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은 언제나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이유 같은 건 따로 없었다. 그냥 맥주가 당긴다거나, 오늘은 시끄러운 데가 좋겠다거나, 그런 식이었다. 그녀에게는 격식 같은 건 없었고, 셈 따위도 보이지 않았다. 늘 자기 방식때로 움직였지만, 이상하게도 그게 이서에게는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이서는 늘 어디에도 잘 섞이지 못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사람들 속에서 웃는 법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처럼. 하지만 수진은 그 틈을 자연스럽게 채워주었다. 손을 내밀어달라 부탁한 적도 없는데, 먼저 다가와 잡아주는 사람처럼.
문제라면, 그녀가 끌고 가는 펍마다 어김없이 커다란 스크린에 축구가 흘러나온다는 것이었다. 그 곳에 가면 세상의 중심이 언제나 그 공 하나에 달려 있는 듯했다. 이서에게는 조금 견디기 힘든 풍경이었다. 하지만 수진이 웃으면서 잔을 들면, 그 순간만큼은 괜찮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서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화면에서 공이 굴러가고, 알록달록한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쫓아다니는 모습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저렇게까지 열심히 뛰는 걸까. 그리고 왜 그걸 보면서 저토록 흥분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자기들끼리 취해 외치는 함성, 맥주잔을 부딪치며 쏟아내는 과장된 웃음, 사소한 말에 벌어지는 다툼. 이서 눈에는 모두 한심하게만 보였다. 실제로 그들은 호탕하지도, 대범하지도 않은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싫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펍에는 늘 맥주가 있었고, 그건 쌉싸름했지만 한 모금만 넘기면 머릿속이 가벼워지고 세상이 조금은 선명해졌다. 그 작은 위안이 있었다. 무엇보다 수진은 좋은 친구였다. 그녀는 언제나 불편한 것과 좋은 것을 한데 묶어 가져왔고, 이상하게도 그 때문에 쉽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싫으면서도 굳이 투덜거릴 이유는 없었다.
다행히 펍 안의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공간 자체는 무너지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 사이로 번지는 웃음과 소음, 허둥대는 몸짓 속에서, 이서는 충분히 자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따질 필요도 없었다. 이서는 그저 펍의 의자 하나처럼, 조명에 묻힌 벽지 조각처럼 거기 놓여 있었다. 그 정도라면 견딜 수 있었다.
아마 수진이 아니었다면 이서는 이런 자리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펍의 스크린 앞도, 지금 지하철을 타고 경기장으로 향하는 길도, 모두 수진이 불렀기 때문이었다. 수진은 자신이 이서를 ‘축구 세계’로 데려왔다고 믿었지만, 이서가 정말 즐기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서는 늘 초대받은 손님처럼 낯설었고, 환호와 욕설이 동시에 터질 때는 몸을 움츠리며 입을 꼭 다물었다. 마음이 전혀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수진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건 단지 이서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녀가 이서를 불러낸 이유는 단순했다. 같이 있으면 즐겁기 때문이었다.
지하철은 제시간에 들어왔다. 도시는 언제나 그렇듯 개인의 사정 같은 건 고려하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표대로, 오차 없이 같은 움직임을 반복할 뿐이었다. 이상한 건, 그 무심함 속에서도 가끔 은근한 배려 같은 것이 느껴졌다. 차갑게 굴면서도, 결국은 우리를 놓치지 않는 존재. 어쩌면 도시의 진짜 얼굴이 그런 게 아닐까. 이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이서는 오는 내내 이어폰을 꺼내지 않았다.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진동, 안내 방송까지, 모든 것을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플랫폼은 경기장으로 향하는 팬들로 북적였다.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평소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큰 목소리로 농담을 주고받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웃었다. 하지만 이서에게 그 자신감은 묘하게 불안정하게 보였다. 마치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균형 위를 걷는 사람들처럼. 이서는 그들 속에 섞이지 않았다.
이미 북쪽 광장 앞에서 수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목에 붉은 머플러, 손에는 작은 깃발. 이서가 다가가자 손목을 툭 치며 말했다.
“늦어! 다음엔 내가 집까지 끌어내야 하나?”
