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그리고 또 며칠 후. 평소보다 늦은 아홉 시 오십 분에 눈을 떴다. 창문 틈으로 허락 없이 들어온 빛이 힘없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핸드폰은 어떤 알람도, 메시지도 없이 그저 조용히 충전 되어 있었다. 아무렇지 않아야했던 그 날 이후, 이서는 약속이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물 한 잔을 마시고는 침대에 앉았다. 하루를 시작할 동기가 없었다. 정확히는 시작할 필요가 없었다.
스스로 멈춰 선 자리에서, 현실은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그녀의 숨통을 조여 왔다. 무기력하게 보낸 매일의 시간만큼, 용돈으로 채워진 통장 잔고는 바닥을 향해 줄어들었다. 다음 주에는 관리비와 월세가 빠져나갈 것이 분명했다. 그런 계산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짐을 싸서 떠나는 일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이 도시가 그녀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발목에 족쇄를 채운 탓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늘려야하나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선택처럼 보였지만, 그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구덩이에 발을 들이는 일이었다. 한번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삶의 일부가 되고, 반복되는 하루들 속에 굳건히 자리를 잡을 것이 뻔했다. 그것은 새로운 일상을 맞이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모든 시간은 무력감으로 채워지고, 주말이면 아무것도 못한 채 누워만 있게 될 것이다. 이서는 그런 흐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조금씩 무너져가는 자신의 모습을 어렴풋이 마주하게 될 것도.
처음 알바 면접을 보고 나오던 길에 그런 생각을 했다. 두 번째는 필요에 의한 것이지만, 세 번째부터는 관성이고, 네 번째부터는 굳이 이유를 말하지 않게 된다고. 그것은 익숙함이 덮어쓴 무서운 얼굴이었다. 살아간다기보다, 살아가게 되는 상태.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질게 분명했다.
그녀는 억지로라도 책상에 앉아 있었다. 특별히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줄 서류 한 장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하루 다섯 시간씩 노트에 필기를 하고, 문제지를 출력하고, 강의를 듣고 날짜를 적는 일. 그런 반복이 그녀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화려하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하루를 다음 날로 미뤄주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 지루한 반복이, 그녀를 짓누르는 답답함을 견디게 했다.
중심에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사람은 많았고, 빛은 넘쳤으며, 매일은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모든 새로움에는 값을 치러야 했다. 선택 하나에도 작은 요금이 붙었고, 그것들이 모여 하루가 되고, 그 하루들이 쌓여 한 달이 되었다. 이서는 자신이 점점 더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버티는 데 드는 체력과 감정의 여유가 함께 줄어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었다. 무너지지 않았다고 믿는 쪽에 조금 더 가까웠다. 가슴 한쪽, 잘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작게 남은 어떤 희망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특별한 이유 없이 자리를 지켜온 것이었다. 그건 어쩌면 아직 이 도시에 머물러 있는 이유와도 겹쳐 있었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 그녀는 그것을 손끝으로 간신히 쥔 채, 아무도 모르게 숨을 고르듯 조용히 붙잡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조금은 나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서 뭘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부모님은 아직 같은 집에 살고 계셨고, 거리의 이름도 바뀌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돌아가야 할 명분도 없었다. 시간은 이미 느린 방식으로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익숙했던 가게는 문을 닫았고, 예전 친구들은 연락처만 남긴 채 사라졌다. 여전한 곳이었지만, 그녀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될 수 있으면 집에만 머물렀고, 사람을 굳이 만나려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든 가까이 오는 게 싫었다. 외출을 할 때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피하고, 그냥 걸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도시 가장자리의 가느다란 경계석 위를 따라 걸었다. 뉴스와 해설, 누군가의 분석, 끝없는 말들이 귓속으로 흘러들었지만, 자신이 그 속에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래도 끊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라도 어딘가에 닿아 있어야 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엄마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바람처럼 얇게 흔들렸다.
“그래도 서울에 있으면 뭔가 생기지 않겠니. 조금만 더 버텨 보자.”
아빠는 옆에서 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파이팅, 우리 딸.”
