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허를 따야겠다고 결심한 결정적 계기는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에 마주쳤던, "몇 살이에요? 위험한데 데려다 줄게요"라며 따라오던 남자'들'이었다(from Getty Images)
7월 22일 토요일인 어제 오후 5시경, 킨텍스 주변을 걸어가던 사람은 어쩌면 엉엉 울면서 지나가는 여자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나였다. 한번 터진 울음이 그치질 않아서 끄억끄억 울면서 빗속을 걸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엄마가 물었다.
“합격했어....”
“근데 왜 울어?”
“이 그지 같은 걸, 흑, 다시 안 해도 된다는 게, 흑, 너무 좋아... 흐어엉”
남들은 2주 만에 취득한다는 운전면허 학원에서 나는 2배의 시간을 쏟았다. 한 달. 내가 1종 보통 운전면허를 따는 데 걸린 시간이다. 물론 운전 학원에 처음 등록하고 어제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바쁜 사정은 있었다. 어학 시험을 치렀고, 입사 면접을 보았으며, 병원에 가야 했다. 그리고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던 나날도 보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시간이 걸린 셈인데, 그래도 부정하지는 않겠다. 나의 클러치 조작 실력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는 것을.
남들보다 뒤늦게 하필 1종 보통 면허를 딴 이유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 그냥 면허의 필요성을 못 느끼다가 점점 나이가 들며 독립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의 중요성을 절감했을 뿐이다. 그리고 옛적부터 ‘면허는 1종’이라는, 운전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세뇌당해 ‘그래, 나도 1종!’이라고 외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여자도 1종을 딸 수 있다는 오기가 조금도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어쩌면, 엄마의 세뇌보다 그 오기가 나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내 기능 수업을 받고 나서 그 오기를 조금 후회했다. 나의 운전 학원 경험은 운전을 배우고자 한 많은 여성이 겪었다던 모욕과 수치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사들은 감히 1종 보통 면허를 따려는 내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고, 그래서 크게 화가 나 있었다. 그들은 “1종 왜 따려는 거예요?”라는 질문과 “이게 남자도 어려운 건데”라는 말을 계속했다. 내게 첫 수업을 해준 강사는 2시간 내내 소리를 질렀다. 클러치의 기능도 설명하지 않고는 내게 왜 계속 밟고 있냐고 화를 냈다. 결국 나도 같이 소리를 질렀다. 두 번째 강사는 저 혼자 욕을 했다. 나는 따졌다. 도로주행을 해준 세 번째 강사는 내가 도로에서 핸들을 잡은 지 30분도 안 되어 “이래서 하겠어요?”라고 빈정거렸다. “나는 처음인데 그럴 수 있죠”라고 쏘아붙였다. 네 번째 강사는 짜증이 제일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더 이상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아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억울했다. 울고 싶었다. 10년 넘게 영어를 배운 학생들이 분사와 동명사를 구분하지 못해도 나는 이렇게 화낸 적이 없는데 실수로 2단 기어가 아닌 1단 기어를 넣었다고 이렇게 구박을 당해도 되나 싶었다.
두 번째 도로 주행 수업을 마치고 시험을 보기로 했다. 절대 붙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천사 같은 시험관의 도움으로 합격했다. 그는 “91년생? 양띠예요?”라고 묻더니 ‘우리 막둥이’랑 나이가 똑같다며 인자한 미소로 내게 여러 조언을 해주었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컥 눈물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시험이 종료된 뒤에는 내게 “연습 많이 하세요, 좋아질 거예요”라는 말을 건넸다. 붙은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어서 ‘뭐지?’ 싶었는데 곧이어 “합격입니다”라는 말이 차 안에 울렸다. 나는 믿을 수 없어서 시험관에게 “선생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재밌는 건, 인자한 그 또한 편견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아휴, 우리 막내 생각이 많이 났어. 일 때문에 필요한 거 맞죠?”라고 물었다. 여자가 별다른 이유 없이 1종을 딸 리가 없다는 생각. 나는 아무 대답 없이 감사 인사만 전하고 그와 헤어졌다. 그의 선입견이 마음 한켠에 걸리면서도 그의 따뜻함이 이전 수업에서 쌓였던 분노의 감정들과 섞이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갑자기, 나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마도 나는 울 구실이 필요했던 것 같다. 아픈 동생이 내게 기대 오는 것이 조금 벅차게 느껴졌고, 입사 면접 때 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으며(그러나 다행히 사측에서 나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주었다. 그런데 그래서 더 부끄러웠다), 뉴스 속 구타당한 선생님과 죽은 선생님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점령한 요 며칠이었다. “아갈머리를 찢어버릴라”라고 말하던 저학년 학생에게 주의를 준 것이 기분 나쁘고 원통하다며 학원에 전화를 걸었던 학부모와 무려 논술학원에서 “왕코딱지”라는 글자만 써서 글을 낸 학생에게 “첨삭해 줄 것이 없어요. 다음엔 다르게 써 봅시다”라고 얘기한 것이 역시 마찬가지로 기분 나쁘고 원통하다며 “선생님, 지금 저랑 싸우자는 거예요?”라고 따지던 학부모가 떠올랐다. 사과 인사를 전하고 나서 비참했던 기분도 떠올랐다. 이러한 갑갑함과 부끄러움과 슬픔과 비참함에 타인의 분노와 친절함은 화룡점정이었다. 나는 펑, 하고 터져 올라 몇 백 미터를 울면서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어제의 일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걸 보니, 그 눈물은 아마도, 아니 분명 필요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