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밖

by inome

"감독이 병신인가! 저딴 식으로 선수 기용할 거면 왜 앉아 있냐고!“

남자의 목소리가 터지는 순간, 이서의 등 뒤로 맥주가 끈적하게 쏟아졌고, 작은 유리 조각이 함께 바닥으로 흩어졌다. 이서는 놀라서 손을 바닥에 짚고 겨우 균형을 잡았다. 차가운 액체가 옷과 피부를 적시는 감각은, 둔한 통증보다 훨씬 더 불쾌했다. 머릿속이 잠깐 비워졌다. 술 때문인지, 놀라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런 풍경에 이미 조금 익숙해져 있었는지도 몰랐다.

금요일 밤, 수진과 자주 오는 이 펍에서는 이런 장면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경험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잠깐 스친 생각. 원래 펍이 이런 곳인지, 아니면 수진이 하필 이런 곳을 좋아해서인지.
곧 그런 생각은 밀려났다. 수진 탓일 리는 없었다. 축구 얘기와 맥주 냄새가 뒤섞인 시끌벅적한 공간에서는, 언제든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원치 않았지만 온몸이 조금씩 부들부들 떨렸다. 중심을 잡는 것도 평소보다 힘들었다.

이서를 본 수진은 격앙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술기운과 분노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빛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날카로웠다. 그리곤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이서가 곧장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수진은 고집스럽게 몸을 뿌리쳤다. 짐승처럼 거칠고 본능적이었다. 테이블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서는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어 수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수진아, 제발.”

주변의 모든 시선이 두 사람에게 꽂혔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얼굴들, 당황과 호기심이 섞인 눈빛들이 그들을 둘러쌌다. 수진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분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은밀하고 강하게 타올랐다. 수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쏘아졌다.

"야, 이 새끼야! 여기서 꼭 그렇게 소리 질러야 돼? 너 혼자 축구 봐? 그리고 마시라고 준 술은 왜 뿌리고 지랄이야!"

순간 멋쩍어 하던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지체 없이 손을 뻗었다. 의도는 뻔했다. 위협이었다. 마치 곧이라도 수진의 어깨를 움켜쥐거나, 얼굴 앞에 손바닥을 내리칠 듯한 과장된 동작.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몸짓. 실제로 때리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 제스처만으로도 충분히 메시지는 전달되었다.

이서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수진을 감쌌다. 남자의 팔이 허공을 가르며 이서의 등에 스쳤다. 의도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순간적인 충격이 어깨에 부딪히며,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이서는 수진을 끌어안은 채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히고, 그대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펍을 정적으로 이끌었다. 이번엔 그 무엇보다 통증이 신경 쓰였다.

주변 테이블 사람들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처음엔 서로 눈치만 보던 사람들도, 바닥에 흩어진 맥주와 유리 조각, 그리고 수진과 이서를 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요?”
“다치진 않았죠?”

사람들은 동시에 움직였다. 한 사람은 남자의 팔을 잡고, 다른 사람은 그의 옆을 막았다. 남자는 당황했지만, 여전히 술기운과 화가 뒤섞여 있었다. 한 사람이 이서와 그 사이에 들어와 그의 시야를 차단했다. 그리곤 다른 사람이 수진과 이서를 안전한 테이블 뒤로 밀어냈다. 테이블과 의자를 손으로 눌러 넘어지지 않게 지탱했다. 아주 잘 연습된 사람들의 일사불란한 모습이었다.

단번에 모든 것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하지만 곧 흥분과 술기운은 가라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사람을 위협했다는 사실이 뒤섞여, 남자는 몇 초마다 몸을 떨었다. 주변 사람들은 말없이 단호한 눈빛으로 그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제한했다. 힘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집단적 압박과 제지였다.

이서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수진은 이서의 품에서 겨우 몸을 빼냈다. 다행히 더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오랜 습관, '조용히 섞여 사는 방식'이 방금 깨진 맥주잔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좀 닦으셔야 할 것 같아요."

누군가 물티슈를 내밀었다. 이서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가게 안의 소리가 다시 귀에 들어왔다. 스크린에서는 경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이서와 수진이었다. 소동은 파도처럼 지나간 흔적에 불과했다. 이서는 자신의 자리, 자신만의 작은 공간이 온전히 사라져버린 기분에 잠겼다. 목이 말랐다.

남자의 분노는, 어쩌면 일종의 소속감이었다. 지금의 경우에는 애국심. 수진도 혹은 이펍의 모두가 함께 느꼈던 마음. 하지만 강력한 일체감이 깨졌다. 경기는 끝나지 않았지만 수진과 이서 그리고 펍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 그 남자조차 애국심은 없었다. 오히려 지금 경기를 다시 보는 것이 일관성을 헤치는 일이었다.

이서는 그 순간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그건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이서는 사람들이 무서웠다. 정확하게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열기의 그림자를 두려워했다. 도시는 언제나 저런 방식으로 사람을 길들이려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보호받고 싶으면 같아져야한다는 교훈. 하지만 보다시피 눈앞의 집단의 열기는 작은 소동에도 금세 사라졌다. 잠깐 불타올랐다가, 금방 흩어져 버리는 감정. 모든 색은 얇게 칠해질 뿐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펍은 금세 원래 소음을 되찾았다. 함성, 웃음,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 조금 전의 소동은 공기 속에서 가볍게 흩어졌다.

