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

by inome

캠프 입구는 커다란 유리 파사드였다. 누군가 라벤더 향을 뿌려놓았는지 은은하게 향이 느껴졌다. 1층은 카페, 2층은 공유 오피스, 3층은 키친과 미팅룸, 옥상은 루프탑 파티 공간. 벽에는 낡은 철제 빔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바닥은 오래된 콘크리트를 닦아 광을 냈다. 그 위로 무선 이어폰을 낀 청년들이 자유롭게 오갔다.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커피 향에 섞여 퍼져 나갔고, 에스프레소 머신 위 조명은 부드러운 주황빛을 띠고 있었다.

오리엔테이션이 열린 홀은 조용했다. 공식 일정은 생각보다 지루했다. 하지만 자기소개 시간이 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사람들이 서로 말을 걸었다. 짧은 인사, 빠른 웃음, 스치듯 시선들이 교차했다. 그때, 수진의 눈에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의자에 앉아도 몸은 곧게 펴져 있었고, 팔을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자연스럽게 긴장과 이완을 반복했다. 긴장된 듯 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움직임은 안정적이었다. 수진은 그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오래 몸을 다듬어온 사람이라면 이렇게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고, 수진은 조심스레 추측했다.

얼굴에는 묘한 익숙함이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오래전 어딘가에서 스쳐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의 각도나 턱의 선, 웃음의 잔향이 기억 속 어딘가를 건드렸다.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을 때, 그 익숙함은 조금 더 선명해졌다. 고개를 숙인 모습에는 조심스러운 집중이 있었고, 짧은 웃음이 스치자 불안의 그림자가 걷혔다. 남은 건 부드럽고 안정된 표정이었다. 망설임과 확신이 동시에 머물러 있는 얼굴. 수진은 그 순간, 이 사람은 자신을 잃지 않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쪽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같은 순간 예측하기 어려운 어떤 흐름이 느껴졌다.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말과 말 사이에는 약간의 공백이 있었고, 그 공백이 오히려 신뢰를 만들어냈다. 수진은 그 느림이 낯설었다. 서울에서 자란 사람들은 대부분 반 박자 빠르다. 말은 단정하고, 눈치는 빠르며, 움직임은 정돈되어 있다. 그녀 자신도 그랬다. 그러나 눈앞의 대화에는 리듬이 달랐다. 조율되지 않은 악기처럼 어딘가 불안정했지만, 그 불안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그 속도에는 계산이 없었고, 대신 온기가 남아 있었다. 수진은 그 느림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다. 다만, 그 느림 속에서 묘하게 자신이 느려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서와 비슷했다. 이서를 몰랐다면, 수진은 그의 불안정함에 경계를 두고 한 발 물러섰을 것이다. 감정을 읽기도, 의도를 짐작하기도 어려운 상대는 일단 지켜보는 게 상책이니까. 그런데 수진은 그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의 말보다는 어순이, 흐름보다 말하기 전의 정적이 신경 쓰였다. 이서가 그러했듯, 남자의 말에는 자신만의 속도가 있었다. 묘하게도 기록되지 않는 안정감이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마자 수진은 홀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않았다. 단지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순간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중 가장 선명한 기억은 느린 말투, 망설임 속의 확신을 가진 그였다. 낯선 이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함이 호기심을 불러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해야 했다.

건물 뒤편, 주택가와 맞닿은 허름한 간이 체육시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낮 동안 번쩍였던 오리엔테이션 강당과는 달리, 이곳은 한산하고 정적이었다. 콘크리트 바닥 위에 놓인 낡은 철제 벤치에 앉았다. 벤치의 벗겨진 페인트 아래로 녹이 붉게 드러나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별은 없었고, 도시의 불빛에 반사되어 먼지가 낀 듯 뿌옇게 번진 밤하늘만이 펼쳐졌다. 수진은 굳이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 ‘희망’이라는 것은 그 밤하늘처럼 불분명했다. 주변에는 마라탕 포장지와 빈 소주병이 흩어져 있었고, 벽에는 오래된 욕설 낙서가 남아 있었다.

어린 시절, 남자아이들 틈에 섞여 축구공을 쫓아다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억지로 강한 척해야 했던 시간들. 공이 발끝에 닿는 순간의 감각, 그 흐름을 따라 온 신경이 집중되던 순간만이 그녀에게 현실이었다. 남들보다 눈치가 빨랐던 만큼, 남들보다 더 빨리, 더 악착같이 쉬지 않고 달렸다. 그래야만 인정받을 수 있었고, 아무렇지 않은 척, 힘들지 않은 척, 단단한 수진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이제 다시 그때처럼 달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12주 동안 진행될 프로그램은 그녀에게 단순한 교육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도시재생 이론을 듣고, 오후에는 팀별 과제를 수행하며, 저녁에는 도시의 골목을 기록하는 '리빙랩'이라는 모호한 일정. 그녀는 오히려 그 모호함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려 했다. 취업에 실패하고 서울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그녀를 이곳으로 밀어 넣었다. 어쩌면 그녀의 새로운 인생을 걸어야 할 둘도 없는 기회였다. 그래서 반드시 이겨내야 했다. 지금껏 자신을 지탱해온 강한 척하는 모습 뒤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라도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

강의실에서 들어야 하는 이론들, 앞으로 겪게 될 팀원들과의 사소한 논쟁들, 그리고 도시의 골목길을 돌며 관찰하는 순간순간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시험이 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데이터나 보고서의 숫자보다 더 중요한 건, 매 순간 자신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느냐였다. 그녀는 벤치에서 몸을 곧게 세웠다. 집중하고 또 집중해서 12주를 보내야 했다. 겉은 단단했지만 속은 고민으로 가득 찬 힘없는 존재였다. 이 절박함을 놓치지 않으려면.

