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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Feb 22. 2024

우울 혹은 울화의 맥락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그리고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그래서 공유가 뭘 더 해줘야 되냐? 어? 말해봐라.’ 2019년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했을 때 온라인에 벌어졌던 난장판을 기억할 것이다. 포털사이트 연예 뉴스에 아직 댓글이 달리던 시절, <82년생 김지영> 리뷰 기사에는 정말 수많은, 남성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성토가 쏟아졌다. 당시 나는 한 남성과 댓글로 대화 아닌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내용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는 영화를 지지하는 여성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화 봤냐. 공유 외벌이하면서도 집안일 잘 돕는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문제여서 김지영은 또라이짓을 하는 거냐? 이 미친 것들아, 그럴 거면 그냥 혼자 살아.’ 책을 읽고 영화도 보고 왔던 나는 그에게 댓글을 달았다. ‘공유가 외벌이를 하는 건 김지영이 등 떠밀어서가 아닌데. 김지영도 일하고 싶지만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육아를 전담하게 된 것. 돌봄 노동이 24시간 이루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공유가 집에 들어와서 그 노동을 함께 분담하는 건 당연한 것 같은데?’


나의 글을 확인한 그는 재빠르게 대댓글을 남겼다. ‘그러니까 영화 속 공유가 뭘 더 어떻게 도와주냐고? 헛소리 말고 공유가 뭘 더 해줘야 되는데. 퇴근하자마자 집안일 도와줘, 애 돌 봐, 자기 아내에게 마음 쓰고 뭘 더 어떻게 해야 되냐니까?’ 지금보다 딱 5년만큼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던 나는 그에게 정성스럽게 답을 남겼다. ‘김지영은 남편에게 뭘 더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본 여성들은 남편 못 됐다고 욕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82년생 김지영>은 김지영으로 대변되는 여성의 생애에 대한 이해를 바랄 뿐입니다.’ 나는 내 할 바를 다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나 때문에 더 화가 난 듯했다. 다시 글을 남겼다. ‘계속 말장난하네. 공유가 김지영을 이해 안 하고 공감 안 했냐? 이해하기만 하면 행동을 안 해도 되는 거냐?’ 지금 와서 그와의 대화를 복기해 보면,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말해야 했다. ‘응, 남편하고 김지영하고 역할 뒤바꾸면 됨.’ 남편이 대체 뭘 더 어떻게 해줘야 하냐는 힐난에 내가 정확한 답을 하지 않은 건, <82년생 김지영>이 공유가 연기한 남편에게 뭘 해달라고 요구하는 텍스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책과 영화가 제안하는 건 빠순이, 된장녀, 그리고 맘충으로 축소되어 있던 여성 생애에 대한 오해를 풀고 사회의 젠더 문제를 함께 고민해 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제안을 거북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이해만 해서 되겠냐?’고 했지만, 기실 여성이 자신에게 할당된 역할 수행을 힘겨워한다는 사실조차 이해하길 거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너)네가 뭐가 힘든데!


‘김지영’이라는 허구의 인물이 앓고 있던 병리적 증상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던 걸 떠올리면, 이 사회는 여성이 아프다고 ‘말을 하거나’ ‘드러내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게 틀림없다. 여성이 힘듦을 호소할 때 사회는 과거 여성의 생애를 끌고 와 비교하며, 현대 여성들을 나약하거나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 다시 말해, 이 사회는 여성이 사회적인 구조나 질서 때문에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힘들다고 말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하지만 오늘날 젊은 여성들의 자살률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책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이하 <미괴오똑>)은 21세기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청년 여성들의 우울증에 대한 탐구서이자 일종의 고백록이다. 조울증을 진단받은 작가 하미나는 병에 따라붙는 의학적 진단(병명)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마침내 아픔을 인정받았다는 해방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정체성이 병으로 축소되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재단당한다는 면에서 억압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62). 하여 책 <미괴오똑>은 “‘조울증’이라는 진단명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작가가 다시 쓴 이야기이다. 나의 병이 진단서에 적힌 ‘조울증’ 단어 하나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믿음. 그는 남성의 우울증이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설명되는 데 반해 여성의 우울증은 호르몬 문제로 한정되는 상황에 주목, 여성 우울증이 그간 어떻게 잘못 다뤄졌는지 그 역사를 살피고(더불어 우울증이 다분히 미국적이라는 주장도 살핀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과의 대화를 통해 여성의 우울증을 가부장제라는 맥락 속에서 조명한다.        