“제시간에 왔는데?” 이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경기장의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베이지색 외벽은 본래의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검붉은 유니폼을 입은 관중들이 거대한 그릇을 하나의 색으로 채웠다. 현수막이며 깃발, 그리고 유니폼이 거대한 붉은 물결을 만들었다. 그 틈에서 녹색 셔츠 몇 벌이 거대한 흐름에 반하는 역성의 힘처럼 보색을 이루며 부딪쳤다. 그들 역시 상기돼 있었다.
북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발걸음과 함성, 깃발이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였다. 수진이 이서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이서는 그냥 따라 걸었다. 가방을 검사하고 티켓을 확인한 후에야 경기장의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 통로를 지나서, 붉은 유니폼이 빽빽하게 차있는 자리를 찾았다. 모든 소음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녹색그라운드 끝에 걸려있는 골대 뒤, 녹색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묘하게 연결된 그 흐름이 긴장을 만들었다. 수진이 이서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이서는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 경기장 안과 밖은 공기의 떨림, 소리, 색, 그 모든 게 달랐다. 사람들의 긴장과 흥분이 응축되어 있었다.
수진이 골대 뒤편을 가리켰다.
“야, 저기 보이지? 녹색 옷 입은 애들. 거기가 원정석이야. 사실 네 자리 저기잖아? 네가 앉아야 되는 건 원래 저기야.”
수진의 말을 듣고 있던 이서는 허튼말이 생각났다. 지하철이나 비행기를 탈 때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오래된 농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아이에게만 통하는 말이지만 수진은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수진은 아무래도 이서가 어린아이처럼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서도 맞장구를 쳐주긴 했다.
“야, 뭐야. 창피하게 왜 그래.”
“왜? 틀린 말 아니잖아?” 수진은 조금 더 과장되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옆 사람 팔꿈치를 쿡쿡 찌르듯 웃어댔다. “얘, 원래 저쪽 사람이에요. 오늘 침투한 거라니까.”
수진이 소리 내어 깔깔대자, 주위의 시선이 불편하게 꽂혔다. 이서는 순간, 낯선 무리 속에 덩그러니 놓인 자신을 의식했다. 멋쩍게 따라 웃었지만, 웃음의 결은 달랐다. 수진은 분명 악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농담이 분명했다. 물론 자신이 중심이라는 확신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거리낌 없고 배려 없는 말이긴 했다.
수진의 웃음 섞인 농담은 다른 관중들의 환호에 묻혀 흘러갔다. 하지만 이서의 몸에는 이상하게 남았다.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낙인처럼 피부에 붙어버렸다. 그 순간 이서는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가 허락 없이 가져온 물건처럼 느껴졌다. 정말 여기에 있어도 되는지, 왜 굳이 따라왔는지, 대답이 막혔다. 억지로 끌려온 자리에서, 친구마저 가볍게 경계선을 그어버린 듯했다. 이 급작스런 감정 변화에 이서도 당황했다.
수진은 이서가 반 박자 느리게 웃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굳이 눈치 채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먼저 앞서나가고, 미소 짓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지만, 뒤에 따라오는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어쩌면 저 모습이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특권일지도 몰랐다. 애써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삶.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정체성. 이서에게는 특별했지만 수진에게는 평범한 삶.
이서는 고개를 들어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검은 색과 붉은색이 세로줄로 교차하는 풍경이 마치 물결처럼 보였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 틈에서 이서는 점점 더 위축되기 시작했다. 수진의 농담이 아니었더라도, 이미 마음속에서는 오래전부터 그런 선이 그어져 있었던 것 같다. ‘여기 사람’과 ‘거기 사람’을 나누는 선. 특별히 누가 묻지 않아도, 그 선은 스스로를 밀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서는 잠시, 그 경계선 바깥에 서 있는 자기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묘하게도 그 얼굴이, 지금껏 가장 솔직한 그리고 바뀌지 않는 자기의 본 모습일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쉽게 자신이 어디에 속한다고 말한다. 태어난 곳, 지금 살아가는 곳, 오래전에 떠나왔지만 여전히 자기 일부라 믿는 곳.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자신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어디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서에게는 늘 비어 있는 자리가 보였다.
현실은 단순하지 않았다. 대학이나 일 때문에 자리를 옮긴이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서울 사람’이라 불릴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언제든 경계 밖으로 밀려날 수도 있었다. 이서도 그들 중 하나였다. 지금 이곳에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늘 조금 겉도는 기분이 따라다녔다. 중심에 선 이들에게만 시선이 모이고, 그 틈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럴 때 마다 이서는 서울사람이 되고 싶은 것인지 서울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것인지 자주 헷갈렸다.
