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에반스

by inome

0 s, 100 ∘C


이서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사상식집은 책상 한켠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손은 자꾸만 트랙패드로 향했다.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영상들, 브이로그나 요리 방송, 자기계발 강연 같은 것들. 금세 잊혀질 이야기였지만, 그 잊힘이 오히려 위로처럼 느껴졌다.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 누군가의 삶을 가만히 지켜보는 일.

하루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갔다. 점심은 편의점에서 집어든 삼각김밥 하나면 충분했고, 저녁은 아침에 데워놓았던 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간편했지만, 맛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밖에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면접이 잡혔거나, 도저히 미룰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만 가방을 챙겼다. 나가는 건 이상하게 겁나는 일이었다.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얼굴도 그렇고, 스쳐가는 사람들의 눈빛도 그랬다. 아직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사람이라는 게, 말없이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일, 적당한 표정을 짓는 일도 버거웠다.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이는 게 너무 싫었다. 형편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말조차 딱히 없었다. 게다가 이별도 있었다.

그저 습관처럼 서류를 작성했다. ‘지원하기’를 눌렀고, 결과를 기다렸다. 하지만 떨어졌고, 또 떨어졌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을 조리 있게 포장해내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밤이 되면, 작은 스탠드 하나만 켰다. 그 불빛 아래 노트북을 열고, 이력서를 봤다. 특별한 경험도, 대단한 성과도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살아온 흔적을 슬라이스처럼 썰어놓은 것 같았다.

자개소개서를 쓰려다 몇 줄 만에 멈추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처음으로 돌아갔다. 어릴 적 독서록을 쓸 때처럼, 형식은 알겠는데 안에서 끌어올릴 말이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턴가 자기소개서도 인공지능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합격하는 자소서’, ‘20대 여성’. 그렇게 복사하고, 붙이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 조금을 더해주면 어느 순간 점점 규격에 맞는 사람처럼 보였다.

거울 앞에 서서 자기 얼굴을 오래 바라보는 버릇도 생겼다. 셔츠를 입고, 머리를 말리고, 립스틱을 바르고 나면, 어디론가 가야 할 것 같았지만, 갈 데는 없었다. 현실이 그랬다. 그러면 다시 옷을 벗고, 화장을 지우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 모든 과정이 하나의 공연 같았다. 관객은 없지만, 공연은 계속되었다. 오직 거울을 향해 연기되는 장면. 어느 부분부터가 진짜였는지, 어느 부분부터가 흉내였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서는 그 짧은 장면 속에서 잠깐이나마 ‘존재하는 사람’의 얼굴을 가지게 되는 느낌을 받았다. 거울 속의 자신은 적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계절은 바쁘게 바뀌었다. 달력은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고, 기상청도 새삼스레 낮 기온을 올려다놓았지만, 그녀에게 오늘은 여전히 질감 없는 투명 필름 같았다. 창밖에서는 매끈한 분홍빛이 떠다닌다는데, 유리창을 통과한 풍경은 TV 화면처럼 멀고 평평했다. 바람이 두께를 바꿔도, 그녀의 하루는 늘 같은 속도로 흘렀다. 그런데 크게 달라진 것이라곤 없었다.

휴대폰은 며칠째 조용했다. 알림은 껍질 속에 숨은 달팽이처럼 꼼짝하지 않았고, 이서도 더는 연락처 목록을 넘기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는 게 편했다. 설명도, 표정도 필요 없었다. 대신 아주 얇고 단단한 고립은 받아들어야 했다. 하지만 반품도 교환도 불가능한, 그런 종류였다.

알고리즘만 제 역할을 했다. 새벽이면 빌 에반스의 재즈가 시간을 채워줬다. 아무런 의욕 없이 보낼 수 있는 호사스러운 시간이었다. 점심 무렵엔 누군가가 적어 놓은 “오늘도 애썼어요”라는 밑줄 친 문장 이미지가 피드 맨 위에 올려놓았다. 이서는 그걸 한참 바라보다, 별다른 생각 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지만 어떤 감정도 남기지 않았다.

납작한 하루의 표면에서 그녀가 붙잡은 것은 루틴뿐이었다. 샴푸를 짜내고, 드라이어 스위치를 눌러 바람을 흩뿌리고, 셔츠 목깃을 곧게 세우는 일. 그것들은 더 이상 의지라 부르기에도, 저항이라 설명하기에도 모호했다. 습관이 무심히 그녀를 지탱했고, 그녀는 그 틈에서 느릿하게 증발하고 있었다.

방안의 묵은 커피 향이 가라앉을 즈음 창문이 살짝 흔들렸다. 어쩌면 봄바람일지도 모른다, 하고 생각했다. 확인하러 나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순간적으로 돌아본 시계 바늘이 한 칸 옮겨 가는 장면만큼은 또렷했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아주 작게 어딘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수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며칠째 알람도 없던 폰이었다. 삑, 하는 짧은 진동이 낯설었다. 이서는 무의식적으로 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수진은 이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처음 말을 튼 친구였다. 오리엔테이션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고, 그 이후로 무슨 일만 생기면 “야, 나랑 조 짜자” 하며 이서를 끌어당겼다. 늘 먼저 웃었고, 먼저 정리를 했고, 먼저 나섰다. 이서는 그런 성격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수진이 있으면 애쓰지 않아도 묻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얼마 전 펍에서의 일 때문에 당분간은 피하고 싶었다.

“여보세요?”
“야—! 정이서!” 수진의 첫마디는 여느 때처럼 탄력이 넘쳤다. “살아는 있냐?”
“숨은 쉬고 있어.” 이서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며칠째 말 한마디 안 한 게 들킬까 봐, 휴대폰을 입에서 조금 떼었다.
“거 봐. 또 방에 틀어박혀 있었지? 오늘 개축 보러 가자. 너네랑 우리랑 붙어.”
“오늘? 개축?” 이서는 멍한 눈으로 달력을 바라봤다. 붉은 숫자가 시야에 어렴풋이 들어왔다. 솔직히 수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조차 잘 안 들렸다.
“응. 개축몰라? K리그. 네 고향 촌놈들이 여기까지 올라왔다고. 입장권 두 장 겟했어. 직관은 처음이지? 그냥 오기만 하면 돼. 샐럽이 되려면 축구장에 가야지.”

수진의 말투는 단단했다. 말끝에 힘이 실려 있었다. 사람 하나를 끌어내기에는 충분한 힘이었다. 과제 발표 순서를 정할 때도 그랬다. “정이서, 마지막 파트 네가 해야 분위기 살잖아”라고 밀어붙이던 모습 그대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 요즘 공부 때문에—”

“알지. 네가 요즘 공부라는 핑계로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 수진은 말을 끊고 웃었다. “야. 뭐, 또 떨어질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어. 그래도 숨은 좀 쉬어야지. 바깥공기 마셔야 안 죽어.” 조금 뜸을 들이던 그녀가 덧붙였다. “아니면 내가 직접 간다. 지금 당장 옷 입는 게 나을걸.”

이서는 입을 다물었다. 몇 번 떨어졌는지는 이제 세지 않는다. 수진이 그걸 알고 있다는 것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포기하고 수진을 따르는 게 나았다. 분명 그녀는 쳐들어올 게 뻔했다. 포기할 성격이 아니니까.

“알았어. 준비할게.”

전화를 끊고 나서야 방 안의 정적이 다시 귀에 들어왔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바깥은 놀랄 만큼 고요했지만, 이서는 문득 이 조용함이 세상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 때문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직관이라니 선뜻 내키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속이 조금 뒤엉키는 것 같았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