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정각. 출석을 부르려는데 민형이 아픈 얼굴로 다가와 몸이 너무 좋지 않다고 말한다. 아이의 상태를 빠르게 확인한다. 꾀병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지만 꾀병 같다고 해서 아이를 붙잡아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8년차 강사 경력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이는 정말 아픈 것 반 쉬고 싶은 것 반이다. 나는 잠시 주춤한다. 그런데 증상을 들으니 아뿔싸, 코로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아이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지 않은 상황. 아이를 보내도 되는 이유에 보내야 하는 이유까지 생긴 셈이다. 일단 아이를 보내고 급히 병결 처리를 한다. 아이의 부모님에게도 빠르게 문자를 남긴다.
“방특 담당 이지은T입니다. 방금 민형 학생이 열이 나고 어지럽고 몸이 많이 안 좋다고 하여 조퇴시켰습니다. 확인차 연락드립니다.” 오후 06:04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고 수업에 돌입한다. 6시 15분, 불길한 기운이 엄습하자 나는 아차 싶어 수업을 잠시 멈춘다. “숙제 고치고 있어.” 잠시 강의실 밖으로 나가 민형의 부모님께 전화를 건다. 통화연결음이 30초 넘게 울리고 있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받아라, 제발 받아라. 부모님 확인 없이 아이를 조퇴시켰다가 학부모에게 컴플레인이 들어왔던 몇 해 전 일이 내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그리고 바로 지금, 부모님께 확인받는 절차를 생략하고 아이를 조퇴시킨 대가로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만약 학부모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신다면 컴플레인을 받을 게 뻔하다. 아이의 평소 모습을 떠올린다. 성실함과는 거리가 멀다. 건물 뒤 주차장이나 건물 계단 어딘가에서 놀고 있을 모습이 떠올라 아찔하다. 정말로 아파서 집에 돌아갔으면 다행이련만, 실은 부모님의 눈을 피해 땡땡이를 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한 것이라면- 쏟아지는 비난을 내가 받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대외적으로 나의 직업은 자주 바뀐다. 배우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기 위해 강사 일을 시작했으니 연차도 거의 같다. 배우 일을 할 땐 배우요, 강사 일을 할 땐 강사지만 배우도 강사도 아니어도 되는 곳에서 직업을 묻는 질문을 받게 되면 경우에 따라 배우였다가 강사였다가 한다. 정형외과에서 도수치료를 받을 땐 대체로 강사고 (이미 뭉칠 대로 뭉쳐버린 내 오른 어깨가 그것을 증언한다.) 피부과나 음성클리닉에 갈 땐 배우다. 무엇도 애매할 땐 덜 귀찮아질 것 같은 쪽을 택하지만 그렇다고 속이 편하지는 않다. “배우예요.”라고 말하면 따라올 반응이 부담스러워 “강사예요.”하고 말해버리면 꼭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속 어디께가 불편해진다.
이렇게 두 직업 사이를 일주일에도 몇 번씩 오가려면 한 배역에서 다른 배역으로의 ‘전환’은 필수 덕목이다. 마치 연극에서 1인다역을 맡은 듯, 한 배역에게서 다른 배역이 겹쳐 보이거나 묻어나지 않게 나름 애를 쓴다. 특히 조심하려 노력하는 것은 파트타임 강사라는 이유로 실수하는 일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때문에 하루를 통째로 써서 수업을 준비하기도 한다. 덕분에 나는 같이 일하기 좋은 동료 강사, 어떤 수업이든 믿고 맡길 수 있는 우수 직원이 되었다. 그런데 수업은 준비하면 그만이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학부모 상담전화다. 개강 상담-중간 상담-종강 상담의 쓰리 콤보 사이사이 결석 확인 및 보강 안내 전화, 클리닉 전화, 기타 상담 등 온갖 전화 업무는 평일과 주말은 물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된다.
나는 어떤 일터에서도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다.
대학원을 갓 수료하고 서울에 정착할 돈을 모으기 위해 일주일에 3일을 학원에서 일하던 때였다. 토일요일 12시부터 10시까지 수업이 꽉꽉 차 있었다. 총 여덟 개의 수업에 들어가는 시간표인데 수업 내용이 겹치는 반은 두세 개인지라 사실상 다섯 개의 수업을 준비해야 했다. 수업 준비를 하고 상담 전화를 돌릴 수 있는 시간이 나는 날은 3일 중 단 하루였으나 그마저도 테스트 점수가 기준 미달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클리닉을 진행하다 보면 하루가 그냥 가곤 했다. 그러니 수업 준비와 상담 전화는 업무 외 요일에 시간을 내어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고, 일주일에 마흔 통이 넘는 전화 업무를 쳐내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볼뿐인 아이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아마 살면서 마주칠 일 없을 학부모님들과 나눈 뒤 상담일지를 적으면 일은 끝났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시험대비반이 본원에서는 열리지 않는 관계로 다른 학원에서 시험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머님, 서진이는 시험기간에는 ‘동네 학원’을 알아보셔야 할 것 같아요.”
