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inome

그날 저녁, 팀원들이 모였을 때 수진은 사진관 이야기를 꺼냈다. 문은 닫혀 있었고, 바깥에는 오래된 사진이 겹겹이 붙어 있었다고. 그 웃는 얼굴들이 이상하게 말이 없었다고. 민형은 파란 펜을 굴리다가 잠깐 멈추더니 조용히 끄적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문 닫힌 공간에도 수명이 있지.”

그 말에 정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종이컵 아래로 손가락을 가져가 탁탁 소리를 냈다. 규칙 없는 간격으로 두 번. 아주 작았고, 오래 머무는 소리는 아니었다. 잠깐 아주잠깐 시간이 멈춘 듯했다. 설명은 되지 않았고, 굳이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 밤엔 이상하게도, 사라진 것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말하려다 멈춘 문장들이 공중에서 천천히 어슬렁거리는 느낌이었다.

공유부엌은 서서히 이야기로 채워졌다. 몇몇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삼삼오오 흩어졌다가, 또 느슨하게 다시 모여드는 일을 반복했다. 마치 조립식 가구의 부품처럼. 익숙한 몸짓이었다. 물론 아직은 작은 망설임이 한 방울쯤 섞여 있었다.

수진이 와인을 꺼냈다. 친해질 요량으로 미리 준비했다. 비싸 보이지도, 싸보이지도 않는 레드. 레드는 수진이 좋아하는 색이었다. 하지만 잔은 플라스틱이었다. 얇고 가볍고, 쉽게 깨지지 않는 투명한 성질. 사람들은 그런 걸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어울린다는 듯. 입가에 닿을 만큼만 따라놓고, 천천히 목을 축였다.

격식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모두 이 자리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플라스틱 잔은 적절했다. 테이블 위엔 반쯤 먹다 만 크래커, 접착제처럼 녹은 치즈가 날씨를 짐작하게 했다.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서울은 원래 오래된 수도잖아요. 그게 관습이라고, 법으로도 정했잖아요. 관습법. 서울이 수도인건 절대 그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지혜였다. 수진과 같은 팀원. 그녀는 잡다하게 아는 것도 재주도 많은 듯 자기를 소개했었다. 그래서 그녀가 디자이너 경력이 있고, 최근에는 브이로그 영상을 업로드해서 꽤 성공했다는 것도 알았다.

“그냥 지금이 그런 시대인 거죠. 다들 피곤하고, 다들 자기 취향대로 커피를 마시고, 앱으로 만나도 아무 부담이 없는 도시. 관계가 아니라 자기 삶의 연장을 위해서 필요한 접속가능한 공간”

반박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와인 잔이 조금 더 비워졌고, 누군가는 화장실에 다녀왔다. 수진은 테이블 모서리에 손가락을 얹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근데요, 그렇게 말하면, 우리도 결국엔 앱으로 만나게 된 거잖아요.”

정이든은 그는 그런 식으로 말했다. 설명 없이, 약간은 느리게. 그런데도 말을 꺼내기 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는 사람처럼.

“여기에 있으면요,”
잠시 긴 텀이 흘렀다. 사람들은 그를 주목했다. 수진은 문득, 정이든이 이런 순간을 꽤 잘 다루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피식, 작게 웃음이 나왔다.
정이든이 다시 말을 이었다.

“도시는 계속 새로워져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 때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힘들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 불편한 마음은 외부인에게도 그대로 전해지고요. 그래서 돕는 것도, 사업으로 하는 게 편할 것 같아요. 현실에서는 차라리 서로 체온 없이 돕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그게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에요. 단지 어딘가에 각자의 체온이 있을 뿐, 합쳐지지 않았을 뿐이죠. 그런데 보세요, 지금 우리는 앱이 아니라 얼굴을 보고 있잖아요. 몇 일 전까지 몰랐던 사람들인데, 이렇게 만났고요. 느슨하긴 하지만, 서로 조금은 끌리지 않나요?”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느슨해도 할건 하는 관계. 가벼우니까 서로 편한 관계. 무너져도 큰 위협이 되지 않는.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네요.”
이든의 말이 조금 길어지자 민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동작은 이든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 말을 꺼내기 전의 습관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냥 붓으로 칠하듯이 덧칠해도 아무런 표가 나지 않죠. 사실 오래된 걸 남겨두면 골치 아프거든요. 법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도시재생이 꼭 그런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정비 사업이란 이름으로 다 밀어버리는 거죠. 뭐, 일종의 리셋이에요. 우리 관계도 그 정도로 끝날걸요. 모르긴 몰라도. 아 단정은 아니에요. 대체로 그렇다는 거죠.”

