거기엔 변명과 후회의 끈적한 냄새가 함께 배어 있었다.

민형은 그때 용기를 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말하고 싶다는 감정과, 실제로 말할 수 있다는 행동 사이에는 생각보다 깊은 골이 있다. 그 사이에 다리를 놓는 데 실패했고, 그 실패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게 가장 민형 다웠다. 어딘가에서 그렇게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건 어쩌면 그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침묵을 선택하고, 말은 안쪽 어딘가에 고이 눌러두는 것.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 편치 않음이 익숙해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프로젝트는 끝났다. 남은 것은, 말하지 못한 감정들과, 각자의 복잡한 침묵이었다. 단톡방은 살아남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 이어짐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미소를 띠었다. ‘가끔 봐요’라는 말이, 미래에 다시 만나길 바라는 희망이면서도, 어쩌면 서로가 점점 멀어질 걸 알고 있는 슬픈 약속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들의 관계가 희미해지다 기어이 사라지지고 말거라라는 걸. 그래도 막연한 기대는 남겨뒀다. 그게 팀이 함께한 마지막이었다.

말하고 싶었다는 건, 결국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의 진심이 그렇듯 오래 남는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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