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를 열기 전 일찌감치 준비를 마친 다빈은 아무도 없는 바에 혼자 앉아 메뉴판을 펼쳤다. 새로 메뉴를 정리해야 하는데 이래저래 고민이 많아졌다. 얼마 전 영업사원이 신제품이라며 가지고온 샘플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업계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 '스마트 디스틸링'이라는 기술로 만들어진 위스키였다. '클래식 위스키의 복원'이라는 목표 아래, 기후 변화 등 여러가지 이유로 만들지 못하게 된 위스키의 성분을 다양한 방법으로 분석하여 최대한 가깝게 재현해내는 기술이었다. 장기숙성을 거치는 경우가 많은 클래식 위스키들이 많았지만 이 또한 '초압축 단기 숙성'이라는 기술로 숙성 기간을 몇 일 정도로 압축했다고 들었다. 그만큼 가격도 본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저렴해졌다. 장인정신을 강조하는 전통있는 위스키 양조장이나 오랫동안 위스키를 즐겨온 애호가들 중에는 이러한 움직임에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점점 고착화되어가는 시장에 새로운 관심을 이끌 수 있는 기회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빈은 어느 쪽이었냐 하면 굳이 흥미도 상관도 없는 쪽이었다. 하지만 샘플을 시음하고나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하필이면 다빈에게는 첫사랑과도 같은 위스키를 복원한 제품이었다. 원재료의 배합과 고유의 숙성 방법에서 오는 독특한 매력이 있는 위스키였다. 영업사원이 두고 간 병에 남은 술을 테이스팅 글라스에 따랐다. 잔 안에는 추억 속의 익숙한 색이 그대로 담겨 있었고, 딱 기분좋을 정도로 남는 목넘김이 이 위스키를 좋아했던 이유를 새삼 일깨워줬다. 단종되기 전까지 수 십 잔은 비워 냈었기에 그 맛을 기억하지 못할리가 없었는데, 그 때 마셨던 위스키와 지금 맛보고 있는 이것을 구분해 낼 자신이 없어졌다. 다빈은 가만히 반쯤 남아 있는 샘플 병을 쳐다 보았다. 라벨마저 옛날의 그 느낌을 내고 있었지만, 새로 복원되었다는 의미로 붙은 'Re:’가 괜히 야속했다.
모든 손님들에게 늘 최선을 다하는 다빈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각별하게 신경을 쓰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어떤 위스키나 칵테일을 처음 소개하는 경우들이었다. 자신이 내 놓은 한 잔으로 이 술의 인상이 손님에게 각인된다고 생각하면 막중한 책임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럴 때 만큼은 다빈은 과묵함을 잠시 내려놓았다. 평소에 어떤 술을 즐겨 마시는지, 오늘은 어떤 기분인지, 점심이나 저녁에는 혹시 무엇을 먹었는지 등을 물어보며 손님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긁어 모았다. 그리고 그것을 단서로 한 잔을 추천했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민망해질 때도 있었지만, 한 입을 맛 본 손님의 끄덕거림이나 눈 부시게 밝아지는 표정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다빈은 그 순간을 위해 자신은 바에 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 위스키를 처음 마실 때는 어땠더라. 그 때 추천해줬던 위스키를 여태껏 좋아하고 있다고, 처음 이 술을 권해줬던 바텐더에게 얘기해주고 싶어졌다.
