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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시시포스 Jan 14. 2024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읽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창조하시니라 ...” 구약성서 창세기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하여 절대 신인 하나님이 6일간에 걸쳐서 우주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의 천지란 우주만물을 지칭하고 태초란 우주의 처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즉 기독교에 있어서는 성서에서 말하는 우주란 절대자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전지전능의 존재- 인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주의 역사를 보면 -지구의 역사만을 보더라도- 기독교가 발생하기 이전 시대에도 지구상에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존재하다가 멸종했고 또 새로이 생겨나곤 했음이 고학적 탐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인간은 유사 이전의 선사시대로부터 부단히 지적 활동을 계속해 왔고, 그것을 점진적으로 확장해 왔으며, 이를 통해 생활영역을 넓히고 향상시켜 온 것이다.


실로 인간의 역사는 사고영역의 확장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원시적 동물의 상태에서 부터 불을 발견하고 도구를 사용하며, 언어로 서로의 의사를 소통하고 문자로써 정신적 유산을 기록하여, 기술과 지식을 축적했으며 드디어는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하는 지위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역사의 과학적 고찰에 바탕하여 인간은 정신적.육체적 진화의 산물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현존하는 실재 또한 진화의 결과라는 과학적 주장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처럼 창조론이 종교적 배경을 짙게 내포하고 있음에 반하여, 진화론은 신과 윤리적 관념 -인간의 정신과 생활을 억압하는 의미로서의 윤리 - 에서 벗어나서 보다 합리적인 인간 이성에 바탕한 과학적 고찰의 산물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창조와 진화는 별개의 개념이며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인가? 또 양 설이 시사하는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그가 속해있는 우주와 그 속의 만물의 본질에대해서 궁금증을 갖고 그것을 밝히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고대 그리스의 많은 과학자들에 의하여 물질의 본질에 관한 탐구가 행해졌고, 오늘날에는 물질의 근본 구성요소인 원자들이 수없이 많이 모여서 모든 물질을 형성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물질의 문제뿐 아니라, 인간은 살아서 生命을 향유하는 생명체의 본질에 관한 의문 또한 점증하여, 그에 대한 논한과 연구가 적지 않게 진행되었고 오늘날에도 진행 중에 있다. 즉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생명현상이 무주물에서 일어나는 현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생기론(論)과 그들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기계론(機械論)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과학이 신학의 시녀로서 기능하던 기독교 지배시대에 있어서는 물질과 시간이 모두 신의 천지창조 이후부터 존재한다고 주장되기도 했다.


또한 동양에서는 우주를 음양지기로 꽉 차있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파악하여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고 보았다. 즉 자연현상의 모든 변화를 일으키는 동인을‘기(氣)’라고 하며 그러한 자연현상이 있는 까닭을 ‘이(理)’라고 하는 이기설(理氣說)이 그것이다. 기실 태초의 생명 발생에 대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개념은 너무나 막연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며 진화란 어떤 선재(先在)의 것을 전제로 하여 그 형상이나 기능 등이 그가 속한 자연에 적응하기에 보다 적합한 것으로 발전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창조나 진화는 일정 시점에서 단편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연속적이며 부단하게 진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 신(神)이란 것도 이와 같이 정의되면, 무엇 한 가지 창조한 것이 없고 부단한 생명이며 행동이고 자유인 것이다...” 라는 말처럼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물적 정신적 형상들은 이나 절대자에 의해 애당초에 결정되어진 것이 아니며, 자유의지나 생명의 본능에 따라서 부단히 변화 발전한 결과로서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창조와 진화는 생명의 기원과 그 변화 발전의 측면에서 볼 때, 상호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과 성장 - 이를테면 닭과 달걀 - 의 관계가 아닐까한다. 그런 의미에서 “행동은 전진하면서 성장하며 진전됨에 따라 창조해 가는 것으로서...”라는 베르그송의 견해는 인간과 우주 속의 모든 생명체의 본질에 대한 적절한 고찰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진화는 전진운동 만을 하는 게 아니라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경우도 많으며 탈선이나 뒷걸음질 치는 경우가 더욱 많다는 것이다. 이는 다윈(1809 - 1882)이 주창한 진화론에서의 적자생존의 법칙이나 자연도태의 원리와도 상통하는 개념이라 하겠다.


생명은 행동을 통해서 전진 성장하고 발전됨에 따라 창조해 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진화와 창조는 상호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위에서 설명했다. 그러면 베르그송은 왜 ‘진화적 창조(進化的 創造)’가 아닌 ‘창조적 진화(創造的 進化)’라는 말로써 상호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을까 ? 이것은‘창조적 진화’란 진화의 독창성 또는 최초성으로 인해 변화 이후의 모습에서는 그 이전의 잔존를 좀체로 찾아볼 수 없는 상태로의 전화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반면,’창조적 진화‘란 말은 창조가 진화라는 개념을 포함할 수 있음에 반해 그 逆은 성립할 수 없음으로 인해 의미상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창조성이 결여된 창조 - 진화적 창조 - 란 이미 창조가 아니라 진화 그 자체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기독교적 창조 - 우주생성의 채초의 창조라는 개념 -와 유사한 창조개념을 전제로, 우주의 역사를 창조의 연속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여하튼 우주의 지속은 거기서 일어날 수 있는 창조의 넓이와 한가지일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윤리적 신학과과 결별하고 경험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과학의 사상을 새로이 신학적 도덕성과 경합시키려는 시도가 아닌가 한다. 즉 모든 생명체는 창조의 요구를 의미는 생명의 동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또한 세계 창조는 자유로운 행위이며, 생명도 불질세계의 내부에 존재하면서 그러한 자유를 갖는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을 인간에게 유추할 때, 인간의 의식은 창조의 요구를 의미하게 되며, 그 의식이 자기원리에 합치되기 위해서는 ‘完成된 것’으로부터 떨어져서 ‘완성되어 가는 것’에 접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이것은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서 인간을 창조했고, 따라서 인간은 신의 완전함을 본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교리와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 이것은 이상 - 이데아 -를 전제하고 그것을 향해 부단히 전진하는 - 또는 그 반대로 무한히 타락할 수도 있는 - 인간정신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완전함을 향해 전진하는 과정으로서의 창조라고 하겠다.


창조와 진화에 대해서는 인간이 우구의 생성과 그 변화 발전 및 생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부터 의문시 되어 왔으며, 지금껏 그 비밀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창조와 진화는 고대의 철학자들에 의해 상호 긴밀한 관계하에서 연구되었고, 기독교의 영향으로 창조론이 지배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과학이 신학의 그늘에서 벗어나면서 진화론의 타당성이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즉 창조란 신학의 범주로, 진화는 과학의 범주로 간주되어 상호 무관한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창조를 부단히 연속하는 것으로 보아 자유의지에 의거한 창조의 요구로서 파악한다.


창조가 완성된 것을 의미한다면, 진화는 미완성의 것으로서 완성을 향해 부단히 계속되는 과정을 뜻한다고 하겠다. 또한 이러한 생각은 변증법에 있어서의‘正(창조) - 反(진화) - 合(새로운 창조)’의 사상과도 통하는 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停止하고 있는 대상이 아닌 부단하게 발전 변화 - 또는 퇴보 - 하는 대상으로서의 우주만물은 바라보는 태도라 하겠다.


“철학이란 생성일반의 완전한 규명이고 참다운 진화론이다”고 하는 그의 말은 부단히 자유로이 행동하는 생명에 있어‘창조’와 ‘진화’의 조화점을 찾고자 하는 고뇌와 타협해 보려은 미완의 해답이 아닌가 생각된다. 1989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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