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행복에 이르렀기를...
알고보니 굉장히 재밌다고 난리난 책. 평도 너무 좋고, 정세랑 작가의 책을 처음 읽는 건데 꽤 다작에 유명한 작가였구나. 사실 나는 책린이 단계이기 때문에 모르는 작가들이 너무 많지. 한강이나 신경숙이나 이번 정세랑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다. 아, 한국 여성 작가들의 책을 좀 많이 읽어봐야겠다. 뭐랄까 설명할 수는 없는데 적당히 무거우면서 깊이 있는 문체가 좋다. 물론 모두가 그런건 아니지만....
아무튼 정세랑 작가의 글은 몇 권 더 읽어봐야지! 하는 마음이 들만큼 좋았다.
차분한 문체, 깊이 있는 시선, 너무 좋은 문장이 많아서 접어 놓은 페이지가 20페이지가 넘었다.
이 책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51명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개인인데 또 서로 조금씩 연결되어 있다. 굉장히 특이한 구성이었다.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들과 스치듯 인연을 맺게 되는 걸까?
"ㅡ 문득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한사람 한사람은 미색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요. (중략) 세상이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잡아매는 것은 무심히 스치는 사람들을 잇는 느슨하고 투명한 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p392~393
51개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짧게 수록되어 있어서 큰 줄거리는 없다. 주인공도 없고 줄거리도 없는 책.
그래도 마음에 많이 남는다. 51명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내 가족의 이야기, 내친구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기에,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라서 마음이 가고 공감이 된다.
그냥 잔잔하게 읽으면서 묵직하게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들이 많아서 좋았던 책.
딱히 줄거리가 없어서 마음에 와닿았던 문장들을 적어볼까 한다.
"나중에 이날을 기억할 때 엄마가 도는 저 모습이 기억날 거란 걸 수정보다 수정의 눈물기관이 먼저 깨달은 것 같았다. (중략) 엄마의 강인함도, 엄마가 맨날 부리던 억지도, 이상하게 저 사락사락함으로 기억날 것만 같으니까." p13(송수정)
"최악의 상황이 오면 사람들은 생각보다 강인해진다. 불행을 팔아 일자리를 얻는 것쯤은 마음에 미약한 실금도 긋지 않았다. (중략) 불효를 저지르는 것도 별로 두렵지 않았다. 누구도 비난 못할 핑계가 있었으니까. " p50(장유라)
"있잖아, 우리가 50년쯤 후에 다 같이 죽을 거라는 것보다 30년쯤 후에 다 같이 고아가 될 거라는 게 더 무섭지 않아?" p79 (한승조)
"고장난 트렁크를 친절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집에 가면 자기 가족에게 어떤 얼굴을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거짓말 너머를 알고 싶지 않다. 이면의 이경(異景)따위. 표면과 표면만 있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 p90 (강한영)
"있잖아, 마음에 가증 같은 게 있는 사람은 힘들다? (중략) 그런 사람은 항상 져. 내가 보기엔 네가 힘든 게 몸무게 떄문도 아냐. 마음 때문이야. " p121 (문영린)
"서른은 사실 기꺼이 맞았다.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20대가 너무 힘들어서 서른은 좋았다. 마흔은, 마흔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삶이 지나치게 고정되었다는 느낌, 좋은 수가 나오지 않게 조작된 주사위를 매일 던지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게 있다. " p130 (조희락)
"우리가, 한사람 한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랑의 기간들이 얼마나 길까." p141 (김의진)
"결혼은 그 나름대로의 노력이 계속 들어가지만, 매일 안도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마음을 다 맡길 수 있는 사람과 더이상 얕은 계산 없이 팀을 이루어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 p164 (홍우섭)
"사람 안쪽에도 저런 눈금이 있으면 좋을 텐데, 차오른다면 알 수 있게. " p223 (박이삭)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 p266 (이설아)
"아마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수경도 잊을 것이다. 묻지 않을 것이다. 몇년 후에 서로의 눈 속에서 이 저녁을 연상시키는 어떤 것을 발견한다 해도 못 본 척할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일은 대수롭지 않게 잊혀야 한다. " p313 (이수경)
"승화의 몸과 마음을 혹독하게 다뤘던 엄마는 죽고 없다. 승화는 안도하고, 안도할 때마다 스스로를 미워한다.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 p 351 (방승화)
"다운은 정빈에게 뭐라고든 말하고 싶었지만, '걱정'보다 훨씬 크고 무겁고 끔찍한 그 감정의 이름을 몰랐다. 아직 다운이 배우지 않은 단어들 중에 그 감정의 이름이 있을까?" p364 (정다운)
"사람들은 왜 팝콘을 바닥에 흩뿌리는 걸까. - 어두운 곳이라서다. 어두우니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 이 아르바이트를 함으로써 어두운 곳에서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써비스직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만은 되지 않을 것이다. " p 367 (고백희)
너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와서 누가 무슨 이야기였는지 이리 저리 다시 찾아보고 했지만, 어느 하나 가벼운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다. 하나하나 다 좋았다. 얕은 감성도 아니었고, 그냥 대충 쓴 글 같지가 않아서 좋았다.
가슴에 딱 꽂히는 이야기는 없지만 이 책 자체가 마음에 남는다.
모두가 행복에 이르렀으면...
특히 조양선과 장유라, 정빈이와 다운이, 배윤나, 한규익, 하계범 할아버지 모두.
마음이 편안함에 이르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