이서의 삶은 어디에도 완전히 닿아 있지 않았다. 가족의 자리도 아니었고, 오래된 뿌리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낯선 여행자로만 남을 수도 없었다. 대학을 이유로 이곳에 와서, 그 선택이 그녀의 방향을 정해버렸다. 설렘과 기대가 있었던 초반과 달리, 지금 남은 건 방 한쪽에 쌓인 책더미, 모양도 맞지 않는 식기, 낡아진 전기장판, 테이프로 붙여놓은 멀티탭 같은 사소한 흔적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자신도 모르게 이곳에 뿌리내려 버렸다는 증거였다.
이서가 취업에 실패한다면,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위치는,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과 닮았을지도 몰랐다. 마음 한쪽이 늘 애매했다. 짐은 풀었지만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상태였다. 확신 없이 머무는 일은 생각보다 사람을 빨리 지치게 했다. 어느 쪽도 확실히 주장할 수 없고, 그만두기엔 조금 아쉬운 상황. 이서는 자신이 여기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생존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정당화하기 위한 일이었다. ‘특별시민’이라는 말에 의심이 생기지 않도록, 일종의 사전 방어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수진의 부름에 기꺼이 온 것이긴 했다.
수진을 떠올리면 그 차이는 더욱 뚜렷했다. 수진은 태어날 때부터 이곳에 있었다. 특별한 설명 없이 익힌 길과 건물, 계절의 흐름. 이미 중심에 있는 사람. 그녀에겐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자유로움은 동시에,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뜻했다. 수진은 그런 걸 고민하지 않는다. 아니, 고민해야 할 이유 자체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곳에서 자랐고, 지금도 살아간다. 이 도시는 그녀에게 질문이 아닌 대답이었다. 태어난 곳이자, 살아가는 곳, 돌아갈 필요 없는 고향. 늘 같은 이름을 가진 장소.
수진에게 이 도시는 공기 같았다. 태어나면서 부터 이미 한 몸이었다.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 길과 건물, 계절까지 자연스럽게 몸에 밴 생활의 질감. 이서가 부러워한 건 바로 그 점이었다.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 설명을 요구받지 않는 자리. 마치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예약된 좌석처럼,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확실함.
“이거, 받아. 서울시민 전용 커피.”
수진이 커피 두 잔을 캐리어째 내밀며 깃발 하나를 이서 쪽으로 흔들었다. 깃발은 하얀 플라스틱 막대에 검붉은 색을 강조한 디자인이 조심스럽게 감겨 있었다.
“뭐야, 또 시작이네. 언제까지 놀릴 건데. 그리고 이건 또 뭐야?”
“커피? 이 커피로 말하자면 흠석에서만 팔아. 원정석에선 못 먹어, 몰랐지?”
수진이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그리고 이거—깃발. 원래는 돈 받고 파는 건데, 오늘 빅게임이라 그런지 그냥 뿌리더라. 공짜야.”
“진짜? 그냥 나눠준다고?”
“어. 줄 서 있는데 앞에서 갑자기 나눠주더라고. 근데 너 이거 안 들고 있으면 좀… 촌티가 나.”
“촌티?”
“응. 유니폼도 없고, 커피도 없고, 깃발도 없고... 딱 봐도 어설픈 느낌.”
“아 진짜. 너 왜 그래?”
수진의 말은 대체로 사실이었다. 물론 장난이었고, 동시에 장난이 아니었다. 지금 이 경기장은 분명 수진의 홈이 분명했다. 국가대표 경기가 있는 날엔 잠시 그 주인이 바뀌지만, 평소에는 서울이 주인이다. 오늘은 원래의 주인이 돌아왔다. 수진이 어렸을 때 가끔 아빠 손을 잡고 드나든 곳. 수없이 지나친 출입구, 경기 시작 전 줄을 서던 계단, 수진이 어릴 적 익혀버린 질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경기장 안은 검붉은 색과 녹색이 맞부딪치는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여기저기 깃발이 솟구쳤고, 북소리는 쉴 틈 없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몇몇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마치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특별한 의식 같았다. 이서는 그 한가운데 앉아 있으면서도, 끝내 합류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니폼도, 깃발도 없는 모습이 괜히 더 드러나는 것 같아서 온통 신경이 쓰였다. 모두가 같은 박자에 맞춰 움직이는데도 자신만 엇나간 박자를 짚는 사람처럼.
