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by inome

센트럴시티에서 출발한 버스는 도심을 벗어나자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창밖 풍경은 정해진 규칙 없이 바뀌었지만, 차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이른 아침 내내 서두른 끝에 수진은 오른쪽 창가 자리에 겨우 몸을 밀어 넣었다. 어색한 옷차림에 목덜미로 스치는 에어컨 바람은 지나치게 싸늘했고, 종아리에는 버스 진동이 낮게 울렸다. 느슨하게 드리운 커튼 틈새로 막 떠오른 햇빛이 무릎 위를 집요하게 비췄다.

손에 들고 있는 건 조금 찌그러진 물병이었다. 안에 고인 물은 한 모금도 채 되지 않았지만, 쥐고 있어야 빈손 같지 않았다. 가방 속에는 쓸모없는 영수증과 뒤엉킨 충전선이 구겨져 있었다. 그녀는 괜히 손을 집어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차창 너머로는 같은 모양의 전봇대와 건물들이 흘러갔고, 그녀는 시선을 그쪽에 두면서도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그에게서 소식이 왔다. 갑작스레 연락이 끊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를 만나야만 할 일이 생겨버렸다. 갈지 말지를 정하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결정한 건 아니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깊이 고민할 여지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빈껍데기 같은 몸에 누군가가 대신 표를 끊어주고, 일정을 짜놓은 것처럼. 그녀는 그저 정해진 시간에 맞춰 움직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직 그의 체온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이미 그를 만나러 가는 길 위에 있었다.

버스는 오후에 작은 지방도시에 도착했다. 도시는 마치 시간에 오래 잠겨 있다가 이제 막 깨어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터미널 외벽에는 세월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벗겨진 페인트 사이로 드러난 시멘트가 어둡게 숨을 쉬었고, 출입문 위 '시외버스터미널'이라는 글자는 빛을 거의 잃어 원래 어떤 색이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유리창은 낡은 먼지로 흐릿했고, 그 너머 대합실은 생각보다 좁고 음침했다. 낡고 바랜 모습은 마치 옛 드라마의 세트장 같았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무심히 흩어졌고, 몇몇은 길 건너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 승강장 뒤편으로는 낡은 건물들과 간판들이 줄지어 있었다. 영어보다 한글 간판이 더 많았다. '쌀국수 9,000원', '누리 약국', '작은 분식점'. 각각 다른 세기에 만들어진 듯한 색감과 폰트를 지닌 간판들이 이상하리만치 어울렸다.

수진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무거운 가방 끈이 어깨를 짓눌렀고, 장시간 앉아 있어 목과 팔이 뻐근했다. 하지만 몸이 무거운 건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려야 할 곳에 내린 건 맞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와 겹겹이 쌓인 낡은 간판들이 익숙지 않았다. 그나마 이곳에 친척도, 추억도 없다는 점은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몸이 먼저 멈췄고 마음도 그걸 따랐다. 당장이라도 갈 수 있었지만 가지 못했다. 늦은 것은 아니었다. 내일이라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루는 일이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많은걸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도시. 오늘은 그 익명성에 숨고 내일 사람들 속에 숨는 것이 편할 것 같았다.

숙소를 예약했다. 그리고 걸어가기로 했다. 평소라면 택시를 타고 한 번에 이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아주 느리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싶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몸은 분명 힘들겠지만, 그 불편함조차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래도 멈춰 서 있는 것보다는, 걷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몇 블록쯤 지나서 하얀 외벽과 유리벽이 맞닿아 있는, 천장이 높게 뻗은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입구 위에는 큼지막하게 ‘공설시장’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꽤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무심코 지나치지 못했다. 보통 공설시장과는 규모와 형태가 달랐다. 전통시장이라기보다 유명 브랜드의 대형 마트처럼 보였다. 하지만 주변 풍경은 재개발이 전혀 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거대한 건물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다리가 붙어 있는 모습. 전형적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오래된 점포들이 줄지어 있었고, 각종 상점들이 다양한 상품을 팔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현대적인 시장 옆에 시간의 흔적이 묻어나는 작은 시장에 힘겹게 붙어있는 공간이었다. 수진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작은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갔다. 상품들은 멋쩍게 제자리를 지켜내고 있었다.

