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그 최소한의 볼 일
눈이 내렸다. 눈 속의 아침이 발하던 은밀한 조도가 캔버스에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였다. 문득 아티스트 백현진을 둘러싼 수많은 것들을 거둬내고 온전히 페인터로써의 그를 마주하고 싶다는 가당찮은 어떤 마음이 올라왔다. 그걸 알아차린 듯 수염을 깎은 말끔한 얼굴의 그가 두 개의 커다란 캔버스 사이에 자리를 틀었다. 작가의 그림은 언제나 그 자신의 가장 멋진 백그라운드가 된다. 1월에 있을 그의 다섯 번째 개인전을 채울 그림들이었다. “물리적으로는 작업실에 붙박이처럼 있었어요. 어쨌든 이 안에서 그림 그리는 시간이 제일 많았죠. 하루에 10시간쯤 그려요. 10시간 내내 붓질하는 게 아니라 캔버스 표면이랑 링크되어 있는 시간이 그 정도 된다는 거예요.”
일 년을 넘게 준비한 이번 개인전 타이틀 <들과 새와 개와 재능>은 어떤 분절된 시어 같기도 하다. “그 중에서 제일 필요 없는 게 재능이라고 봐요. 애초에 자연이 있었고, 그 이후에 인간문명이 재능이란 걸 만들어 냈겠죠. 음악이랑 소리 중에 뭐가 먼저 인지를 생각해보면 저는 당연히 소리가 더 흥미로워요. 먼저 있었던 것들이요.” 태초의 것들을 사색하려는 마음이, 그로 하여금 세계가 이름이 없던 상태를 꿈꾸게 한 걸까? 캔버스 앞에 앉아 있는 순간에 백현진을 견인하는 건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실시간으로 계속 반응해요. 건축으로 치면 설계도가 없는 거죠. 예전엔 빈 캔버스가 오면 떠오르는 뭔가를 ‘그려야지 그려야지’ 하면서도 한쪽에서는 ‘안돼, 안돼’하면서 그걸 삭제시키려는 심리적 과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안 해요. 무조건 찍고 봐요. 가끔은 물감 색도 안보고 그냥 찍어요. 찍어 놓고 나면 보이거든요.” 의도 없는 붓질이 시작되면 기억에 없던 기억들이, 그만이 감각할 수 있는 미분화된 세계가 천천히 굳어가는 유화물감의 불완결성 속에서 생동을 지속한다. 그리고 때론 붓이 데려가는 복잡한 길목과 그의 목통에서 시작되는 어떤 소리들이 연동되기도 한다. 작곡하는 백현진과 붓질하는 백현진이 따로 일수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이 섞여 돌아가는 어떤 상태, 어느 평론가의 표현대로 ‘우연과 불연속, 그리고 도약의 장, 요컨대 난장’이 펼쳐지는 것이다.
백현진의 지금을 통과하고 있는 건 “무리 없이 살고 싶다”는 그의 이야기가 내포하는 모든 것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화 많던 붉은 시절이 지나갔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무뎌진다고 할 수도 있는데, 구체적인 게 조금씩 없어져요. 달리 얘기하면 이 세계를, 자연을 엿본거에요. 거창한 건 아니고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이 뭘 덜 하는 게 맞는 거구나 싶어요. 근데 대도시 사람으로 아무 것도 안하는 건 꿈도 못 꾸고 최소한 일을 덜 보는 것, ‘doing for nothing’에 대한 감은 있어요. 어쩌면 작품이 추상으로 가는 것도 사는 게 그렇게 되는 것일 수도 있고요. 이게 맞다 틀리다가 아니라 저한테 무리가 없는 무엇에 대한 거예요. 지금 밖에 눈송이 날리는 건 무리가 없는 현상이거든요. 저런 게 더 좋은 거예요.” 오늘의 모든 비유를 위해 저 눈이 내리고 있는 건가 싶었다. 연남동의 눈, 그리고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백색으로 겹쳐진 작품명 ‘눈보라’가 하필 우리의 긴 이야기 곁에 있었다.
한 챕터를 끝내기에 적절한 12월이라 그에게 지난 일 년 동안 어떤 생각들이 매달려 있었는지 물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기간 정도로 단위를 잘라보면 내가 하는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한편으론 사람들에게 무엇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정말로 예민한 제 사전에 없었던 관계들, 소통들에 대한 걸 조금 열어놓게 되는 건가? 그런 마음이 드네요. 어떤 분들한테 잘 사용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한 달 남짓한 전시 기간 동안 그는 매일 오후 4시에 갤러리로 출근해 전시장 안에서 라이브 퍼포먼스를 만들 예정이다. 하루하루 그가 만들어낼 새로운 소리들이 그림을 걸어놓은 벽 사이를 가로지르며 울리게 될 거다. 알 수 없을 풍경들이 궁금하다면 매일 가 봐도 좋겠다. 갤러리를 자신의 일터로 만들어볼 참이라니, <들과 새와 개와 재능>은 백현진에게도 우리에게도 어떤 새로운 구절이 될 것만 같다. 글/박선영(칼럼니스트)
헤렌 2016년 2월호 커버스토리를 위해 썼다.
인터뷰는 2016년 1월 연남동 작업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