이서는 단 한 번도 그 말을 끊지 않았다.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통화가 끝난 뒤 창가에 머물던 묵은 공기가 조금 더 무거워졌을 뿐이었다. 걱정의 모양을 한 말이었지만, 돌아오지 말고 서울에서 성공하라는 의미였다. 어쩔수 없이 귓속에는 엷은 감정의 얼룩 같은 것이 남겨졌다. 그때마다 그녀는 음악을 들었다. 노랫말도 멜로디도 오래 남지 않는, 아무 소리 없는 음악. 볼륨을 높여 그 텅 빈 소리가 머릿속을 채우면, 모든게 멈춰지는 감각의 세계가 열린다. 그렇게 하루를 비워냈다.
나가질 않으니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준호가 왔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커튼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살짝 흔들렸다. 원룸 안은 조용했고, 이서는 특별한 목적 없이 휴대폰 화면을 넘기고 있었다. 준호는 말없이 바닥에 앉았다. 오래전부터 익숙한 듯, 어색하지 않았다.
이서의 화면에는 ‘경기장 마스코트 체험’ 제목이 깜빡였다. 분홍 토끼가 잔디를 달리고 관중에게 손을 흔들었다.
휴대폰 상단에는 ‘수진 — 메시지 3건’이 깔려 있었다. 이서는 화면을 넘기며 손끝만 움직였다. 알람은 꺼져 있었다.
준호가 코웃음을 내며 말했다.
“안에 여자래. 그래서 동작이 좀… 요염하더라고.”
이서는 손가락을 멈췄다. 이어폰 하나를 빼서 아무렇게나 귀에 걸쳤다.
“여자라서 요염한 거야?” 목소리는 평범했다. 기운은 억제되어 있었다.
준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그렇게 보였어. 웃자고 한 말인데.”
“웃자고.” 이서는 단어를 그대로 되돌려놓았다. 눈은 화면을 향했지만 시선이 흔들렸다.
준호가 웃음을 더 크게 만들려다 멈칫했다. 손이 스마트폰 화면을 짚었다가 내렸다.
“뭐, 그런 걸로 왜 그래. 진짜 웃자고.”
이서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화면을 올려 수진의 이름을 스쳐 보았다. 손이 떨리진 않았다.
“여자라서, 그렇다고 보기 쉬운 거랑… 다르지 않아?” 말 끝에 힘이 실리진 않았지만, 문장에는 질문이 붙어 있었다.
준호가 눈을 깜빡이고, 짧게 웃음을 흘렸다.
“너도 웃어. 너무 집요하게 쳐다보지 마.”
준호의 손끝이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톡, 톡.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그는 무심한 듯했지만, 사실은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서는 여전히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시선 아래, 마음속에서 묘한 균열이 번지는 게 느껴졌다.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거리가 방 안에 얇게 깔려 있었다. 그것은 말 한마디로 풀릴 수도, 영영 고착될 수도 있는 종류의 침묵이었다. 준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이서 역시 굳이 이어갈 힘을 쓰지 않았다. 대신 방 안에는, 알 수 없는 공기의 잔향만이 오래 머물렀다.
그 무렵 둘은 자꾸 사소한 일로 부딪쳤다. 말투, 답장이 늦는 시간, 톡방에 남긴 짧은 표현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사소한 것들이 하나하나 공기처럼 방 안에 쌓여서, 어느 순간에는 숨을 막히게 했다. 한 번 잠잠해진 것 같다가도, 곧 다시 같은 이유로 신경전이 되살아났다.
둘 다 나름대로 애썼다. 준호는 유행하는 밈이나 짤을 보내며 웃음을 끌어내려 했고, 이서는 억지로라도 맞장구를 치며 분위기를 잇는 척했다. 하지만 그런 웃음은 쉽게 바닥이 드러났다. 웃는 순간조차도 어쩐지 서로의 거리를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말이 줄었고, 말이 줄자 침묵은 너무 쉽게 자리를 차지했다.
카페에 앉아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화는 드문드문 이어졌고, 그 사이엔 커피를 종이빨대로 휘젓거나, 콕콕 찔렀다. 장난스러운 말들도 오가지 않았다.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풍경처럼 당연했고 편안했다.