노인들이 많았다. 상품을 둘러보는 사람, 반찬을 담는 사람, 계산을 기다리는 사람 모두 대부분 머리가 희끗했다. 커다란 장바구니를 밀며 천천히 걷는 걸음, 계산대 앞에 나란히 선 허리 굽은 모습에서 도시의 속도가 보였다. 공설시장 내부 안내판에 청년몰이 있다고 적혀 있었지만, 청년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대도시의 유명 시장들은 대개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게 보통이다. 외국인이 많고, 가격표는 가끔 이중으로 붙어 있으며, 오랜 풍경은 어느새 상품이 되어 있다. 그래서 조금은 생기가 있고 새로움도 느껴진다. 하지만 이곳은 그와 정반대였다. 젊은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 육칠십 대 이상의 어르신들이었다. 그런데도 기묘하게 활기찼다. 낡았지만 살아 있었다.

무언가를 팔고 사고, 목소리가 오갔고, 느린 속도라도 멈춰 있지는 않았다. 다른 유명 재래시장보다 훨씬 더 분주한 것 같았다. 규모는 작았지만, 손이 더 많이 움직이는 것은 분명했다. 구경보다 거래가 우선인 곳. 현실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누구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스스로 돌아가고 있다는 듯, 오랜 세월 켜켜이 쌓아온 노하우가 있는, 그 자체로 완전한 세상처럼 보였다.

시장 안쪽의 간판들은 일정한 규격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정비한 것 같았다. 외부에서 손을 댄 느낌. 그 손때 없는 깔끔함이 낡은 시장 풍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삶의 흔적 대신 새 간판이 눈에 띄었다. 어쩌면 그것은 도시가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 같았다. 소멸되어가는 현실을 감추려는 안간힘이었다. 그 절박함이 싫지 않았다. 아직 시장은 좁고, 낮고, 드문드문했다. 이발소 하나, 세탁소 하나가 불쑥 튀어왔다.

오래되고 낡은 것은 충분히 낭만적이었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소박했다. 수진은 골목 모퉁이를 돌며 다시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바람이 가끔 난간에 걸려 있었고, 그럴 때마다 미용실 앞 걸린 수건이 조금씩 흔들렸다. 목에 닿는 공기가 어딘가 다른 것 같았다. 그리고 안내표지에 적힌 지명들이 낯설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도 익숙하지 않았다. 수진은 그런 차이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낯섦이 자신에게 ‘신선함’처럼 느껴진다는 점은 분명했다.

골목 끝에는 순댓국밥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간판에는 큼직하게 ‘100년 전통’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말은 장식이 아니었다. 국밥 냄새가 백 년 동안 이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다는 뜻이었다. 오래 묵은 냄새는 벽에도 배어 있고, 바람이 바뀔 때마다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수진은 걸음을 멈췄다. 밥을 먹어야 할까. 그 단순한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위가 저려 왔다. 토할 것 같은 기분, 명치끝이 날카롭게 조여들었다. 체한 것 같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오늘 하루, 입에 넣은 건 물 몇 모금뿐이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그랬다. 허기가 아니라, 비어 있는 속이 뒤틀린 것 같았다. 걸음을 더 옮기기가 힘들었다. 간판과 냄새, 그리고 ‘밥’이라는 단어 자체가 몸을 흔들었다. 그때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 얼굴이, 자신을 이곳으로 끌어온 사람이었다.

수진이 처음 그를 알게 된 건, 정확히 말하면 주황색 노선 승강장 끝, 에스컬레이터 옆 벽을 바라본 순간부터였다. 거기에는 작은 광고판이 붙어 있었다. 짙은 파랑 바탕에 민트색 글자. 회색 콘크리트 틈에서 유난히 선명했다. 보통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시선이 거기에 걸렸다. 수진은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단정한 셔츠와 검은 바지, 펌프스 힐. 약간 출출했다. 해는 기울고, 가로수 그림자가 승강장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거슬러 오르다 QR코드를 스캔했다. 화면에 단어들이 튀어 올랐다. #로컬 #스타트업 #도시재생. 새롭고, 어쩐지 단단한 단어들이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처럼 보였다. 그 순간, 심장이 아주 조금 빨리 뛰었다. 멈춰 있던 공기가 방향을 바꾸어,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는 듯했다.

