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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BTI를 모르는 ENTP Apr 09. 2021

"박사는, 남자잖아!"

아냐, 박사는 그냥 석사 다음에 밟는 단계일 뿐이야.

넌 유달리 영특해.

미래 세대인 네가 어떻게 잘 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래 세대가 아닌 내 머리엔 그려지지 않아서

한글과 글쓰기만 열심히 배워도 된다는 믿음 하에 다양한 빛깔을 지닌 단어들을 일부러 써봤거든?

그런데 그걸 기가 막히게 해내더라고, 네가!

물론, 내 눈에만 '똑순이'일 수도 있겠지만.


"와, 우리 딸은 진짜 척척박사구나!"


그날도 난 감탄했어. 어디서 배웠는지, 내 이름 석자를 쓱쓱 써내려가는 거야.

난 국민학교에 들어가서야 겨우 한글을 뗐는데 말야.


"에이, 엄마! 내가 왜 박사야~박사는 남자잖아!!!"


농담인 듯 진담처럼 놀려대는 널 보니까 마음이 순식간에 어두워졌어.

박사는 그냥, 석사 다음에 밟는 단계인데.

왜, 누가, 이런 생각을 심어준 걸까.


분명 누가 있었을 거야. 새하얗고 투명한 네가 내 자궁 속에서부터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태어나진 않았을 거니까.

곰곰히 생각했지. 당연하고 익숙해보이는 이 생각은, 어디에서부터 움튼 걸까.


일단, 네가 자주 보는 유튜브 영상들에서 해답을 찾았어.

과학 정보를 알려주거나 상식을 얘기하는 좋은 콘텐츠였는데도, 정말 이상하리만치 '박사님'들은 다 남자더라고! 애니메이션도, 게임 해설 영상도 모두 다 '박사님'은 XY였다니까. 대학원에서 합당한 졸업 논문을 내면 모두가 딸 수 있는 학위인데 말이지.


"아니야. 누구나 공부 열심히 하면 박사가 될 수 있어. 장군도 될 수 있고, 군인도 될 수 있어."


순간 네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어. 그리곤 바로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라.

뭔지 모르겠지만, 게임을 클리어하고 다음 레벨로 넘어갔을 때 보여준 미소 같기도 했어.


"나도?"

"그럼, 네가 원하면 뭐든 다 할 수 있지."

"정말?"

"우리 딸은 뭐가 되고 싶은데?"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굴리면서 요리조리 생각하는데, 그 순간마저도 참 귀엽더라.

아무래도 정성들여 골똘히 생각하고 싶었나보지?

작은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어.


"엄마!"


대체 뭘까, 영특한 우리 딸이 원하는 꿈은?


"난 곰이 되고 싶어. 엄청 큰 곰이 될래. 쿠아아앙."



P.S. 그땐 한바탕 웃었지만, 잊을 만 하면 곰타령 하는 나의 친구야. 미안한데 그건 진짜, 불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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