"오늘 면접 어땠어?"
준호는 수진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해야 할 말을 했다. 그저 흐르는 침묵을 막는 구멍을 찾는 것처럼 보일뿐 굳이 묻지 않아도 될 질문 같았다.
"그냥… 그랬어."
이서역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자소서도 제대로 안 읽은 것 같더라. 처음부터 뽑을 생각 없었던 느낌."
그녀의 목소리는 마른 먼지처럼 얇고 낮았다. 공기 중에서 흩어졌다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준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일단 넣긴 넣는데… 되는 데가 없더라."
잠시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각자의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있던 이서가 입술을 적셨다. 입을 열지 않으면 이 조용한 공기에서 자신이 더 옅어질 것 같았다.
"근데 있잖아."
준호가 그녀 쪽을 향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상하지 않아?”
이서는 창밖을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어디도 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늘 뭔가를 증명해야 해.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몇 살인지. 심지어 여자인 것도. 아니, 특히 여자인 것도.”
그녀는 말끝을 잠깐 접었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꺼냈다.
“그냥 실력으로 되는 게 아니야. 늘 한 겹 더 있어. 보여줘야 해. 말하지 않아도 알아. 여기선 여자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 번 밀려 있어. 아무도 그걸 말로 하진 않지만, 행동으로는 다 해. 똑같이 시작하는 것처럼 보여도, 난 항상 뒷걸음질로 뛰는 기분이야.”
그녀는 웃지도 않았다. 화도 내지 않았다. 그건 그냥 오래된 피로 같은 것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야. 여자들은 다 그렇게 느껴. 누군가 내 자리를 ‘배려’라고 부르잖아? 근데 그건 기회가 아니야.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주는 표지판 같은 거야. 움직이지 말라고. 너무 튀지 말라고.”
이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웃긴건 누구도 그렇게 대놓고 말하진 않아. 그게 더 이상해. 그냥, 그렇게 되는 거야. 괜찮은 척, 익숙한 척하게 돼. 안 그러면 이상한 사람이 되니까.”
준호는 커피위에 생긴 갈색 고리가 천천히 퍼지는 것을 한동안 바라봤다. 거품은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고, 그 모양은 마치 무너지는 도시의 미니어처 같았다. 그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시선을 바닥에 뒀다.
“근데…”
그가 입을 열었다.
“왜 항상 여자랑 남자를 나눠? 나도 똑같이 힘들어. 면접 보러 가면 아직 준비 중이냐는 눈빛 받고, 경력도 없고 배경도 없으니까 그냥 걸러지는 느낌이야. 가진 게 없다는 이유로 아예 시작도 못 하는 사람처럼.”
그는 말끝을 흐리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내 친구들도 다 그래. 밤새 알바 뛰고, 공모전 붙잡고, 열심히 살아. 누구도 쉬운 사람 없어. 근데 여자니까 더 힘들다고 하면… 솔직히 좀 헷갈려. 우리는, 아니 남자들이라고 뭔가 덜 아픈 건가?”
그는 이서를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요즘은 여자들 더 우대받는 것도 있잖아. 기업에서 여성 인재 뽑으려고 따로 채용도 하고, 배려도 하고… 가끔은 역차별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 말은 못 하지만. 남자라는 이유로 떨어지는 건 공정한 거야? 그냥 참아야해. 군대도 가야하고.”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준호는 자신이 방금 한 말이 불편한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후회하거나 하지 못할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 듯 했다.
“나도 너 이해하려고 해. 진짜로. 근데 그런 말 들으면… 마치 내가 가진 아픔은 아픔도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거야.”
이서는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준호의 얼굴을 천천히 따라갔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지만, 더 이상 무슨 말을 들어도 달라질 건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분명 외로움이었다.
“그런 얘기가 아니야.”
천천히, 또박또박한 목소리였다.
“내 말 듣기 싫은 거지? 왜 내 말을 네 방식으로 바꿔버려? 난 내가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을 말한 거야. 내 삶에서 일어난 일. 네가 잘못했다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쁘다는 것도 아니야. 그냥... 나한테 있었던 일들.”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서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말할까 말까 망설였던 말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은 사람 같았다.