"전통과 현대가 한 몸처럼 포개진 구도심", "빈 건물 리모델링"처럼 다양한 주제의 릴스가 피드에 가득했다. 그중 하나를 터치하자, 낡고 바랜 건물들 사이로 따스한 빛이 쏟아지는 풍경이 나타났다. 오래된 모습인데도 촌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감각적인 편집이 더해진 영상은 짧지만 강렬했다.

수진은 노트북 앞에 앉아 지원서를 작성했다. 화면 속 단어들, '로컬', '스타트업', '도시재생'이 파편처럼 흩뿌려져 반짝였다. 수도권 곳곳에 생겨나는 도농상생 직거래 장터, 오래된 건물을 새롭게 바꾼 공간들의 사진이 스크롤을 따라 이어졌다. 낯선 분야였지만, 왠지 모르게 끌렸다. 지난날 썼던 입사지원서들이 떠올렸다. 괜찮은 듯 웃었지만, 답이 없는 메일함을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서늘했던 기억. 그 기분은 선명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간절했다. 이번만큼은 다르게 써내고 싶었다.

손끝이 키보드에 닿자 심장이 출발 신호처럼 뛰었다. 검색창이 열리고 기사들이 쏟아졌다. 낡은 벽, 오래된 골목, 먼지 섞인 햇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장면들이 곧바로 문장으로 옮겨졌다. 흔한 표현 대신, 자신이 떠올린 풍경을 담아내자 글이 조금 달라졌다.

커서는 몇 번이나 지워지고 다시 쓰였다. 이 한 줄에서 누군가 내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까? 답을 알 수 없어도 손끝은 멈추지 않았다. 지역 농산물이 도시 카페 메뉴로 올라가고, 손수 만든 공예품이 낡은 건물 한쪽을 채우는 그림이 문장 속에 붙었다. 플랫폼 구조는 단순했다. 소규모 브랜드도 소비자에게 닿게 하는 ‘신뢰 기반 커머스’. 하지만 수진에게는 그게 단순한 모델이 아니었다. 비어 있던 골목이 팝업스토어로 살아나고, 폐공장이 공유 주방으로 바뀌는 장면이 겹쳐졌다.

며칠을 고심한 끝에 제출 버튼을 누른 뒤에도 수진은 한참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 창밖 풍경은 늘 보던 그대로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리 보였다. 작은 움직임이 큰 변화를 데려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한 달이 지날 무렵인가 받은 편지함 맨 위에 새 메일이 도착했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설렘이 번져갔다.

기분이 조금 들떴다. 나누고 싶었다. 이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저녁, 펍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시안컵 한국 경기가 방송될 거라는 소식도 있었다. 숙제를 끝낸 듯 홀가분한 마음과, 뭔가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는 기대가 수진 안에서 부풀어 올랐다.

이서에게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그동안 자신이 해온 일들, 앞으로 하려는 일들, 사소하지만 중요한 도전들. 혼자서 간직해온 설렘이, 이서와 함께라면 조금은 다른 색으로 번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서는 수진보다 그쪽에 더 밝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묻고 싶은 말도 많았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길 위의 가로등이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스쳐 지나갈 때도 수진은 미소를 지었다.

펍 안은 늘 그렇듯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의 함성과 웃음, 잔 부딪히는 소리. 커다란 스크린에서는 이미 경기가 시작되어 있었다. 이서에게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 우리 팀이 실수를 하는 장면을 먼저 보았다. 그리곤 골까지 허용하고 말았다.

순간, 마음이 날카롭게 움찔했다. 펍 안의 이유 없는 소음도, 스크린 앞 사람들의 시선도, 모두 사라진 듯했다. 오직 화면과 그 안의 순간만 존재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작스러운 소리와 함께 맥주가 이서에게 쏟아졌고, 작은 유리 조각이 바닥을 튕겨 그의 등 쪽으로 날아갔다. 수진은 숨이 잠깐 멎은 기분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시야는 좁혀졌고, 펍 안의 모든 것은 사라졌다. 오직 이서에게만 시선이 머물렀다.