민형의 말을 들으며 이든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미간이 찌푸려졌다. 방금까지 자신이 이야기했던 주제와는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별일 아닌데, 왜인지 살짝 마음이 불편했다.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작용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민형의 차분한 고개 끄덕임 때문에 딱히 나쁘진 않았다. 애매했다. 사실 더 할 말도 없었다. 그래서 원래 이야기로 되돌리지는 않았다.

“지금도 서울 북쪽의 몇 개 구획은 사라지고 있어요. 지도에서 지워지고, 행정에서도 사라지고, 기억 속에서도 남지 않을 거예요. 새 아파트가 들어서면 사람들은 별말 없이 이사 와서 살죠. 삶으로 보면 나쁘지 않아요. 녹물 없는 깨끗한 물, 멈추지 않는 엘리베이터, 잘 터지는 와이파이.”

민형의 말은 설명이라기보단, 단정에 가까웠다.

“사실 말이 재생이지,”
그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거기엔 그 무엇도 다시 태어나는 건 아니에요. 그냥 낡은 껍데기를 그럴싸한 새것으로 갈아 끼우는 거죠. 이식. 그래도, 그렇게라도 안 하면, 사람들은 거기서 살아낼 수 없어요. 도시가 너무 오래되면 제 기능을 못하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도시예요. 기억? 역사? 다들 그럴듯하게 포장하죠. 하지만 결국엔 전부 자리싸움이고, 배관처럼 보이지 않는 시스템에 누가 먼저 꽂히느냐의 문제예요.”
그러면서 테이블 위 크래커를 한 조각 부러뜨렸다.

“사람들은 도시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도시에서 뭘 챙길 수 있느냐만 관심 있어요. 재생이든 개발이든, 결국은 탐욕이에요. 말만 다를 뿐.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민형이 말을 늘어놓자, 몇 사람이 거의 동시에 몸을 조금 고쳐 앉았다. 아주 작은 동작들이었지만 모아보면 “이쯤이면 됐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누구도 반대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냥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이해를 흘려보낸 셈이었다. 문제는 그 ‘적당함’이었다. 말은 충분히 돌았지만, 공감은 빠져 있었다. 공회전과 비슷했다. 나아가지 못하면서 엔진에 무리만 준다. 민형도 그걸 느낀 것 같았다. 말을 더 늘리지 않았다.

지혜가 손뼉을 한 번 쳤다. 가볍게, 계산된 듯이. 소리는 크지 않았다. 방 안의 공기를 살짝 흔들어놓을 만큼, 흩어졌던 사람들의 주위를 환기할 수 있는 정도였다.

“저희, 다 처음이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어색했지만, 묘하게 가벼웠다. 부담 같은 건 없었다.

“도시 얘기라는 게… 의외로 철학적이네요.”

앞뒤 없는 말이었지만 민형에 대한 배려였다. 그걸로 이번 이야기를 마무리하자는 신호. 사람들은 곧 알아챘다. 몇몇은 작게 웃었고, 어깨에 남아 있던 힘이 조금 빠져나갔다.

“근데, 저만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요,” 지혜는 말을 이었다.
“우리가 몇 주간 함께 하게 될 텐데, 서로 조금은 더 알면 좋을 것 같아서요. 괜찮으시면… 그냥 간단하게 자기소개 같은 거, 어때요? 사실 전 민형씨는 알고 지내는 분이에요.”

굳이 이런 일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지금 이 분위기에는 딱 알맞은 일이긴 했다. 미리 준비한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지혜가 가볍게 먼저 손을 들었다. 맨 먼저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곤 멋쩍음을 해소하려는 듯 다시 잔을 채우며 웃었다.