“밤에 골목길 걸을 때, 이어폰 한 쪽만 끼는 거. 택시 타면 기사님 얼굴 미리 사진 찍어서 친구한테 보내는 거. 그런 거, 해본 적 있어?”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없겠지. 너는 안 해도 되니까.”
그녀의 손가락이 유리컵을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면접장에서 ‘여자 분은 어려우실 텐데요’ 같은 말은 안하지. 대신 돌려 말해. ”장기적으로 근무 가능하세요? 이 직무는 워라밸이 별로인데 괜찮으세요? 이 일은 체력적으로 힘든데 계속 하실 수 있겠어요? 야근이나 출장 잦은데, 괜찮으세요?”같은 식으로. 결국 같은 말이야. 여자라는 전제가 깔려 있고, 채용할 땐 그걸 계산해. 넌 이게 억지라고 생각해?”
조용한 말이었지만 분노보다는 오래된 피로가 느껴졌다.
“수학 못 할 것 같고, 리더십 없고, 감정적이고... 그런 말들. 들을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어. 아니, 진짜 아무렇지도 않다고 믿으려고 했어. 근데 웃긴 건 뭔지 알아? 그런 일들을 말하면, 오히려 내가 예민한 사람이 되는 거야.”
그녀는 다시 준호를 바라봤다. 표정은 단단하지도, 눈물짓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네가 내 편일 줄 알았어. 말 들어주는 사람일 줄. 근데 네가 그렇게 정색할 줄은 몰랐어.”
그녀는 잠깐 숨을 고르고, 마지막으로 천천히 덧붙였다.
“내가 누구한테도 말 못 했던 걸, 너한테 말해본 건데. 그것도 안 되는 거면… 대체 누구한테 말하라는 건지 모르겠어.”
준호는 조용히 이서의 말을 들었다. 이해하려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침묵했다. 그러다 마치 숨을 내쉬듯 무심한 말을 툭 뱉었다.
“사실… 얼마 전에 면접에서 ‘경력이 부족한 것 같다’는 말을 들었어. 그냥 ‘너는 안 된다’는 말처럼 들리더라. 집에 돌아와서 내가 진짜 무능력한가 싶어 잠도 못 잤어. 근데 오늘 네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치 내 아픔은 그런 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서 지쳐.”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카페 한쪽에서 얼음 조각이 텅 빈 유리잔 안을 굴러다니는 소리처럼,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이서의 귀엔 이상할 만큼 또렷하게 남았다. 도망치듯 흘린 말 같기도 했고, 오히려 깊은 진심처럼도 들렸다. 진심이라면, 오히려 더 난감한 일이었다. 이서는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불편해지는 걸 느꼈다. 그 불편함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날 저녁, 이서의 얼굴은 마치 먼 곳에서 떠내려 온 부유물 같았다. 지친다는 그의 말이 차가운 유리창에 부딪히는 불규칙한 빛처럼 이서의 마음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는 정말 이서의 말 때문에 지쳐버린 걸까? 아니면 그저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호한 방패였을까? 어느 쪽이든, 이서의 생각은 같은 자리만 맴돌았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은 어둠 속에 잠긴 역사의 플랫폼과 유사했다. 지하철은 덜컹거리며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그 누구도 어디에서 내릴지 말하지 않는 상황. 이서는 상관없는 풍경이 지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연락은 없었다. 휴대폰은 가끔씩 켜졌고, 배터리도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아무것도 도착하지 않았다. 이모티콘 하나, 짧은 단어 하나조차. 대화창은 멈춘 시간처럼 그대로였다. 둘 다 특별히 바쁜 건 아니었다. 그저,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막막했을 뿐이었다. 그리곤 며칠 후, 인스타 스토리에 짧은 영상 하나가 올라왔다. 배경음악은 뭔가 쿨하고 무심한 재즈. 영상 속엔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이서가 아닌 다른 사람이랑 웃고 떠드는 모습. ‘아, 끝났구나.’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차단도, 언팔도 없었다. 그저 서로의 세상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방식이었다.