그 느낌은 단순히 ‘처음 와서 낯설다’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이서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의 열광이, 누군가에겐 강한 소속감을 주는 동시에, 자신 같은 사람을 미묘하게 밀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국가대표 경기가 열리면 잠시 모두가 하나의 색으로 묶이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원래의 주인이 돌아와 자리를 차지하고, 서울이 아닌 이질감 있는 존재들은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밀어냈다. 오늘은 그 ‘원래의 질서’ 속이었다. 이서는 언제든 바깥으로 미끄러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순간 가족사진에 잘못 들어온 얼굴처럼 느껴졌다. 웃음과 포즈가 완벽하게 맞춰진 틀 속에, 의도치 않게 찍혀버린 낯선 표정 하나. 지워져야 자연스러워지는, 그러나 이미 박제되어버린 이질감. 이서는 스스로를 그 불필요한 여백으로 자각했다. 마치 이 경기장이 증명해주는 것은 열광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사실뿐인 것처럼. 누구든 하루아침에 중심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걸, 이서는 안다. 환호와 외면은 사실 같은 무대의 양쪽이었다.
수진이 말한 대로, 이서에게 녹색은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편안하거나 그리운 색이 아니었다. 숨 쉬던 세계의 일부였지만, 동시에 자신을 힘들게하는 색이기도 했다. 운동회 준비로 비워졌던 학교 운동장의 풀이든, 비 온 뒤 눅눅하게 남은 흙냄새든, 낮게 깔린 잡풀들이든, 녹색은 늘 그녀 곁에 있었고, 오래된 기억 속에서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들판, 서늘한 그늘 속에 쌓인 꽃가루, 그리고 그 안에서 가만히 존재하던 그 모든 순간이 이서에게 녹색으로 남아 있었다. 특별하거나 아름다운 기억이 아니라, 조금은 무기력하고 지겨운 그래서 더 선명하게 자신을 알아보게 하는 색.
이서는 말없이 녹색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마음 한쪽에는 불편함이 깔려 있었다. 그것은 그리움이나 애틋함이 아니라, 원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언제라도 묶여있던 감정이 튀어나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서있었던 수진이 옆에 툭 앉았다.
“야, 너 오늘 왜 이렇게 얼빠졌냐.”
이서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얼?”
“응. 완전 멍 때리는 사람 있잖아.”
수진은 혼자 킥 하고 웃었다.
“별생각 없었어.”
“거 봐. 생각은 없는데 뭔가가 있긴 있네.”
“혹시 저기 녹색유니폼 애들 보면서 고향 생각이라도 난거야?”
“뭔 소리야? 아니거든.”
“근데 표정이 딱 그래. 할머니가 고구마 삶아줄 것 같은 표정.”
“뭔 헛소리야.”
“에이, 웃자고 한 소리지~ 정색하긴.”
수진이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그 순간, 신경질적인 소음이 이서의 귀에 들어왔다. 북소리, 자잘한 고함들. 관중이라기보다, 관중 사이에 끼어 있는, 약간 다른 시간대의 사람 같았다.
“알지. 근데 그거 알아? 나 서울말은 익숙해졌는데, 이상하게 아직도 이 도시에 발 딛고 못 선 느낌이야. 몇 년이나 살았는데도.”
수진이 웃었다.
“오늘은 좀… 유니폼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네가 어색한 거겠지. 그래서 우리에게 허락 못 받은 기분일 수도 있고.”
잠시 숨을 고른 뒤, 그녀가 이어 말했다.
“넌 연고는 아니지만, 서울에 살고 있으니까 어쩌면 연고가 될 수도 있고. 게다가 넌 강팀만 좋아하는 강팀충도 아니잖아. 축구도 잘 모르고.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가 곧 환영해야 할지도 몰라.”
허락이라니, 분명 웃긴 말이었다. 하지만 이서는 웃지 못했다. 오히려 정확한 표현 같았다. 목청을 돋우는 소리, 따뜻한 커피, 땀 냄새, 흙냄새, 열기, 기대감,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의 외로움. 그것들이 뒤섞여,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온기를 만들고 있었다. 연고니 강팀충이니 하는 말들은, 그 순간 한쪽 귀로 들어왔다가 흩어져버렸다.
