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KI May 16. 2024

일상의 기록이 역사가 되도록.

오늘의 일상 속 기록들은 먼 훗날 역사의 자료가 된다.

일상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 남긴 미술사 이야기는 17세기, 18세기에만 가능했던 일인가? 에 관한 궁금증을 갖고 있던 찰나, 책을 읽다가 이집트 미술사 속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발견했다.


https://brunch.co.kr/@selsewoo/30


중학교 시절에 봤던 만화책 중 하나의 배경이 이집트였는데, 당시 투탕카멘이라는 왕에서 모티브를 얻은 왕과 미래 세계에서 찾아온 여학생의 만남이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멜로 판타지 만화였다. 어릴 적 이집트는 그렇게 상상력으로 가득찬 이미지였기에 이집트 유물 전시가 한국에 열릴 때마다 설레고 기쁨 가득한 마음으로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투탕카멘의 데스마스크(death mask)는 황금색으로 뒤덮여 그 휘황찬란한 역사을 자랑했고 일상 속에서 사용한 유물과 신분을 증명하는 고대인들의 패션역시 흥미로웠다. 그 화려한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진 왕족들의 무덤인 피라미드 사진과 화려한 장식품들로 재현한 당시 패션들을 보면서 만화책 속에서 경이롭게(?) 봤던 이집트 왕족의 패션과 풍경을 종종 비교했던 기억이 있다.


이집트 회화 속에서 보는 인물의 표현 방식은 형식주의로 갖춰져 일률적인 표현 방법으로 대대로 엄격한 룰이 정해져 있다. 예술가는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릴 수도 없었고, 도제의 형식으로 그리는 방법을 엄격하게 전수받아야 했으며, 그대로 적용해서 그려야 했다. 그 중 인물의 얼굴과 발은 측면으로 그리고, 어깨와 몸통은 정면으로 그려야 했다. 또한 당시 사회적 직위에 따라 인물의 크기를 다르게 그려야 했다. 왕과 신하가 있는 장면은 왕은 크게, 신하는 작게 그리고, 왕과 왕비를 그릴 때 역시 왕은 크게 왕비는 작게 그리는 ‘주대종소’의 원칙을 철저하게 따랐다. 역사화로 남겨진 이집트 회화 속의 대부분의 인물은 이런 방식을 절대적으로 지켜서 표현했고 그렇게 누적된 회화 작품은 거대한 통일성을 보여주면서 역사적 자료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집트 예술가들의 화화 가치관은 “잘 그릴 수 있는 부분을 잘 보이게 그리는 것” 그리고 “담을 수 있는 특징을 많이 담아내는 것”이었다. 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표현 방법인데, 인간의 얼굴을 정면으로 그리고자 하면 생각보다 이목구비 중 코와 입 표현이 어렵다. 얼굴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고 정면에 위치한 코와 입의 높낮이 표현을 잘해야 하는 부담감도 있다. 그러나 측면의 얼굴을 표현할 때는 라인으로 코와 입술을 표현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그 형태감과 양감 표현이 쉬워진다. 발도 마찬가지.


정면으로 발가락을 그리는 것보다는 측면의 발가락을 표현하기 위해 길쭉한 타원형 모양을 하나 그려주면서 아치 모양의 발바닥을 표현하는 게 훨씬 쉽다.

그렇다면, 담을 수 있는 특징들을 모두 담아내는 법은 어떻게 실현시켰을까?


정원의 풍경을 측면에서 바라보고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원근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선원근법의 원리는 그리고자 하는 사람의 위치를 중심으로 해서 보이는 측면의 풍경에서 시작된다. 중세 이후로 종교화로 끊임없이 다양한 실험과 연구를 했던 위대한 예술가들은 도전 정신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에 관한 고민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 연구와 도전 덕분에  브루넬레스키의 ‘선원근법’이 탄생한 것.


