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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Aug 14. 2020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베토벤 교향곡 제6번 '전원'

‘반딧불의 묘’라는 애니메이션을 보면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기 전 피난을 다니며 각종 고초를 겪는 한 남매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는데 드롭스 사탕이 먹고 싶었던 네 살짜리 여동생 세츠코가 텅 빈 사탕 깡통에 물을 타 단물을 만들어 먹던 모습이다. 그 장면이 어찌나 마음 아팠는지 겨우 사탕 한 개에 행복해하는 순수한 아이들이 전쟁의 참상을 겪는 모습을 보고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의 한 장면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을 듣다 보면 마치 세츠코의 사탕물 장면처럼 꼭 한 번 그렇게 마음이 아파지는 부분이 나온다. 바로 ‘시냇가의 정경’이라는 부제가 붙은 2악장 마지막 부분에서 베토벤이 목관 악기로 새소리를 흉내 낸 부분이다. 실제로 오케스트라 총보를 보면 그 부분에 베토벤이 직접 플룻은 나이팅게일, 오보에는 메추라기, 그리고 클라리넷에는 뻐꾸기라고 적어 놓았는데 귀가 완전히 멀어버린 베토벤이 얼마나 새소리가 듣고 싶었으면 목관 악기로 이렇게 새소리를 표현해 놓았을까 싶다.


오보에에는 메추라기, 클라리넷에는 뻐꾸기라고 적혀 있다


귀는 안 들리지 혼자 시골마을을 산책하고 돌아와 자기만의 공간에 틀어박혀 ‘이건 메추라기 소리, 이건 뻐꾸기 소리’라고 악보에 적고 있는 베토벤을 상상하면 어찌나 마음이 아려오는지. 마치 사탕이 먹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사탕 깡통에 물을 타 먹은 세츠코처럼 뻐꾸기 소리가 듣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머릿속 클라리넷 소리로 대신한 베토벤을 떠올리며 속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학교 다닐 때 음악 선생님이 틀어줬던 전원 교향곡은 분명 지루하고 따분하기 짝이 없는 음악이었는데 위에 언급한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째 나이를 먹어갈수록 베토벤의 모든 교향곡들 중에서도 특별히 6번 ‘전원’을 아끼게 된다.


어떤 유명 드라마에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라는 명대사가 있던데 정말이지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에 딱 맞는 말이 아닐까 싶다. 새들이 지저귀는 시냇가의 평화로운 정경도 겪었다가 4악장의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도 겪어보고, 마지막 5악장에서는 폭풍우가 지나고 난 뒤에 찾아온 적당한 날에 대한 감사까지.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은 결국 살아있음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만족과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곡이다. 그것도 베토벤이 새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가장 아픈 시련과 결핍 속에서 부른.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지금 당장 두 귀로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베토벤보다 인생에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싶다. 날이 좋으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으면 좋지 않아서, 또 때로는 날이 적당해서 우리의 삶은 늘 아름답다. 때로는 사탕 대신 사탕물을 먹어야 할지라도. 또 때로는 귀가 멀어 새소리를 머릿속으로 상상만 해야 할지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동수




나의 추천 앨범/명연주



Bruno Walter (conductor)

Columbia Symphony Orchestra


녹음: 1958/01/13,15,17 Stereo

장소: American Legion Hall, Hollywood, California








가장 착하고, 가장 따뜻하고, 가장 친절하고, 가장 마음이 아픈 ‘전원’ 교향곡 연주. 모든 선율을 ‘노래하는’ 발터의 뉘앙스는 고귀하며 우아하고, 또 세련됐다. ‘전원’ 교향곡을 연주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던 브루노 발터라는 거장 지휘자의 온화한 평소 성품이 완전히 녹아들어 이 곡이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우리 인간의 인간성을 한층 고양시켜주는, 모든 인류 역사의 유산으로 남길만한 최고의 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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