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봄

by inome

준호가 이서를 처음 본 것은 봄, 아니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나무들은 아직 맨몸이었고, 햇살은 따뜻했지만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도서관 옆, 조경 공사가 덜 끝난 흙바닥 위, 임시 플라스틱 의자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날 준호는 그녀 곁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다만 발걸음을 옮기면서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렸다. 그 후에도 시야에 걸렸다. 도서관 앞 자판기에서, 학생회관 그늘에서 전화를 받는 모습으로, 식당 줄 끝에서 혼자 서 있는 등 뒤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몇 번이고 마주쳤다.

수업 시간표에서 우연히 같은 강의실 이름을 본 적도, 학교 커뮤니티 사진 속 옆모습도 있었다. 여기저기 흘러 다니는 조각들이 그녀가 어느 과 학생인지, 어떤 수업을 듣는지 짐작하게 했다. 말 한마디 나눈 적은 없었는데도 그녀를 알아갔다.

점심시간, 식당 안은 느릿하게 움직였다. 사람들은 줄을 서고, 식판이 부딪히고, 낮은 웅성거림이 흘러나왔다. 준호는 줄 끝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앞머리가 눈을 살짝 덮고 있었고, 후드티 사이로 희미한 회색 티셔츠가 보였다. 그녀는 서 있었지만, 긴장한 기색도, 피곤한 기색도 없었다. 주변 소음 속에서 그녀의 모습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준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조용히 서 있는 것만으로, 마음 한쪽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아주 짧은 순간, 주변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준호는 그 순간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식당 안의 소음과 사람들의 움직임이 뒤섞였지만, 그 틈바구니에서 그녀는 그대로 있었다. 준호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서로의 존재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저기… 오늘 뭐 나와요?”

“음… 잘 모르겠네요. 그냥… 저도 줄 서 있는 김에 기다리는 거예요.”

그녀는 메뉴판을 잠깐 흘깃 보았다. 짧은 대답, 무심한 목소리였다. 이상하게도 귀에 오래 남았다. 낯설면서도 편안한 느낌이었다.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렀다. 불편하지는 않았다. 식판 부딪히는 소리와 웅성거림이 두 사람을 감싸, 아직은 마음이 들키지 않았다. 트레이 위에는 늘 그렇듯 밥과 국, 반찬 몇 가지가 놓여 있었다.

이서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창은 불투명했지만 계절의 빛이 새어 들어왔다. 준호는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 눈빛으로만 확인하자, 그녀는 허락한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수저를 드는 타이밍은 거의 동시에 맞춰졌다. 누구의 동작이 먼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시간에서 흘러온 두 사람이, 문득 같은 시계 속으로 들어온 순간. 아무 의도도 없이, 그러나 가장 좋은 방식으로 겹쳐진 시간이 거기 있었다.

익숙한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처음 만난 사람처럼 지나치게 조심하지도 않았다. 몇 번인가 눈길이 스쳤다. 짧고 단정하게, 그러나 정직하게. 금세 시선을 거두었지만 그것은 피하는 것도, 외면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래전, 아주 작은 약속을 나눈 것 같은 순간. 말을 서두르는 이는 없었고, 오히려 침묵에 몸을 기대는 쪽에 가까웠다.

그 침묵은 어쩌면 안도 같기도 하고, 어쩐지 기대 같기도 했다. 보통이라면 식탁 앞에서 묵묵히 밥만 먹고 있으면 미안해지곤 했는데, 지금은 달랐다. 혼자만 빠져나온 것 같은 고립감도 없었고,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어색해지지 않았다.

준호는 접시 위 김치를 젓가락으로 천천히 집었다.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몸의 기계적인 반응처럼 보였다. 편안하다고 말하기엔 어색했고, 어색하다고 말하기엔 긴장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이 상황이 무해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실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밥은 따뜻했고, 국은 식어 있었다. 젓가락은 필요한 만큼만 움직였고, 물 컵의 물은 애꿎게 비워졌다. 맞은편 이서의 호흡이 전해질만큼 집중도는 높았다. 그것은 흔히 감정이 닮아갈 때 생기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너무도 쉽게 공유되고 있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낯설었지만, 정작 이상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작은 테두리를 지키며 산다. 말투와 눈빛, 앉는 자세, 말없이 지켜야 하는 법칙 같은 것들. 그런데 이 자리에서만큼은 그런 것들이 조용히 풀려 있었다. 어쩌면 준호와 이서가 나누고 있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함께 있음’이었다. 서로의 박자에 몸을 얹어보는 것. 경계 없이 시간을 겹쳐보는 것. 그리고 그런 시간이 뜻밖에도 마음 깊은 곳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

누구도 먼저 다가간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서로 안에 들어와 있었다. 몰래 선을 넘지도, 허락을 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의 공간이 다른 사람의 공간과 자연스럽게 포개졌다. 오래된 이불 두 장 위에,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게 나란히 누운 것처럼. 그리고 아마도, 두 사람 모두 그걸 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니까.