“고향은 서울 서쪽에 있는 신도시예요. 서울은 아니고, 국제공항 하나 있는 곳이죠. 줄곧 아파트에서만 살았어요. 이름이 ‘까사티아고’인데, 좀 묘하죠? 스페인어로 ‘티아고의 집’이라는 뜻이라던데, 예전에 제가 장난처럼 ‘발목잡는이의 집’이라고 해석했어요. 그게 왠지 어울리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런 곳에서 자라서 그런지, 이상하게 늘 어디에 붙잡혀 있는 기분이에요. 그러다 서울에 와서 디자인 일을 했어요. UX 쪽이었는데, 스타트업 몇 군데 거치고 꽤 큰 플랫폼 회사도 다녔죠.”

수진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저 거기 알아요. 요즘 완전 핫 하잖아요. 서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많이 간다고 들었어요.”

지혜가 고개를 들었다.
“밀려나서 간다고요?”

순간 수진은 말을 멈추고 눈을 깜빡였다. 자신도 모르게 한 말이 이상하게 튀어나왔다는 걸 알아챘다.

“아,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집값이 너무 비싸니까. 그래서 신도시 쪽이 뜨는 거고… 근데 아직 불편하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서울 바로 옆인데도 5호선이 안 들어온다고… 그래서 출퇴근이 힘들다고…”

수습하려고 했지만 말을 할수록 더 꼬여갔다. 지혜의 시선이 수진에게 걸렸다. 짧았지만 길게 남는 눈빛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공백처럼 수많은 메시지를 잔뜩 담아냈다. 수진의 말은 노골적인 무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상대를 배려했다거나 혹은 상처가 전혀 없는 말도 아니었다. 차라리 무심하게 모른 척 해주었으면 더 좋았을 거 같았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그런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예의조차 자기중심적인 세상이니까.

사람들은 솔직하고 정직한 게 오히려 미덕이라고 말한다. 그건 그냥 필터를 잃어버린 거다. 지혜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무의식적인 편견. 그리고 그 편견이 만들어내는 우월감. 그 결과 갈등에 이르게 되고 먼저 판을 깐 사람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라고 자기를 변명하게 된다. 그리고 면피를 얻으려한다. 좋게 말하면 일종의 예의라면 예의다.

게다가 외곽에 산다고 해서 꼭 ‘밀려난 사람’으로 볼 수는 없었다. 집값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건 큰 불만이긴 했다. 그렇다고 거기에 살기로 한 사람들의 선택이 모두 강요는 아니었다. 학교를 옮기고, 직장을 오가고, 아이를 키우는 수많은 일상 속에서, 저마다의 이유도 나름의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길게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말이 길어질수록 변명처럼 들릴 테니까.

지혜는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피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냥, 한두 번은 삼키고 넘길 수는 있었다. 오늘은 그래도 참는 쪽이었다. 그렇다고 다 잊는 건 아니었다. 지금 받은 그 말, 마음속 어딘가에 넣어두었다가 나중에 한 번쯤 다시 꺼내보게 되리란 걸 지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 어딘가에서 아주 얇은 막을 내렸다. 단절이라기보다는 스스로 거리를 두는 방식이었다. 이제 이 대화는 더 깊이 이어갈 필요가 없었다.

“아, 네.”

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의 말을 인정한다는 것이라기보다 일종의 마침표와 같은 말이었다. 멈추라는 사전경고일수도 있었다.

“뭐, 교통은 아직 불편하긴 하죠. 지하철도 5호선이 아니라 공항철도 하나뿐이니까요.”

말끝에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굳이 따지지 않겠다는 제스처. 엘리베이터가 꽉 찼는데 누군가가 굳이 비집고 들어올 때, ‘괜찮아요.’하고 몸을 옆으로 빼주는 사람의 몸짓처럼. 한 번쯤은 양보해야하는 것이 지혜가 가진 미덕이긴 했다.

수진을 처음 봤을 때, 자극할 사람이라는 걸 직감했다. 사실 지혜는 중학교 때 매일 버스를 타고 서울에 있는 학원에 다녔다. 하지만 주소하나 차이로 서울에 소재한 특목고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특별시에서 밀려난 기분을 그때 알았다. 입시 내내 서울 아이들에 대한 부러움과 열패감이 마음속에 쌓였다. 그 시간이 삼 년도 넘었다. 인서울 중위권 사립대에 진학하면서 서울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쌓여버린 패배감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지금도 몸이 서울출신의 독특한 말투나 태도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시간은 그런 종류의 상처를 무디게 하지 않았다. 반쯤은 질투, 반쯤은 불쾌감이 뒤섞인 기분. 수진이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도, 분명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혜는 와인을 조금 마셨다. 맛을 즐긴다기보다는, 말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투명한 플라스틱 와인잔을 수진이 가져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술은 훨씬 줄어 있었다. 입술을 적시며, 방금 들은 단어들을 마음속에서 조용히 배열해봤다.