세상은 존재하는 수많은 고통 중 어떤 것만을 선별적으로 인식하고 아파해 왔다. 역사적으로 늘 조롱거리가 되거나 침묵을 강요당한 고통이 있다. 유독 엄살로 여겨지는 고통이 있다. 우리는 어떤 고통에 더 아파하는가? 어떤 고통을 더 의심하는가? 자신의 고통을 포함해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들의 고통을 어떻게 대해왔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p.41 (미괴오똑)    


일찍이 여성학 책을 다수 읽은 독자라면, <미괴오똑>에서 다루는 여성 우울의 원인들이 전혀 새롭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새롭지 않은 책이 문득 울림으로 다가온다면, 그건 이 책이 침묵의 강요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돈 버는 기계, 일하는 가장의 외로움에 선별적으로 공감해 온 사회는 이제 ‘사회적 의무는 다해야 하지만 권리 행사는 못하는 청년 남성’의 울분에 귀 기울여주고 있다. 물론 돈 벌어오는 가장의 외로움이 거짓이었을 리 없으며, 오늘날 청년 남성이 느끼는 공포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성의 고통이 여성의 고통보다 큰 것은 아니며, 여성이 느끼는 ‘증발하고 싶은 욕망’이 허구인 것 또한 아니다(<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이소진). 해가 거듭될수록 젠더 갈등이 악화되고 있는 건 여성이 입을 열 때마다 ‘거짓’ 혹은 ‘갈라치기’ 또는 ‘정신병’이라는 무조건적인 입막음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미괴오똑>은 여러 연구와 실존 인물들의 사례를 담아 여성들이 느끼는 울화가 실재하는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더불어 하미나 작가는 여성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이 겪는 고통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을 넘어선다. 책에 따르면, 우울증을 앓는 여성들 다수가 자신의 증상에 얽혀 있는 사회적 맥락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가장 아픈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모두가 피해자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곳에선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다(220).” 그런 면에서 여성들은 진정 미쳐 있지만 똑똑하다.     


‘우울증 끝에 자살’이라는 말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자살의 원인이 우울증이라면, 우울증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가도 우울증의 원인은 정신과 안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는다. 치료의 주된 목표는 약을 통해 증상을 완화하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자살의 원인을 우울증으로 보게 되면, 여러 맥락 속에 있는 고통을 단순히 개인의 치료 문제로 환원하게 되고, 이는 자살을 둘러싼 사회 경제적 설명과 의미를 끌어내는 것을 막는다. -p.235-236     






보다 최근에 출간된 이소진 작가의 책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은 여성들이 자살 사고(思考)에 빠지는 요인을 탐구한다. <미괴오똑>과 비슷하면서도, 보다 정연하고 사회학적인 측면이 강하다.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대목은, 일부 여성들이 유년기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을 진지하게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으로서, 남성과 마찬가지로 경쟁적인 취업 시장에 내몰린 여성들은 ‘갓생’을 살지 않은 자신을 탓하며 과거로 돌아가길 꿈꾼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는 법을 익혔더라면, 성취감을 맛보았더라면 등등.



이미 열심히 살아왔으나 앞으로의 타개책 또한 ‘열심히’ 말고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끼어 있는’ 존재가 되어 있다. 이들이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한 자신의 삶이 사실은 열심히 산 게 아니었으며, 앞으로의 삶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산다 해도 원하는 삶을 얻는다는 보장이 없음에도 방법은 열심히 살아서 인정받는 것뿐이다. 이러한 명령은 삶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끝없는 루프, 즉 뫼비우스의 띠로 상상하게 만든다. 열심히 해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삶, 끝이 존재하지 않는 삶. 영원한 무한 반복. -p.165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이런 욕망이 비단 여성의 것만은 아닐 터. 이는 최근 웹소설 및 드라마 장르에서 회귀물이 유행하고 있는 이유를 보여준다. 하지만 <재벌집 막내아들>이든 <내 남편과 결혼해줘>든 주인공들의 2회 차 인생 성공기는 다분히 기만적이다. 윤현우(송중기)는 부자로 태어나고, 강지원(박민영)은 용돈(나인우)을 갖게 된다. 이들에게 사실상 노오력이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건 그런 걸까. 노오력이 필요 없는 삶? 하긴 그걸 누가 거부하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판타지 바깥에 놓여 있기에, 강지원이 박민환과 정수민을 처단하고 승승장구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처단하고 싶어 한다. 왜 더 노력하지 않는 거야? 왜 이렇게/저렇게 하지 못하는 거야? 이 질문들은 결국 나를 옥죄는 사슬이 되어 미쳐버리게끔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의 고통에는 맥락이 있다는 것을.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존재들의 이야기가, 이들이 장착한 시선이 우리에게는 더 많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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