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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Aug 17. 2020

이미지의 허상, 그리고 월광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내 인생의 영웅 베토벤은 일생 동안 무려 서른 두 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는데 그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을 꼽으라면 역시 14번 '월광(moonlight)' 소나타일 거다. 오늘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월광'의 1악장이 어디선가 들려온다고 치자. 그럼 이 곡을 듣는 사람들 대부분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아아, 어두운 밤의 고요함과 적막한 기운. 그리고 그 밤을 에워싸고 있는 차가운 달빛의 쓸쓸함. 베토벤은 정말이지 시적인 작곡가구나!'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각기 다른 사람들이 음악을 감상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곡을 들을 땐 천편일률적인 달 덩어리 이미지만 밑도 끝도 없이 재탕되는 걸까.


여기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정작 이 곡을 작곡한 베토벤은 자신의 곡에 단 한 번도 ‘월광'이라는 제목을 붙인 적이 없다는 거다. 언젠가 렐슈타프라는 음악비평가가 이 곡에 대한 감상을 쓰면서 '스위스 루체른 호숫가에 비친 달의 느낌이다'라고 언급한 것이 유명해진 이후로 베토벤이 남긴 서른 두 곡의 피아노 소나타 중 열네 번째 곡인 c# 단조 1악장은 결국 멍청한 달 이미지만 주구장창 각인시키는 곡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의 상상력은 곧잘 강력한 ‘이미지(image)'의 마력에 속박되곤 하는데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너무나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데 있다.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그 멍청한 달빛 이미지를 떠올릴 것을 강요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빈곤한 상상력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을 들을 때마다 늘 '월광'이라는 표제의 족쇄에 묶여 달빛이 비치는 숲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 버리고 만다.


너도 나도 이미지의 감옥에 갇힌 채 해석의 한계만 확인하며 서로 간의 공감대를 형성해 놓고 흡족해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마치 넓은 바닷가에 살아야 마땅한 돌고래를 좁아터진 수족관 벽에 가둬두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본드로 붙여놓은 것처럼 월광 소나타와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교교한 달빛의 이미지는 고독하고 아름답게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결국 실체의 본질을 흐리는 빈곤한 허상일 뿐이다.


실체가 이미지로 대변화되는 과정에서는 항상 ‘소외'가 발생하고 만다. (나는 이것을 ‘소외’라고 부른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이 지닌 음악적 표현의 본질은 이제껏 우연히 붙여진 ‘월광’이라는 두 글자에 갇힌 채 많은 청자들에 의해 ‘소외'되어왔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스스로 만든 이미지의 감옥으로 인해 세상을 바라보는 더 넓은 상상력과 포용력을 제한하고 있는 중이다.


비단 음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그 사람의 이미지만으로 정의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그 사람의 본질을 충분히 소외시키고 있는 중이다. 반대로 다른 누군가가 당신을 당신의 이미지만으로 정의하려고 한다면, 당신의 본질 또한 이미 충분히 소외당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나는 나대로의 나이며, 남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도 그저 당신 자신일 뿐이지 않은가.


이제 모든 표제를 벗고 자유를 입자. 지금껏 스스로를 옭아맨 모든 이미지의 속박에서 벗어날 때다. 멍청한 달빛 이미지의 세상 너머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의 악상(樂想)은 무한하며, 우리가 지금껏 좁은 마음으로 바라보던 모든 것들은 결국 그것들만의 넓은 바다가 있다. 이제는 수족관에 갇힌 고래를 풀어줄 때다. 



이동수




나의 추천 앨범/명연주



Wilhelm Kempff (piano)


녹음: 1965/01 Stereo, Analog

장소: Beethoven-Saal, Hannover










빌헬름 캠프의 베토벤 소나타는 완벽한 절제와 균형미 속에 넘칠 듯 전혀 넘치지 않는 에너지를 지녔다. 어느 한 곳도 주름 잡히지 않은 말끔한 제복을 입은 군인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독일인에 의한, 독일인의, 독일인을 위한 피아니시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이렇게 연주하는 것이라는 모범을 보여주는 피아니스트, 그리고 그의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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