일주일 만에 팀이 정해졌다. 팀원은 네 명이었다. 캠프 규정상 최소 세 명, 최대 다섯 명이 한 팀을 꾸려야 했다. 이미 서로를 아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묶인 팀도 있었고, 연줄이 없는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흩어져있었다.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았을 때 자연스럽게 모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전혀 이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강수진 옆에 정이든이 앉았고, 수진에게 웃어주던 이지혜는 하민형과는 아는사이 같았다. 그렇게 네 명이 한 팀이었다.

하민형이 이름을 지었다. 그는 도시연구소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다. 그 한 줄의 이력만으로도 팀 안에서 자리는 분명했다. 프로젝트의 구조를 이해하고, 문서 속 낯선 표현을 풀어내며, 숫자가 흘러가는 방향을 짚어낼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꺼낸 단어는 ‘제로블럭’이었다. 도시계획에서 출발점을 정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도면 위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좌표와 선 사이에서는 분명한 기준이 된다고. 다른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려면 그 기준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수진은 개념을 완벽히 그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는 척도 모르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중간은 갈수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지만, 의미가 담겨 있다는 감각은 전해졌다.

첫 과제는 서울의 빈집을 찾아 기록하는 일이었다. 민형은 며칠 동안 그저 걷자고 했다. 도시를 몸으로 받아야 현실이 드러난다고 했다. 가까이 다가가야 생각도 움직인다고. 멀리서 보면 잡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좋은 제안이었다. 팀원들은 낡은 간판을 올려다보고, 벽에 겹겹이 붙은 전단지를 바라보았다. 조용한 골목 어귀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며칠 동안 이어진 걸음은 가벼운 시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실제로 도시를 지나왔고, 그 흔적이 몸에 남겨졌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언제나 그렇듯 겹겹이 쌓인 간판들과 다닥다닥 붙은 주택들, 층간소음처럼 얽힌 소리들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비좁고, 시끄럽고, 조금 얄팍했다. 하지만 늘 새로운 느낌이 있었다. 부족한 것은 곧 채워지고, 방치되는 법은 없었다. 그게 수진이 알고 자라온 도시였다. 그러나 천천히, 아주 가까이에서 바라본 서울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골목을 걷다가, 그녀는 아주 작고 오래된 사진관 앞에서 멈췄다. 영업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된 듯했다. 보통 상점이 문을 닫으면 곧 철거되어 다음 세입자를 기다리게 마련인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철제 간판은 빛을 잃고 덜그럭거렸고, 굳게 닫힌 문 너머 유리창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겹겹이 붙어 있었다. 사진 속 웃음은, 오래전 치워지지 못한 시간 속에 갇혀 있었다. 수진은 한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낯선 사람들의 시간이 자신의 얼굴과 함께 박제된 듯한 기분이었다. 녹슨 손잡이를 가진 창문은, 얼마나 오래전에 버려졌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사진관 안쪽 어둠 속에서 움직임의 기척이 느껴졌다. 물론 그럴 리 없었지만 그 안에 누군가가 머물고 있는 편이 더 멋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미줄이 친 구석,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은 누군가가 숨어 있는 곳. 시간이 고여 있는 미스터리한 공간. 아주 낯선 서울이었다.

수진은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화면을 아주 닿지 않을 정도로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찰칵’ 하는 기계음을 토했다. 화면에는 녹슨 간판, 겹겹이 붙은 사람들의 사진, 그리고 얇게 깔려있는 먼지가 층을 만들고 있었다. 아주 사소한 손짓만으로 켜켜이 쌓인 시간이 잡혔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낡음은 뒤통수 쪽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이었다. 광고판이 번쩍이고, 공사장의 드릴 소리가 끊이지 않는 도시에서는 시간이 뒤로 흘러가는 순간을 잡아채기 어렵다. 그런데 서울을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으면서부터 전에 없던 균열들이 보였다.

흥미로운 점은, 늘 환하게 불을 밝히던 번화한 거리에도 어김없이 ‘공실’ 안내문이 현수막으로 걸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화려한 간판 아래 드리운 고가도로의 그림자, 그리고 눈앞의 낡은 사진관 같은 흔적들이 이어져 도시의 균열을 만들었다. 끝없이 번쩍이며 달려오던 도시가 이제는 잠시 멈춰 숨을 고르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낡음은 단순한 쇠락이 아니라, 다음 단계를 준비하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떨까? 등을 돌리고 멀어질 사람만 볼 수 있는, 늙은 도시의 이면이라면? 그리고 지금 보는 이 모습이 도시의 작은 주름들이라면? 지금이라면 서울도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조금씩 늙어왔을지 도 모른다. 그 사실을 성형하듯 교묘하게 숨겼을 뿐. 태어났거나 오래 살아온 토박이들은 충분히 만족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이주할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벽일 것이다. 어쩌면 그 벽이 바로 서울의 주름. 허물지 못하면 서울도 언젠간 늙어 병들어 죽을 것이다.

철제 간판이 바람에 부딪혀 금속음 하나를 흘렸다. 늦은 오후의 빛이 그 음을 따라 미끄러지듯 길게 늘어졌다. 수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떠날 준비를 시작한 마음이 도시의 숨을 다시 듣게 했다는 사실이, 이유를 묻기 전에 선명해졌다. 물속 생물이 처음 물 위에 떠올라 공기를 들이마실 때 느꼈을 막막함처럼 그와 비슷한 기척이, 천천히 그녀 안에 퍼지고 있었다. 다만 수진은 오늘 평생 살아왔던 서울의 생소한 하루가 지나갔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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