이서의 눈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얼굴이 남아 있었다.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얼굴들. 그 사람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조금만 뒤처지면 잊히고, 상처를 입게 된다는 사실을. 오늘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유탄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도시가 요구하는 방식은 단순했다. 남들과 같은 속도로 걷고, 같은 박자로 호흡하는 것.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누구도 벗어날 수 없었다.

맥주가 속에서 요동쳤다. 목 안쪽이 쓰라리고, 어지러움이 몸을 따라왔다. 화장실로 걸어가는 동안, 그 모든 감각이 조금씩 겹쳐졌다. 거울 앞에 선 이서는 멍하게 자기 얼굴을 바라보다가, 어떤 표정도 감정도 없이 핸드폰을 들었다. 수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나 먼저 갈게. 옷에 맥주 냄새가 너무 심해서.

냄새 때문은 아니었다. 싫은 건 끈적이는 느낌이었다. 옷과 피부에 스며든 맥주, 그리고 그보다 더 끈적하게 달라붙은 불안과 불쾌함.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겠지만, 체면이 흐트러졌다. 단정한 삶이, 작은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하지만 늘 그랬듯,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조용히, 소심하게 몸을 움직였다. 도망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후퇴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 방식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몸 안에서 천천히 번졌다. 어쩌면 지금, 자신은 세상 밖으로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톡을 확인한 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급하게 따라붙었다. 다행이 이서는 멀리가지 못했다.

“야 야, 정이서! 잠깐만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냄새가 너무 심해서. 옷도 젖어버렸고. 아무래도 나 먼저 가야겠어.”

“야, 괜찮으면 그냥 같이 있자. 너 없으면 심심해.”

이서는 대답 대신 젖은 셔츠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축축한 맥주가 흘렀다.

“내가 괜찮아야 네가 괜찮은 거야. 내가 괜찮으려고 노력하잖아 지금.”

목소리가 떨렸다. 수진을 바라볼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평소라면 하지 못할 말을 쏟아낼 것 같았다. 소음과 맥주 냄새,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허락 없이 폐로 넘어오는 금요일 밤 공기가, 순간마다 숨을 막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느려졌다. 북적이는 거리, 눅눅한 바람, 지하철로 향하는 인도의 쾌쾌한 냄새. 온통 과장된 느낌이었다. 이어폰을 꽂았다.

지하철 안으로 몸을 실은 이서는 누구와도 눈이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맥주냄새에 젖어버린 몰골을 보란 듯이 내세우는 게 싫었다.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내가 괜찮으려고 노력하잖아 지금.’ 누구에게 확인받으려는 것도, 수진을 설득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자신을 향한 절규였다. 하지만 지금 ‘괜찮음’은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섞여 들어가는 방식이 무너졌다. 괜찮지 않았다. 셔츠를 다림질하고, 립밤을 같은 주머니에 넣고, 이어폰을 정해진 각도로 무심히 감는, 자신만을 위한 동작들마저 의미가 사라졌다. 몸이 움직여도 마음은 따라오지 않았다.

간절함은 드러내지 않는 편이 낫다. 보여주는 순간, 돌아오는 건 무시일 테니까. 그것은 면접장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돌아섰던 순간처럼. 혹은 누군가 말끝을 잘라버린 순간처럼. 지금은 특별한 감정이 없는 것 같지만, 마음 어딘가가 손바닥으로 살짝, 그러나 끊임없이 눌려 있는 듯했다. 숨은 들어오지만 부족한 산소량. 그 답답함이 명치를 천천히, 은근하게 눌러왔다.

집에 돌아와 젖은 셔츠를 벗었다. 맥주 냄새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더러워진 옷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평소라면 당장 깨끗이 닦았을 바닥의 흔적을, 그녀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굳이 기억을 꺼내지 않아도 반복되는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그녀를 안심시키지 못했다. 그저 자신을 짓누르는 습관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무엇이 안에 있는지, 무엇이 바깥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밤, 펍에서의 소동과 맥주,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 그리고 수진과의 거리감이 이서를 안도 밖도 아닌, 경계에 서게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경계가 아니라 ‘과’였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둘 사이의 공간.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잡을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흔적. 그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맥주처럼, 깨진 잔처럼 쓸모없게 변해버린 것들. 그것은 안에도 속하고 밖에도 속했다. 맥주가 틀림없지만 먹을 수없었고 담을 수 없는 유리잔이었다.

생각해보면, 안과 밖은 애초에 완전히 분리된 세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과’라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서로 다른 두 세계는 사실 하나의 세계였음을 알 수 있었다. 바닥의 유리 조각, 젖은 셔츠, 몸에 달라붙은 맥주 냄새까지, 그 모든 것은 이미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 속에 존재했다. 존재는 있지만 실체는 없고, 실체는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감각.

이서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공기의 냉기, 목덜미의 약간 뜨거운 감각, 바닥 위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 그 흔적이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상태가, 세상을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경계는 공간이 아니라 경험의 방식이었고, 존재한다는 것은 곧 느끼는 것임을.

이서는 더 이상 '괜찮아'라고 중얼거리지 않았다. 아무 힘이 없는 말. 대신, 자신에게 솔직한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이 도시에서 무얼 하고 싶은지. 그리고 왜 아직도 자신을 재단하고 압축하는 일에 익숙한지. 오늘 이서는 맥주와 유리 파편에 부서져 내리고 말았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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