‘밀려난다.’
짧고 단단하게 부딪히는 소리였다. 그 말 안에 깔린 시선이 문제였다. UX, 스타트업 같은 단어들이 뒤로 밀려나는 서사처럼 보인다면, 그건 결국 바라보는 위치가 달라서일 것이다. 그건 본질에 관한 문제였다. 어디에 서있냐에 따라서 보이는 모습은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지혜는 반박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애초에 하고 싶었던 말을 이었다.

“UI야 그렇다 쳐도, UX는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잖아요. 사람 심리요. 그런데 서울에서 그걸 하다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정말 사람을 위한 설계를 하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

조명이 테이블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사람들의 시선은 지혜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여유 있게 또 한 모금 마셨다. 꼭 필요하지 않은 동작이었지만,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을 품위 있게 메워주는 제스처 같았다.수진이 뭔가 궁금하게 생긴 듯 잠시 머뭇거리다 지혜를 바라봤다.

“근데 지혜씨는 왜 지원했어요? 이미 취업도 하셨다면서요? 굳이 교육받고 다시 도전하고… 전공도 아니신데.”

가벼운 질문이었지만, 지혜의 귀에는 이상하게 걸렸다. 생각해보니 그 말은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냐’는 뜻처럼 들렸다. 마치 제 자리가 아닌 곳에 억지로 끼어든 사람 같았다. 따지는 걸까,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일까. 지혜는 잠시 숨을 고르고, 조용히 수진을 바라보았다.

“저한테는 반복되는 숫자만 쫓는 일이 더는 충분하지 않았어요. 직장 다녀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매일 똑같은 흐름이죠. 디자인도 다르지 않아요. 사람들은 늘 익숙한 패턴을 따르고, 새로운 건 잘 받아들이지 않죠. 그렇게 매일을 보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게 정말 내가 원한 삶일까. 저는 거기서 흥미를 잃었어요.”

지혜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선을 테이블 위로 옮겼다. 작심한 듯한 어조였다. 수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수진 씨 말은 질문이라기보다 평가처럼 들려요. 그냥 ‘하고 싶은 걸 해보는 겁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사람마다 이유가 다르고, 그걸 굳이 알려고 하는 태도는… 좀 불편하네요.”

마지막 말을 할 때, 지혜는 수진을 보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떨어졌다. 수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더 복잡해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침묵하기엔, 마치 이미 싸움에서 밀린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누군가 가볍게 농담이라도 던져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수진은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은 모두 돌처럼 굳은 표정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어딘가 잘못 들어온 미로 속에 있는 기분을 느꼈다.

민형이 무언가 말하려다 멈췄다. 지혜는 그 틈을 주지 않았다. 등을 곧게 펴고, 멀리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듯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조금 전까지 날을 세우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수진은 그 변화를 눈으로 좇았다.

“그래서 수진 씨가 한 말을 잘 모르겠어요. 도시가 늙는다는 게 어떤 뜻인지요. 대신… 비어간다는 느낌은 있어요. 벽이 무너지는 소리랄까. 무엇이 사라진 건지 모르겠는데, 작은 소리에도 안쪽이 크게 울려요.”

순간, 공기가 약간 느슨해졌다. 긴장이 풀렸다고 할 수도 있었고, 그저 방향이 바뀐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지혜의 배려였는지, 아니면 단지 자기 이야기를 이어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은, 이렇게 흘러가는 편이 더 나아 보였다.

게다가 차라리 이 말은 새겨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비어가는 도시. 늙어가는 도시. 말은 다르지만, 뭔가 겹쳐졌다. 그녀에게 이 도시는 언제나 바쁘게 움직이는 거대한 기관 같았다. 수많은 출입구와 소음을 가진 역, 모서리마다 빨리 닳아가는 신발, 서두르다 흘린 것들이 가득한 길. 그런 풍경이 그녀에겐 일상의 기온처럼 익숙했다. 그냥, 숨 쉬듯이 살아온 곳이었다. 사람들이 특별시라고 불렀다.