경기가 시작됐을 무렵, 이서는 붉게 출렁이는 물결과 초록의 정적 사이에서 아주 잠깐 망설였다. 어느 쪽이든 조금씩은 닿아 있었고, 동시에 완전히 속하지도 못한 채였다. 수진은 이미 경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몸을 들썩이며, 박수를 치고, 목소리를 크게 외쳤다. 그것은 그냥 수진다웠다. 이서는 아직 자신이 이 도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지 지금은 이곳사람들과 나란히 경기를 보고 있고, 같은 커피를 마시고, 웃기도 한다. 그 정도면, 적어도 오늘은 충분했다.
이서는 수진이 건네준 검붉은 깃발을 꼭 쥐었다. 땀이 날정도로 세게. 깃대 끝이 천천히 떨리고 있었다. 그리곤 흔들었다. 어느 팀을 응원하는지는 분명했다. 그것은 이서의 명확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움켜질수록 헛헛했다. 그 노력만으로는 그 무엇도 증명할 수 없다는 듯.
어쩌면 자신이 속하고 싶은 서울이야말로 유일한 지방도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중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수한 주변부가 겹겹이 쌓인 도시. 오리지널이 아닌 자신과 같은 전혀 다른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풍경. 마치 모두가 잠시 머물다 가는 호텔 로비 같은 장소처럼. 어쩌면 실제로 중심은 없고, 다양한 이미지가 가득한 곳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방향만으로 성격이 만들어지는 곳. 그렇다면 어디에서 왔는지가 그리 중요한 문제일까 했다.
다시 곰씹어 생각했다. 누가 진짜 서울사람일까. 어쩌면 ‘진짜’라는 단어 자체가 무의미한 건 아닐까. 수진의 머플러에서 나는 인공 섬유 냄새, 깃발을 흔드는 사람들 사이로 들리는 함성, 그리고 관중석 사이에 어색하게 앉아야만 어울리는 자신. 그런 것들이 얽혀서, 이름을 붙이긴 어렵고,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감정이 만들어졌다.
추가시간, 한순간이었다. 하나의 시퀀스는 너무 쉽게 혹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닫혀버렸다. 낮고 투박한 걷어내기. 수비수의 발끝을 벗어난 공은 멀리 가지 못하고 상대팀 최전방 공격수 앞에 떨어졌다. 사냥감을 사냥하겠다는 짐승의 얼굴. 녹색 유니폼의 공격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발끝에 걸린 골은 미끄러지듯 골망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세상은 온통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이서 역시 숨을 들이쉬는 걸 잊었다. 페트병을 구겨지는 소리.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 그 순간 멀리서 터져 나오는 함성. 관중들이 일거에 일어나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붉은색으로 덮였던 경기장은 점차 회색으로 바뀌었다. 그럴수록 녹색은 더 선명해졌다.
“역시나 찌질! 역시나 찌질!”
“꺼져라 삼류! 꺼져라 삼류!”
원정팀 팬들이 홈팀 팬들에게 외쳤다. 하지만 같은 구호가 반복됐고, 이번엔 확실히 들렸다. “역시나 찌질! 꺼져라 삼류!” 그 말들이 공기를 가르며 붉은 유니폼 팬들 사이를 날아다녔다. 지금 이 곳에서 저 사람들이 찌질 한 삼류를 외쳤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찌질한 사람도 삼류처럼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저 말 버릇은 습관인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고치지 않은 버릇. 너무나 익숙해서 화가 치밀었다. 그 순간 이서는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 법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저 말을 수용한다는 듯 그 누구도 나서서 항변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저항하고 싸우려드는 사람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단순한 경기였던 것이, 갑자기 알 수 없는 서사와 적의로 가득했다. 더 의문인 것은 그 누구도 나서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진역시 입을 굳게 다문 채 원정석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분하고 화난 것 같은 얼굴. 턱이 단단히 다물어 있었고, 눈빛은 싸늘했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새끼들 또 시작이네. 비아냥거리기나 하는 촌놈에 새끼들이.” 그 말은 혼자 하는 욕이었고, 자신만의 단정이었다. 이서에게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말들. 수진은 그 단어를 지방에서 올라온 이서의 눈앞에서, 거침없이 내뱉었다.
평소 수진은 무뚝뚝했지만 매너는 분명했다. 말은 차분했고, 행동엔 가식이 없었다. 그래서 얄밉게 잘난 척을 해도, 사람들이 쉽게 등을 돌리진 않았다. 오히려 ‘내 편’이라 마음먹으면 끝까지 지켜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수진은 달랐다. 표정이 낯설 만큼 날이 서 있었다.