다행히 이서는 몸을 숙여 균형을 잡았다. 수진도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고, 주변을 살폈다. 공기 속에는 아직 남자의 분노가 떠다니고 있었다. 무겁게, 천천히, 숨 쉬듯이. 수진은 이서가 위험해 보이는 것을 느끼자, 자연스럽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사람들은 흩어져 있었지만, 몇몇은 이미 상황을 주시하며 긴장한 눈빛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참을 수 없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순간, 그 남자에게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서가 손목을 잡았다. 힘이 강했다. 너무 강해서 수진은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팔에 전해지는 압력, 숨이 살짝 막히는 느낌이었다.

곧, 남자는 수진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위협적인 움직임이었다. 수진은 순간 얼어붙었고, 이서가 몸을 날려 그녀를 막는 장면을 확인했다. 짧은 충돌이었지만, 이서의 어깨에 남자의 팔이 스쳤고, 이서는 작은 충격을 받았다. 수진은 손끝이 떨리며, 동시에 어떤 안도감과 불안이 섞인 감정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은 재빨리 상황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수진은 그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서로 눈치를 보면서도 순식간에 팀처럼 행동하는 모습. 남자를 에워싸고, 이서와 수진을 안전한 테이블 뒤로 밀어내는 손길 하나하나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긴장감과 불안, 그리고 펍 특유의 열기가 뒤섞여 있었다.

이서는 숨을 고르고 화장실로 사라졌다. 수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불쾌함과 혼란이 뒤섞여 속을 휘저었다. ‘오늘은 날이 아니구나.’ 무심히 중얼거렸다. 화면 속 경기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 이서가 자신을 보호한 장면만 머릿속을 채웠다. 계획도, 자랑도, 아시안컵의 열기도 사라졌다. 남은 건 긴장과 허전함뿐이었다.

잠시 후, 핸드폰 화면이 깜빡였다. 집에 간다는 메시지였다. 수진은 한동안 화면을 내려놓지 못했다. 걱정 때문인지, 미안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순간, 손에서 놓아버리면 이서가 멀리 사라질 것처럼 느껴졌다. 수진은 곧바로 자리를 일어났다. 이유를 따질 새도 없었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문을 나서며, 그녀는 단 하나의 생각만 붙들고 있었다. 잡고 싶었다.

이서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단호함이 있었다. 짜증도 섞여 있었다. 예전 같으면 먼저 미안한 기색을 보였을 것이다. 수진은 멈칫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몇 걸음 뒤에서 걸음을 멈췄다. 준비한 말도, 자랑하고 싶던 일도, 경기에 대한 설렘도 모두 사라졌다. 남은 건 걱정과 혼란, 그리고 미안함뿐이었다. 그녀는 핸드폰 화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그날 이후, 이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메시지는 쌓여만 갔고, 알림은 계속 울렸다. 수진은 몇 번이고 화면을 확인했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다. 가끔 읽음 표시가 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수진은 그 침묵을 오래 바라봤다. 화가 난 걸까, 아니면 피곤한 걸까. 혹은 그냥 무심한 걸까. 어떤 답도 나오지 않았다. 마음은 가볍지 않았고,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참다못해, 수진은 짧은 문장을 보냈다.

정이서, 넌 진짜 상년이야.

그 말에는 여러 마음이 뒤섞여 있었다. 짜증, 걱정, 미안함, 그리고 체념 같은 것도. 보내고 나서 수진은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화면은 조용했고, 시간만 흘렀다.

예전에 누군가가 말했다. 친구라는 존재는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미워하게 되는 존재라고. 수진은 그 말을 문득 떠올렸다.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서 조용히 울리는 문장처럼. 애증이라는 말은 조금 과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서운함은 숨길 수 없었다.

언제나 이서가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배려했고, 눈치를 보고, 자리를 내주고, 말투를 부드럽게 조절했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였다.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낯선 손님처럼, 몸도 마음도 어딘가에 조심스레 두고, 한 발짝 물러선 채 주변을 살피는 사람. 거리감이 강렬했다.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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