이서와 함께 있는 시간은 꽤 좋았다. 계절이 몇 번 바뀔 동안 그들은 특별히 뭘 하지 않아도 지루하지 않았고, 말이 끊겨도 불편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같은 방에 앉아 있는데도, 틈이 있었다. 말로 채워지지도 억지웃음으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매일 어디든 조금씩 쌓이는 먼지처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어색함이 쌓였다. 침묵은 어느새 불편함이 되었다.

누구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준호는 자꾸 작아졌다. 이서 앞에 서면 괜히 설명해야 할 말들이 많아졌고, 끝내 침묵을 이어지고 말았다. 대답하지 못한 질문들만 쌓여갔다. 차라리 혼자 있을 때가 편하다고 느끼는 시간이 늘어났다. 시계 초침이 똑딱거리며 지나가는 소리가 좋았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홀로 마주하는 이 정적이 그녀와 보냈던 따뜻한 기억보다 더 정직했다.

생각해보면 이서의 웃음소리, 늦은 밤에 오던 짧은 메시지, 카페 창가에서 함께 바라보던 풍경은 여전히 좋았다. 이제는 그 기억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정확히는 추억이 무거웠다. 처음 알았다. 알고 싶었다. 왜 변했는지,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는지. 하지만 묻지 못했다. 실은 질문을 꺼낼 힘조차 없었다.

처음엔 별일 아니었다. 하지만 점점 사소한 일들이 특별한 감정을 만들었다. 그것은 점점 강렬해져서 마치, 깨진 유리 파편 위를 맨발로 걸어야 하는 것처럼,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마음이 아슬아슬하게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참을 수 없을 무렵 둘은 이별을 선택했다.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 그만큼 아팠고 무기력했다. 하지만 원하는 방향도 결과도 아니었다. 한참 틀어져 버렸고, 되돌릴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남겨진 건 받아들이는 일뿐이었다. 그런데 받아들인다는 게 도대체 뭔지 알 듯 모를 듯 했다. 준호는 지금 그것이 고개를 끄덕이는 일인지, 아니면 어깨를 으쓱하는 일인지 헷갈렸다. 어쩌면 그 둘 다일지도 몰랐다.

하필 창밖의 나무들은 아직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봄을 기다렸다. 햇살은 부드러워졌지만, 바람 끝에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던 그 날처럼, 시작과 끝이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계절이 다시 시작되는 날은 늘 설명하기가 모호했다.

어느새 이십대 후반. 구직자. 하지만 그 단어가 그의 현재를 전부 설명하는 건 아니었다. 준호는 고시원에서 살지도 않았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도 없었다. 원하면 언제든지 독립할 수도 있었고, 코인 투자로 몇 달쯤은 버틸 수 있는 여유도 있었다. 사실 큰 욕심은 없었다.

그저 헤어졌을 뿐이다. 그런데 ‘그저’라는 말이 언제부터가 버거웠다. 준호는 문득 오래전 봤던 영상을 떠올렸다. 유명 걸그룹의 한 멤버가 무대 뒤에서 심각하게 화가 나 있었다. 화면만 봐도 싸늘한 기류가 느껴질 정도였다. 멤버들 사이의 갈등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쉽게 넘길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드디어 그녀는 결심이 섰는지 크게 외쳤다.

“짜장면”

순간 모두가 멍해졌다. 너무 엉뚱한 말이었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짜장면이라는 말에는 어떤 맥락도 없었다. 게다가 분위기상 어울리는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이 상황을 짐작했다. 한국어가 서툴러서 ‘짜증 나’를 ‘짜장면’이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폭소가 튀어나왔다. 화를 내려했던 당사자 역시 그저 웃었다. 상황은 너무 쉽게 봉합되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원인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정도 일로 넘길 수 있었다면 “애초에 화낼 만한 일이 있었을까?”라는 질문만을 남겼다. 물론 그 대답조차 아무 의미는 없었다.

준호는 이서와의 이별이 그 장면과 비슷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진지하고, 무겁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그렇게 되는 거고 아니면 발음이 비틀려 다른 말이 튀어나온 것 같은 단순한 어긋남으로도 헤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순간에는 견딜 수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웃고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 그건 이해하거나 어떤 원인이 반드시 그 결과를 다다르게 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누군가에겐 농담 같은 사건으로 끝났고, 준호와 이서에겐 현실이 되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정말 화낼 만한 일이었을까. 정말 절망해야 했을까. 아니면 어쩌면—짜장면 같은 건 아니었을까하는 것.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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