만일 자신이 이 도시를 떠나려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런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을 것이다. 매일 지나쳤을 것이다. 오래된 것에 시선이 머문다는 건, 결국 어딘가 자신이 이 도시에서 발을 빼고 있다는 뜻이니까.

“아까 말한 사진관 있죠.”
수진이 말했다.

“누가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어요. 물론 아무도 없었지만.”
말은 짧았다. 그래서 방안이 잠시 조용했다.

“근데 그게 되게 오래된 사람 같았어요. 이 도시보다 더 오래된 느낌. 나보다 먼저 서울에 살았던,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살았는데 근데 아직 나가지 못한…”

지혜가 다시 잔을 들고 말했다. “근데 진짜 누가 있었으면요?”
가볍게 던진 말이었지만, 묘하게 울림이 있었다. 다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다. 지혜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되레 웃으며 덧붙였다.

“그 사진관 말이에요. 수진 씨가 말한 거. 아직 누가 남아 있다면, 그거 완전... 귀신 스탠다드 아닌가요?”

수진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혜가 계속 말했다.

“폐가, 낡은 졸업사진, 뒷골목, 밤, 정적. 여기서 누가 ‘무서운 얘기 하지 마’ 하면 바로 시작이죠. 저 진짜 많이 본 패턴인데.”

이든이 작게 웃었다.
“좀... 이상하게 익숙하긴 하네요.”

민형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서울특별시 귀신 콘텐츠 촬영 중이라는 거잖아요.”

지혜가 “맞아요. 제목은 제로블럭 귀신 감별사. 아니면 ‘도시괴담 리얼리티 팀’도 괜찮은데.” 하고 웃었다.
수진도 따라 웃었다. 작은 농담이 우중충한 분위기를 밀어냈다.

이든이 중얼거렸다.
“근데 퇴치보단 대화에 가까운 거 아닐까요.”

지혜가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든 상관없는데, 전 진짜 밤에 화장실 불 꺼져 있으면 절대 못 나가요. 뒤에 뭐 있는 느낌 들면 그냥 앞으로만 가요. 돌아보면 지는 거예요. 그게 제 생존 전략.”

그 말에 민형이 조용히 웃었고, 이든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수진은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지혜가 다시 말했다.

“이런 대화도 다 클리셰죠. 귀신 얘기할 때마다 누군가 진짜 무섭다고 말하고, 그러면 갑자기 다 같이 웃고. 나중엔 괜히 조용해지고.”

민형이 컵을 들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그냥 정해진 틀 안에서 움직이는 것 같긴 해요. 다들 대사만 바꿔서. 마치 운명대로 흘러가는 거죠.”

수진이 잔을 다시 들어올렸다.
“이 도시가 비슷한 장면들을 계속 복사하는 것 같아요. 누가 쓰는지 모를 각본을 따라가면서.”

잠시 말이 끊겼다. 하지만 정적은 빽빽한 틀 안에서 만들어진 여유 같았다. 아무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자신들이 이미 익숙한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 듯했다. 그것이 진짜 세계인지, 아니면 복사된 세계인지는 말할 수 없었지만.

수진은 와인이 조금 남은 플라스틱 잔을 들여다봤다. 색은 여전히 짙었지만, 맛은 이미 빠져나간 듯했다. 잔을 기울이자 바닥에 닿은 와인이 느리게 흔들렸다. 그때 누군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 도시도… 피곤하긴 하겠죠.”

모두가 그 말을 들었지만, 아무도 이어받지 않았다. 말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금세 잊혔다. 대화는 거기서 끊겼고,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든이 무릎 위에서 메모지를 꺼내더니, 펜으로 꾹꾹 눌러 쓰기 시작했다. 종이에 새겨지는 소리가 공기 속을 얇게 흔들었다. 특별한 표정도, 말도 없었지만, 그 움직임에는 이상한 일관성이 있었다. 수진은 고개를 돌려 그의 손을 보았다. 어디선가 이미 본 풍경 같았다. 언제였는지는 떠올릴 수 없었지만, 그 손의 움직임, 종이를 당기는 방식, 펜을 다시 눌러 쓰는 습관까지—모두 익숙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이 낯설었다. 마치 이 장면이,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진 대본처럼 다시 재생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든씨 고향은… 어떤 곳이에요?”