그러나 고대 이집트 예술가들에겐 선원근법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보이는 것을 사실대로 그리고자 하는 개념보다는 아는 것을 그리고자 하는 관념적 사상이 더 중요했다. 무엇보다도 내세사상이 강했던 이집트인들에게 고대 사상의 특징을 강렬하게 드러낼 수 있는 예술이 당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낼 수 있었다.  즉, 이집트 시대에는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닌, 아는 것을 최대한 많이 담아내는 그림이 좋은 예술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자기가 초보 미술가라고 생각해 보면 쉽다. 여러분이 만약 공원의 측면의 풍경을 하얀 도회지 위에 그리고자 한다고 상상해 보자. 일단, 나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새들과 물체들의 형태를 어떻게 그려 넣어야 하는지부터 연못 속에 있는 물고기는 어떻게 그려야 할지 등등 분명 혼란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더 심각한 어려움은 당신이 그림을 그릴 때는 하안 도화지 위에다가 연필로 스케치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들어 눈으로 들어오는 공원 풍경을 보고, 기억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종이 위에다가 옮겨 그려야 한다고 상상해 보자. 물체의 위치, 각도에 따른 형태의 변화를 하나하나 감지하니 도대체 어떤 모습을 그려 넣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고대 예술가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분명 느꼈을 건데, 당시에는 이 문제를 크게 어렵게 다루지 않았던 거 같다. 자연에 적응하며 순응하는 삶을 살았던 고대인들답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대한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니 바로, 아는 것들을 그리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유용한 방식이 당시 회화의 혼돈과 어려움을 방지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중앙집권화 체제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엄격한 형식주의로 만들어 추구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정통성과 엄격성을 고려해야 했던 이집트 예술인들에게도 나름의 개성을 담아 표현하는 일이 있었다는 사실.

이들도 바로 서민들의 모습을 표현한 조각, 회화 영역의 예술작품에서 그 모습이 잘 담아낸다.  밭을 가는 서민의 익살맞은 표현과 인체의 동작 표현이 자유로우면서도 개성 넘치게 완성되어 있다.



재밌는 사실은 이와 비슷한 경우지만, 다른 결의 역사적 예술 이야기가 있다는 것.

혁신은 기존의 체제에 도전할 때 일어난다. 당시 고대인들에게도 이런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이 크나 톤 왕이 집권하던 당시 예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는 시기로 이집트의 전통적인 형식주의를 탈피한다. 오랫동안 이집트의 모든 예술가들이 정해진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강렬한 예술적 통일감은 이 시기를 맞이하면서 색다른 세상을 만나게 되어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는 방식으로 표현해라는 이크나톤의 예술적 가치관 덕분에 일어난 일이었고, 실제로 이크나톤을 묘사한 왕의 조각상을 비교해 보면 실제 고대 이집트인들의 특징을 사실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길쭉한 얼굴형과 툭. 튀어나온 입, 그리고 늘어난 뱃살까지 더해 그야말로 이크나톤의 왕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한 시각적인 자료로 완벽하다. 그러니 이러한 표현 방식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도전이었고 무엇보다도 이집트 예술인들의 실력을 왕성하게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치와 예술의 관계는 물과 기름 같아서 이러한 표현 방식이 결국 왕의 권위를 상징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중들의 외면을 받게 되고 신하들의 충성도를 떨어뜨리게 되는 흐름과 이어져 흘러가게 된다. 결국 이크나톤은 서른 살 나이로 단명하게 되고 정치는 그의 사후에 중앙집권화 체제로 돌아갔으나 화려한 영광은 과거가 되고 쇠퇴의 길로 가게 된다.



권력과 정통성으로 맞물려 영광을 누리는 예술작품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위대함과 정통성만으로 그 엄격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일 수 있는지를 그 일례로 보여주는 위대한 예술작품들도 있다. 한편으로 역사성에서 떨어져 한 시대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오늘의 순간도 결국은 과거가 되고 한 인간의 살아가는 시간이 얼마나 짧고도 유한한 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고 말했던가. 짧고도 유한한 조건 속에서도 한 인간이 전할 수 있는 영향력은 우주의 힘만큼이나 강력하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일상의 풍경, 그 너머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