시음용 잔에는 술이 반 쯤 남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달라지는 시대는 다빈으로부터 이런 기쁜 순간을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앗아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손님이 술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반면 특정 위스키가 있는지, 특정 칵테일을 만들어줄 수 있는지를 물어오는 경우가 늘었다. 기분탓이겠거니 하던 차에 때마침 놀러온 옛 동료 바텐더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알고보니 개인 생체 단말이 자신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메뉴판에 적혀있는 다양한 술의 이름을 생체 단말에 인식시키기만 하면 기본적인 정보부터 그 술이 가진 다양한 '썰'까지 알 수 있는 시대였다. 고도로 개인화된 AI는 사용자의 취향과 오늘의 상태를 반영하여, 그가 바에 앉은 것을 인식하면 어떤 술을 주문할지를 권해주고 있었다. 동료 바텐더는 자신의 가게에서 메뉴판을 아예 없애버릴까 생각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얼마 전에는 일본에 '바텐더가 없는 바'까지 등장했다. 정확히는, 각자의 생체단말로부터 받은 데이터를 토대로 술을 내어주는 방식인 모양이었다. 긴자의 유명한 클래식 바와 기술제휴를 맺어 메이킹기술을 구현했다고 들었다. 아직은 이벤트 팝업처럼 운영하는 단계이지만, 점점 이곳저곳으로 확대할 것이라는 인터뷰도 봤다. 초기 비용은 좀 들겠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가게 운영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여져 있었다.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점은 무인운영이 당연해진 시대에, 다빈은 자신이 속한 업계에도 곧 해당이 될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긴 했다. 상상만 해 왔던 미래가 조용하지만 빠르고 분명하게 코앞까지 와 있었다.
다빈은 시선을 돌려 텅빈 가게 안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다빈이 바에 서게 된지는 올해로 13년이 됐다. 여러 가게를 거쳐 자신의 가게를 차린 지는 5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지인들 위주의 영업이었지만, 입소문이 잘 났는지 조금씩 손님이 늘었다. 우연히 들렀다가 단골이 된 손님도 많이 생겼다. 가끔씩 구석에 앉아 첫 잔으로 무조건 김렛을 주문하고는 노트북으로 열심히 작업하는 손님도 있고, 술은 못하지만 식사메뉴로 준비해두는 소고기 스튜가 맛있다며 격주에 한 번 목요일에 오픈하자마자 찾아주는 손님도 있었다. 근처에 있는 학교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늘 얌전히 오른 술기운에 이런저런 주제로 열심히 이야기하는 손님들도 있었다. 다빈은 필요한 대화 이외에 손님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대화에 끼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적어도 두 번 이상 가게를 찾아준 손님은 나름의 방법으로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팔자고 가게를 열 때 했던 다짐을 지킬 수 있게 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다빈은 그동안 많은 것이 변했고, 또 앞으로도 많은 것이 변하겠지만 생각보다 변하지 않은 것도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이 가게에서 다빈이 해야하는 일이 그랬다. 재료를 손질하고, 구석구석을 쓸고 닦으며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일.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것들로 메뉴판을 채워놓는 일. 어떻게든 들어온 소중한 주문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해 대하는 일. 처음 바에 섰을 때부터,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를 지나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다빈의 일이었다. 점점 어떤 술이 좋은 술인지 모르게 될 지라도, 더이상 손님이 다빈에게 말을 걸지 않게 되더라도, 누군가가 아닌 무언가가 다빈의 자리를 노리더라도, 다빈은 여전히 해야하는 일이 있었다. 물론 그러면서 겪게 될 일종의 답답함이나 서운함, 불안함도 있겠지만 그것을 견뎌내는 것 마저도 온전히 다빈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잔에 따라둔 샘플을 마저 다 마시고 나니 어느덧 가게를 열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간판 불을 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이 하나 둘 들어왔다. 샘플 병을 장에 넣어두는 것을 깜빡하고 바에 그대로 두었더니 손님들이 관심을 보였다. 병을 들어 손님들에게 맛 보여줄 요량으로 잔에 조금씩 따르면서, 그러고보면 아직 이 술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다빈은 생각했다. 누군가는 이 술을 두고 가짜라고 손가락질 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 술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는 좀처럼 없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음을 나눌 수 있는 순간은 오늘처럼 온다. 누군가의 처음을 만들고 파는 일 역시 여전히 근사한 자신의 일이라고 느끼면서, 다빈은 손님들과 잔을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