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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Jul 23. 2024

보고 싶은 H마트 사람들 #1

허 선생

'보고 싶은 H마트 사람들' 시리즈는 2000년대 중반 미국 유학시절, 캐셔로 약 3년 가까이 아르바이트했던 한인마트 H마트에서의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으며, 100% 실화입니다.




 "저 놈의 영감탱이는 차 안에 들어가 자빠져 잠이나 자지. 뭐 하러 또 기어 나와서 저러고 있어? 동수야. 네가 가서 기름값이나 한 20불 던져주고 와라. 차 안에 에어컨 틀고 잘 기름값이 아까워서 저러고 있나 보다."


 유난히도 더운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허 선생은 할 일 없이 직원들에게 짜증을 내는 마트 사장을 보며 특유의 말투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내가 일했던 무렵의 H마트의 풍경, 지금은 자리도 다르고 완전히 변했다고 한다


 불평불만 많고 직설적인 성격의 허 선생은 미국에 오기 전까지 중국 심양에서 평생을 보낸 조선족 아저씨다. 돈 벌 목적으로 혈혈단신 미국에 입국한 이후 6년 넘게 불법체류로 눌러앉아 가족들과 떨어진 채 일만 하며 살아온 그는 말 그대로 '돈 버는 기계' 가장이었다. 그가 매일 열두 시간씩 일해 달러를 벌어다 중국에다 부치는 덕에 다행히도 아내와 두 아들은 중국에서 남부럽지 않은 경제생활을 유지하는 듯했다. 


 일주일에 6일을 열두 시간 풀로 일하는 데다, 하루 겨우 쉰다고 해 봤자 어차피 차가 없으니 그 좋다는 미국 구경한 번 할 틈이 있나. 그나마 가끔 찾아가는 사우나에서 아가씨들한테 마사지나 받고 팁이나 팍팍 주며 스트레스를 풀던 그였다. 평소 심통을 좀 부리는 편이기도 하고, 내게 물러터진 성격 좀 고치라고 구박을 하기는 해도 혹여나 내가 일하는데 목마를까 봐 매번 말없이 음료수를 건네주던 허 선생의 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3년 가까이 주말 캐셔로 일했던 한국인 슈퍼마켓에서 허 선생은 야채와 과일 쪽을 담당했었다. 철 맞은 좋은 과일들이 들어오는 날이면 집에 돌아가는 내 손에 조용히 쥐어주곤 했던 그의 깊은 속 정 때문에 나도, 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아저씨를 참 좋아했다.


 "허 선생 중국으로 돌아간댄다."


 어느 날 일하러 갔는데 뜬금없이 매니저가 꺼낸 말에 나는 또 뻥이겠거니 했다. 하도 실없는 농담을 잘하는 양반이니까. 내가 '허 선생님이 왜 돌아가냐'라고 묻자 매니저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허 선생의 아내가 바람이 나서 그런 거라며 또다시 실없는 농담으로 대답했다. 사실은 허 선생의 방광암이 진행된 지 4년이나 되었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만 반나절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을 뿐이다.


 허 선생은 매주 로또 복권을 사곤 했었다. 그때마다 그는 내게 다가와 자기 손에 이미 1등 당첨액이 쥐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다음 주부터 자기를 볼 수 없을 거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 돈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맘에 드는 여자들이랑 한 번씩만 자도 평생을 다 못 잘 거라고. 이제 나이가 쉰여덟인데 아직 힘이 받쳐줄지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미국 불법체류 생활의 마지막 주에도 그는 내게 메가 밀리언 복권 티켓을 보여주며 신문에 나온 당첨 번호와 맞추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이번에도 역시 달랑 한 개의 번호도 맞지 않았지만, 그가 돈을 주고 산 것은 로또 복권 티켓 한 장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의 기대와 희망, 낙이라곤 없는 잡부 인생이 버틸 한 주일 동안의 작은 재미였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다른 이들의 눈에 그는 그저 운 없었던 수많은 암환자 중 한 명일 뿐, '그 사람 참 좋았는데 안 됐네' 라며 혀 한 두 번 차고 나면 잊혀질 사람이었다. 내가 허 선생을 암환자로서 바라보게 되던 그 순간, 나는 문득 암환자로 돌아가신 내 아버지가 받았을 끔찍한 고통과 외로움을 떠올렸다. 당시 내가 받을 정신적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그저 관조 밖에 없었다고 아직까지 스스로에게 변명할 뿐이다. 내가 미국에 가서 처음 2년 동안에만 암으로 돌아가신 세 분의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내 아버지와 다른 두 분 모두의 마지막 모습이 살아생전 건강할 때와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나는 허 선생의 가난하고 힘들었던 노가다 인생의 끝을 쉽게 그려볼 수 있었다.


 허 선생이 나와 마지막으로 함께 일했던 그 밤엔 마침 비가 왔다. 그 덕에 나는 처음으로 그를 집까지 바래다줄 수 있었다. 허 선생은 고집도 세고, 마트에서 숙소가 가까워 그날처럼 비가 오지 않는 날엔 늘 집까지 걸어가곤 했었다. 차가 쌩쌩 달리는 위험천만한 미국 도로를 아슬아슬하게 건너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볼 때면 편하게 차 안에 앉아있는 내가 괜히 부끄러운 느낌이 들어 괜시리 차 안에 틀어놓은 음악소리를 줄이곤 했다.


 그의 송별회 전 날, 나는 월마트에서 예수님이 아이를 안고 있는 조각상을 하나 샀다. 조각상의 옆면에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발걸음 안에 있는 너의 모든 행사, 모든 고통 가운데 내가 함께하리라.'라는 내용의 글귀가 적혀있었다. 그가 중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쓸 안대와, 베개까지 산 후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못 볼 그의 영혼이 주 안에서 평안하길 빌었다.


허 선생의 송별회가 있었던 금호정


 다음날, 야채 공급책 김 씨 아저씨가 이미 한 잔 걸친 상태로 송별회에 찾아왔다. 자주 투닥거리기는 했어도 일하면서 누구보다도 가까웠던 그가 갑자기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타령을 해버린 바람에, 우리 모두는 소주잔을 부딪히며 아무런 말없이 허 선생을 위한 연민의 정을 나누었다. 술을 안 먹은 지 1년이 넘어 소주를 다시 입에 댄 나도 그날은 일을 끝낸 후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소주 한 병 반을 비웠다. 


 송별회가 끝난 그날 밤도 나는 허 선생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가 내게 남긴 마지막 한 마디는 '너무 착하게만 살지 말고, 앞으로 여자들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라'였다. 우린 그렇게 안녕을 고했다. 우두커니 선 채 내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아들 뻘 되는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해 준 그 고마운 마음이 허 선생에 대한 마지막 인상으로 남아버렸을 뿐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그의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마음이 먹먹하다. 마트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몰랐지만 방광암 4기였으면 아마 그는 혼자서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평소 교회를 무척이나 싫어했던 허 선생이었고, 나도 더 이상은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그가 늘 주의 품 안에 있기를 기도한다. 시간을 돌려 다시 함께 일하던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마 나도 그에게 더 자주 음료수를 건네었을는지 모른다.



이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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