이든이 수진을 봤다. 계산된 질문은 아니었다. 그냥 어느 순간, 생각이 떠밀리듯 올라와버린,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딱히 이유랄 것은 없었다. 그러나 미뤄두고 싶지 않은. 막상 그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시선이 조용히 이든에게 모였다. 그는 여전히 조용했고, 딱히 주목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교육생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중에서 가장 먼저 그곳으로 돌아갈 것 같은 사람. 그런 인상이 그에게는 있었다.

이든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잔에는 물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는 그걸 마시지도, 곧바로 말을 꺼내지도 않은 채 침묵했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고향'이라는 단어는 조용히 제자리를 찾았고 그 이름이 가진 온도가 방 안에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대답하기가 쉽진 않네요.”

그는 답변을 하면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공장이 꽤 많아요. 자동차도 만들고, 배터리도 만들고… 조선소도 제법 크고요. 그냥 공업도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막상 그렇게 딱 잘라 말하긴 어렵네요. 뭔가 분위기가 좀 달라요. 깔끔하게 정리되진 않거든요. 그렇다고 공장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자영업자도 꽤 많아요.”

말은 적당한 속도였다. 그래서인지 편안하게 흘러갔다. 수진은 말없이 그를 살폈다.

“국립대학도 있고, 사립대학도 있어요. 대학이 몇 개나 되죠. 종합병원도 있고, 기차역은 KTX도 정차하지 않는 작은 역이지만 여전히 쓰이고, 국제항도 있고… 공항은 있긴 한데 국내선만 다니고요. 없는 건 거의 없어요. 다만 완벽하진 않아요. 제 기능을 못하는 것 같아요. 하나씩 빠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는 앞에 놓인 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굴렸다.

“항구도시라고 하자니 바다 냄새가 거의 없고, 공업도시라 하자니 일자리도 많지 않아요. 대학도 있고 특목고도 있는데, 교육도시 같진 않고, 관광지라기엔 너무 평범하고요. 역사도 있고 문화재도 많고 근대 도시의 흔적도 남아 있지만… 전체적으로 낡아 보이죠. 오히려 아무 냄새가 없는 게, 어쩌면 이 도시의 특징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고 이 말이 제 고향을 완전히 설명해준다고 하긴, 글쎄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방 안은 조용했다. 누군가 잔을 내려놓는 소리, 스웨터 소매가 의자에 스치는 소리 같은 작은 소리들이 잔잔히 들렸다.

“확실히 다 갖춰져 있긴 한데… 뭐가 이거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도시예요. 이것저것 있지만, 어딘가 늘 뿌연 구석이 있어요. 정의하려 들면 중심이 자꾸 비껴나고요. 그냥 놔두면 이해는 되는데, 이름을 붙이려 하면 잘 맞지 않는 느낌이에요.”

그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시선은 날카롭지도, 흐릿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가끔은… 이 도시가 뭔가 되려다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남겨진 자국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닌, 그냥 남아 있는 상태랄까.”

이든은 천천히, 그러나 맥락을 흐리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온통 중복과 반복된 말이 이어졌다. 어쩌면 사소한 감정 변화에도 민감한 사람일지 몰랐다. 그의 말투에는 특유의 느린 호흡과 생활감이 섞여 있었다. 마치 가정 먼저 새로운 도시에 도착한 사람인데도 잠시 멈춰 서서 다시 도시를 기웃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거리감이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 안쪽까지 살며시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가까운 듯 멀고, 친밀한 듯 침묵하는 균형. 수진은 이든이 연출해내는 이 겹쳐지는 모습이 어쩌면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누군가는 물을 마셨고, 누군가는 의자를 살짝 움직였다. 그 작은 움직임들이 방 안의 공기를 천천히 흔들었다. 뜨거웠던 온기는 서서히 내려앉고, 정적 속에 미래로 향하는 작은 틈이 생겼다. 사소한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말들이 공중에서 맴돌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어떤 일이라도 벌어지길 기대하는지 숨죽인 채 다음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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