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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음 Dec 25. 2020

민음사 방문기 (2) - 첫 미팅

미팅 시간보다 1시간 이르게 신사역에 도착했다. 8번 출구로 나가야 하는데 공사 중이라 막혀 있었다. 대길해도 모자랄 판에 약간 불길했다. 내 계획은 아트박스에 들려 김영란법에 절대 걸릴 수 없는 선물을 사고 20분 일찍 도착하는 거였는데, 지도와의 소통 실패로 간당간당하게 닿을 수 있었다.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여러 개의 문이 보였다. 어디가 민음사지? 했는데 곳곳이 민음사인 것 같았다. 신기한 구조였다. 단지 회의실이 신기하다 생각했을 뿐인데 주책맞은 심박수가 118까지 치솟았다. 내 하트 레이트는 보통 점잖은 88을 유지한다. 최근에 118까지 치솟은 건 연봉협상 때 대표님의 입이 열리기 전후뿐이었다. 내 심장은 입신양명이 걸릴 때만 솔직하게 헐떡이는 것 같았다. 하긴 심장이 할 일이 달리 뭐겠는가? 심장이란 내부적으론 헤모글로빈과 적혈구의 평생 기숙사, 외부적으론 우사인 볼트였다. 뛰고 뛰고 또 뛰는 것일 뿐이었다.


어쨌든 첫 미팅에는 한국문학 2팀의 세 분이 참석하셨다. 우리가 초면이 아닐 수 있게 유튜브를 시청하고 갔는데도 낯가림이 시작되었다. 그날 난 롱코트와 기모 스타킹, 마스크 차림이었다. 드러난 살이 손 밖에 없음에도 왠지 나만 비키니를 입은 듯한 기분이 들어 뱃살 같은 반가움을 가리게 되었다.


“어려운 시국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브런치 북 대상 정말 축하드려요!”


원래 나의 낯가림은 최소 15분 정도지만, 출판사 선생님들이 환한 미소로 박수를 쳐 주시는 바람에 곧바로 풀렸다. 칭찬은 나를 아이폰처럼 만든다. 입력하면 방긋 미소가 유발되며 마음속 잠금도 해제되는 것이다. 나는 겸양을 떠는 대신 감사한 칭찬들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 말들을 내 마음속 용기 곳간에 차곡차곡 쌓기로 했다. 출판 세계관 최강자들의 덕담은 나중에 창의력과 자신감이 함께 빈곤해질 때 더없이 소중한 확신으로 작용할 것이었다.



민음사 내에서 나눈 대화는 민음사의 비밀이 되므로 옮겨 적을 순 없지만, 그리고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잊어버리기도 하여 또 적을 수 없지만...... 놀라운 점이 몇 개 있었다.


일단 경청에 대한 것이었다. 출판사 선생님들은 타인의 말을 정말 진지하게 경청해주셨다. 내 의견은 물론 서로의 의견도 절대 끊지 않았다. 본인 의견을 들려주실 때도 먼젓번 내 의견을 포함하여 말씀하시니 그 자체가 경청인 셈이었다. 게다가 늘 책과 가까운 사람들 특유의 고운 말씨와 분위기가 있었다. 그 자리에 동전이 3개 들은 진동 저금통 같은 건 나뿐이었다. 현재 재직 중인 회사는 누구보다 빠른 의사소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우리 회사 대표님과 동료들은 서로의 감상보다는 서로의 대안을 신속하게 나누고, 대부분의 결정을 그 자리에서 내렸다. 그것이 갈급한 내 성격과 잘 맞는 동시에 우리 회사의 성공 요인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나 역시 1.25배속으로 말을 쏟아내는 버릇이 생겼는데, 나는 당황해도 1.25배속이 되므로 결국 1.5배속으로 말을 하는 거였다.

무엇보다 내 글을 전부 읽고 진솔한 감상을 주셔서 이 점이 참 감사했다. 출간 예정작 <젊은 ADHD의 슬픔> 외에도 미팅 전날 올린 브런치 글까지 정독하고 참석하신 듯했다.


출판사 선생님들의 업무가 얼마나 많은지는 출판 편집자, 마케터 지인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바쁠 것이 넘나 뻔한 세 분이 섬세하고도 상냥한 감상을 다각도로 전해 주셔서 나는 진짜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지인들도 내 글을 잘 읽어주었지만 우리끼린 장난이 많아 진지한 감상을 나누지 않았다. 내 지인들은 보통 4글자 내외로 의사소통한다. “개 웃겨”, “미친놈”, “짱이다”, “봤음” 혹은 “아직 안봄”. 나는 누구에게도 내 글을 읽을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게다가 누군가 내 글을 ‘억지로’ 본다면 민망하고 속상하기에 그런 식의 반응에도 별 불만이 없었다. 게다가 아는 사이에서의 칭찬이란 뭔가 애정이란 치트키가 들어간 느낌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초면이자 전문가인 선생님들의 감상은 귀중했다.


평생 들을 칭찬을 한꺼번에 모아 담으며...... 꼭 잘해서 좋은 책을 내고 싶다고 다짐했다. 반면 칭찬을 당당히 사랑하기 위하여 비판에 익숙해지자는 생각도 했다. 꽃길만 걸으려는 사람은 꽃 냄새에 질식하거나 갑자기 덮쳐온 똥냄새에 질식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나는 냄새 비위가 약하니 미리 두 향기 전부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래 놓고 내 책이 완전 무반응이면 어떡하나 걱정도 했으니 웃긴 일이다. 아직 아무것도 안 고치고 아무것도 새로 쓰지 않았으면서...... 하여튼 난 웃음이 안 나는 식으로는 확실히 웃긴 놈이었다.


출판사 세 선생님들이 너무 멋져서 더욱 신속히 긴장이 풀렸자. 코트 깃에 가려져 모르셨겠지만 흉곽이 부풀고 갈비뼈의 빗장이 오픈되었다. 사실 난 이런 생각도 했었다. 아마 다른 작가님들은 그럴 테니(?) 나도 좀 그러자고(?). 이것은 중요한 자리에서 일말의 주접도 떨지 않고 차분히 조용하겠다는 말이었다. 내 생각에 작가님들은 이런 느낌이었다.


“네, 그것은 이것입니다. 맞습니다. 이것은 또 그것이죠. 혹시 전달 오류가 있었나요? 제가 또 할 일이 있을까요? 없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시 뵐 때까지,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세련된 미소)”


반면 나는 이모티콘으로 표현하자면 ^ㅇ^ 이것 같은 사람이었다. ㅠ_ㅠ 이런 사람이기도, ^ㅇ^와 ㅠ_ㅠ 사이를 마구 넘나드는 사람이기도 했다. 웃음과 제스처와 즉문즉답이 동시에 많아서 산만했다. 만약 내가 산만하지 않겠단 다짐을 지켜내도, 무조건 정상인보다는 산만할 것이었다.


최근에 시간이 그렇게 훌쩍 간 적이 없었는데, 얘기하다 보니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나는 책 선물을 두 권이나 받아 더 기뻐진 채로 민음사를 나섰다. 내게 있어 좋은 징조란 좋은 기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징조가 좋았다. 아마 잘 될 거야~ 왜냐면 내가 하는 일만이 아니니까(?) 생각하며 귀가했다. 그리고 오늘 쓴 반차를 벌러 주말에 출근했다. 그래도, 여전히 징조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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