얼마 후, 수화기 너머로 폭언이 쏟아졌다. 교무실에 계신 모든 선생님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어린아이처럼 엉엉. 오고 가는 전화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두 아는 눈치였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전화가 끝날 때까지는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쏟아지는 비난에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제발 전화가 끝나기만을 바랐다. 마침내 전화를 끊자 눈물이 멈추기는커녕 서러움이 폭발해 거의 오열을 했다. 원장님의 손에 이끌려 상담실에 가서도 자리로 돌아와서도 퇴근할 때까지도 나는 울다가 참다가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다음날 원장님께 전해 들으니 동네학원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 화근이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 목소리를 조금은 잃어버렸다. 전화상담 자체도 무섭지만 다른 선생님들이 같이 있는 곳에서 전화상담을 하는 것을 가능하면 피하려 했다. 교무실에서는 모두가 내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 같아 도통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웬만한 상담은 집에서 처리했고 급할 땐 건물 계단이나 화장실에 숨어서 전화 상담을 하기도 했다. 그런 한편, 나는 다른 선생님들의 상담 패턴을 학습하기도 했다. 학부모님들이 절대로 쉽게 보지 못할 것 같은 두 선생님을 롤모델 삼아 그들의 상담 요령은 물론 목소리라거나 말투 같은 것들을 나도 모르게 흡수해 갔다. 성향이 다른 두 분 선생님을 동시에 벤치마킹한 탓에 공격성 제로인 순하디 순한 유치원 선생님 같은 캐릭터와 ARS를 방불케 하는 파워 “T” 성향의 선생님이라는 두 캐릭터를 오가게 되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이 목소리뿐일까. 학원 일을 하면서 나는 하나를 지키는 대신, 다른 하나를 자꾸만 잃는 기분이다. 다행히도 그날 민형의 부모님은 내 전화를 받아주셨다. 전화기 너머로 연결음이 끊기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일이 이렇게나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일일 줄이야. 어머님께서는 아이가 조퇴했는지는 몰랐다고 말씀하셨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에 나는 조금 불안해진다. 어느새 나는 민형이 많이 많이 아파보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방금 전 내가 보았던 반쯤 꾀병 같았던 아이의 얼굴이 아니라, 새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아이의 얼굴을 상상해 낸다. 나는 아이의 말을 ‘믿었을 뿐이라고’.
전화를 끊고 강의실로 돌아가려던 나는 흠칫 놀란다. 닫힌 강의실 문 위에 으레 벽이 있어야 할 곳에 벽이 없다. 나의 통화 내용을 아이들이 들었을까. 들었을 것이다. 들렸을 테니까.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 아이들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핀다. 아이들은 여전히 저마다의 자세로, 그러나 하나같이 고개를 책상을 향해 숙인 채 숙제를 고치고 있다.
아이들에게 숙제를 왕창 내야 하는 게 속상해 쉬는 시간에 몰래 눈물 훔치던 시절이 있었다. 1년차 때의 일이다.
여리디 여렸던 1년차가 교무실에서 엉엉 울던 5년차를 지나 이제는 아픈 아이를 두고 내가 다칠까 걱정하는 8년차가 되었구나, 별로구나 하고 생각한다. 내가 조금 별로여도 아이들에게는 내 불안함과 비겁함과 조마조마함이 쭉 비밀이길 바랐는데 아무래도 실패한 걸까.
아이들이 어른 몫을 짊어지고 있는 건 지금도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데 내게서도 넘치는 것들이 생기고 있는 것 같다.
<떨어져 나간 것들> / 이은
이 글을 쓴 지 세 달이 지났다.
지난 주말 학원 근처 골목에서 낯이 익은 한 아이를 마주쳤다.
왜인지 나는 아이와의 마주침이 민망해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되었는데, 지나친 뒤에야 그 아이의 이름을 떠올려냈다.
민형이었다.
집에 돌아와서야 며칠이 지나고서야 건강히 잘 지내고 있냐고 물어볼 걸 그랬다고 생각해본다.
다음에 마주치면 인사할게. 민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