한참 후, SNS 피드를 스크롤하다가 우연히 준호의 계정을 봤다. 예전에는 자신과 찍었던 챌린지 영상들이 가득했는데, 이젠 전부 삭제되고 없었다. 그 자리를 채운 건 혼자 찍은 릴스나 새로운 친구와의 여행 영상들. 말없이 모든 걸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그의 이별 방식인가 싶었다. 딱히 속상하지도 않았다. 그냥, ‘쿨하게’ 인정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이서는 문득, 축구장 마스코트 영상이 멈춘 장면을 떠올렸다. 둘의 관계도 거기서 멈춰 있었다. 한쪽은 농담이라 했고, 다른 한쪽은 그 말을 삼켰다. 간극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간극은 둘을 멀리 떨어뜨렸다. 끝을 말한 사람도 없고, 먼저 손을 내민 사람도 없었다. 말의 틈새 속에서 감정은 여름날 아이스크림처럼, 천천히 녹았다.
이별은 의외로 간단했다. 대개 그렇다. 거대한 폭발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진행된다. 어느 순간 돌아보면, 이미 멀어진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상하게도 담담했다. 다시 연락하고 싶다는 마음도 없었다. 보고 싶지도, 그립지도 않았다. 이별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조용했다. 마음 한구석이 찢어지는 일도, 밤마다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일도 없었다. 헤어진다는 것이 이렇게 아무 일도 아닌 듯 흘러갈 줄은 몰랐다.
단지 일부러 말수를 줄였고, 사람들과의 연락도 간간이만 이어갔다. 외로워서가 아니라 의도였다. 누군가가 조심스레 안부를 묻고, 가볍게 걱정해주는 그 마음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감정이 마치 얇은 유리 조각처럼 느껴졌다. 작은 스침에도 쉽게 부서져 버릴 것 같아, 이서는 차라리 그 조각들을 만지지 않기로 했다.
이서는 이게 참 이상했다. 다투지도 않았고, 길게 설명할 일도 없었다. 그냥 어느 날 문득, 끝나 있었다. 마치 창밖 유리에 스친 빗방울처럼. 닿고, 흘러내리고, 조용히 사라졌다. 관계란 결국 온기가 아니라 무게였다. 서로를 끌어당기고 붙잡아두는 보이지 않는 중력 같은 것. 가까이 있을 때는 그 힘에 따라 붙들렸고, 멀어지려 할 때는 그만큼 더 큰 힘이 필요했다. 감정을 주고받는 일은 가벼운 교류가 아니라, 서로의 궤도에 묶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별은 그 궤도를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속도를 내는 순간이었다. 짐을 드는 것도, 놓아버리는 것도 결국엔 선택이지만, 한 번 떨어져 나온 순간 다시 그 중력 안으로 쉽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변화가 있었다. 아침이면 손끝이 이유도 모르게 무겁게 내려앉았다가, 몇 걸음 옮길 때면 다시 살아난 듯 달아올랐다. 목과 어깨는 설명할 길 없는 떨림에 휘둘렸고, 어떤 날에는 몸속의 열기가 제 안에서 길을 잃은 불덩이처럼 흔들렸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다리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고, 눈앞의 풍경은 붙잡히는가 싶다가 금세 흘러내렸다. 방 안의 공기가 살짝 스치기만 해도, 피부 속 깊은 열기는 불꽃처럼 번졌다가 곧 사그라졌다. 잔열은 남아 있었고, 언제라도 다시 터질 듯 긴장을 놓지 않았다. 다스릴 수 없는 증상이었다. 밤이 저물고 새벽이 되어야 겨우 잠에 빠질 수 있었지만, 그 순간 기억은 사라졌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나서 이서는 겨우 날씨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창밖엔 햇살이 높은 건물 옆면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빛은 아래로, 그림자는 위로 번져나갔다. 공기가 천천히 섞이는 듯했다. 이서는 자기 몸에서 머물렀던 열의 흐름을 떠올렸다.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열은 언제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이다. 정점을 넘는 순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런 차이도 남지 않을 때, 모든 건 멈추었다. 열이 평형을 찾았을 때 이서는 처음으로 만약 죽는다면 이런 기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란스럽지 않고 단지 흐름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균형과 평형. 그리고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감각. 분명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