“야… 뭐야. 왜 그래? 괜찮아?”
이서가 조심스럽게 묻자, 수진이 눈을 들어 똑바로 바라봤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갑자기 터진 웃음.
“푸. 아, 미안. 너 아직 분위기 파악 못 했구나.”
그녀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낮게 이어 말했다.
“축구는 단순히 공만 차는 게 아니야. 이건 문화고, 전쟁 같은 판타지야. 팀이 갈리는 순간, 삶도 갈려. 우리 편을 응원한다는 건, 상대를 마음껏 미워할 권리를 얻는 거거든. 너, 여기 앉아 있는 거—그거 자체가 기적이야. 이기는 팀이 다 가져가. 진 쪽은 불평도 못 해. 억울하면? 이겨야지. 그게 이 바닥 룰이야. 웃기지 않냐?”
경기장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니네 팀… 두고 봐. 다음엔 반드시 잡는다.”
순간, 소음 가득한 경기장 속에서 둘 사이만 공기가 얼어붙었다. 수진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계속 이서를 밀어내는 말을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수진의 의식에서는 여전히 이서는 이방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홈에서는 8년이야.”
수진이 이를 꽉 씹듯 내뱉었다.
“원정에서도 다 졌어. 단 한 번, 재작년 니네 홈에서 크게 이긴 거. 그거 하나뿐이야. 우리 팀? 평소엔 잘해. 근데 너희만 만나면 꼭 무너져. 제 실력도 못 보여. 그게 더 미친 듯이 열 받는 거야.”
이서는 수진이 말한 ‘니네’라는 단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자기 팀 골대 앞에서 목이 잠길 정도로 소리 지르던 순간이 떠올랐다. 게다가 서울연고에 속한다면 환영해야한다는 말까지. 그 열기와, 지금 수진이 내뱉는 날선 말이 머릿속에서 스치듯 부딪혔다. 하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미워하는 대상이 같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이미 같은 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을까, 싶은 기분이었다.
“저 새끼들… 진짜…”
수진의 목소리가 허공을 긁고 지나갔다. 원정석을 겨냥한 말이었지만, 벽에 튕겨 나온 소리처럼 가까운 자리만 채웠다. 정작 맞아야 할 사람들은 웃고 있었고, 듣지 않아도 될 쪽만 그 독한 기운을 떠안았다. 농담 같지만, 웃을 수 없었다.
곧 원정석에서 구호가 터졌다. “찌질! 삼류!”
공기가 쪼개지는 순간이었다. 목소리보다 강력한 압력, 수십 개의 목이 동시에 열리며 경기장을 거대한 울림통으로 만들었다.
이서는 움직이지 못했다. 파도처럼 부딪혀오는 소리. 익숙했다. 이미 여러 번 들어온, 조롱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 가슴이 조여 왔고, 숨은 반쯤 잘려 나갔다. 손끝이 차갑게 굳고, 뼈 속까지 얼어붙는 느낌.
숨이 막혔다. 심장은 안쪽에서 압착되듯 쪼여왔다. 손끝은 힘을 잃고 굳었다. 보이지 않는 압력이 뼈와 근육을 누르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목구멍은 단단히 잠겨 단어 하나 내뱉을 수 없었다. 공기 자체가 목을 막는 것 같았다. 경기장은 압력솥처럼 변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증기가 뚜껑을 떠밀고, 언제 터질지 알 수 없었다. 이서는 그 순간을 온몸으로 버텨야 했다.
붉은 파도와 녹색 물결이 눈앞에서 뒤엉켰다. 소리들이 망치처럼 머리를 내려쳤다. 의자에 붙어 있어도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손에 쥔 깃발은 제멋대로 떨렸고, 떨림이 팔과 온몸을 타고 퍼졌다. 구호와 환호가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듯했다. 낯설지 않았다. 너무 익숙했다.
도망칠 수 없는 심문. 목이 타들고, 시야가 점점 좁혀졌다. 사람들의 얼굴이 이목구비가 아닌 괴물 같은 형체로 변했다. 이서는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웃음도, 말도, 표정도 나오지 않았다. 소음 속에서 혼자 다른 시공간에 갇힌 사람처럼. 이유는 말할 수 없었다. 단지, 녹색이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