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외할머니 발인이었다. 발인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화장이다. 납골당 비용 35만원을 내기 싫어 선산에 뿌리네 마네 하던 외삼촌과 엄마는 납골당에 유골을 보관하기로 했다. 엘레베이터에서 시신이 든 관이 나오면 상여 행진을 모방하여 상주들이 잠시 관을 들어서 스테인리스 운반대에 관을 놓는다. 스테인리스 운반대는 미끄러지듯 운전되어 화장장으로 연결된다. 마지막 과정은 작은 모니터로 볼 수 있다. 관이 화장장으로 들어가니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났다. 하지만 아무도 우는 사람은 없다. 엄마도, 외숙모 마저도 울지 않았다. 다 그만큼 지긋지긋 했다는 걸 의미한다.
할머니의 시신이 버석한 유골이 되도록 타는 동안 2시간 동안 데면데면한 상주들과 나는 어색하게 벤치에 끼여 앉았다. 내가 침묵을 깨고 외숙모에게 이민 간 두 딸 얘기를 물어봤다. 외숙모는 언제나 처럼 딸들을 세상 최고 똑똑하고 좋은 자식처럼 자랑한다. 이 집과 우리 집와 단 하나의 다른 점은 외숙모와 엄마다. 아빠와 외삼촌은 똑같은 쓰레기 이지만, 외숙모는 자식을 그 어려운 환경에서 두 딸을 항상 최고라고 부르면서 키웠다. 엄마의 우울증으로 시작된 무관심과 방치로 내가 전교 1등을 하든 말든, 엄마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나는 그 환경에서 인정 한 방울 짜내어 보려고 그렇게 발버둥 쳤다. 그 아이들은 어찌 됐든 최고라고 추켜세워 지며 나보다는 심리적으로 건강하게 컸다. 엄마는 친척들이 모이면 항상 나를 부끄러워 한다. 뭐 흠이 있는 사람처럼 늘 변명했다. '오늘은 아무데나 입고 와서 행색이 별로에요. 요새 운동을 안 해서 살이 쪘어요.' 등등. 반면에 그 두 딸들은 학창 시절 공부를 썩 잘 하진 못했지만, 첫째는 나름 오랜 계획 끝에 캐나다에 남자친구와 정착에 성공했다. 남자친구를 치기공과를 공부시켜서 먼저 정착시키게 하고 그 애는 거기서 대학을 나와서 취직했고 둘은 거기서 결혼했다. 둘째는 외할머니와 같이 살다가 크게 싸우고, 결국 싱가포르에 인턴으로 입사해서 스페인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 남자는 게임 회사에 다니는데, 연봉이 어마어마 하다고 한다. 둘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에 산다. 외숙모는 신이 나서 그들의 인스타 그램과 유투브채널을 보여주었다. 웃으면서 잘됐다고 했지만 내 속은 문드러졌다.
그 애들처럼 나도 정착하는 것이 꿈이었는데, 내 꿈은 멀리 가버렸구나. 그 오후 내내 가슴이 문드러졌다. 집에와서 애인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외숙모 참 눈치없다' 라고 했다. 눈치가 없지만 부러웠고, 아이처럼 눈물이 펑펑 났다. 엄마가 미웠다. 아직도 엄마가 밉다니. 한때 내내 의대 못 간 것 때문에 후회하더니, 지금은 외국 정착 못한 것 때문에 아이처럼 후회한다.
아니야. 코칭 상담 처럼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을 찾으면, 내 행복을 찾을 수 있을거야. (근데 한국에서 가능할까) (그게 가능할까.) (절망이 계속 차오른다. )
애 처럼 우는 나를 안으며 애인이 말한다. 'XX야, 내가 다시 태어나면 백인남자로 태어나서 너 20살 되면 데리러 갈게.'
애인은 어느 정도 해탈한 사람 같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