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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시시포스 Sep 09. 2021

난창 등왕각에 오르다

강남 3대 명루(名楼)의 하나

한나절 여산(庐山) 유람의 흥취를 곱씹으며 피곤한 몸을 지우장(九江) 시내 호텔에서 다독였다. 다음날 아침, 호텔 방에서 복도로 나서니 후끈한 열기가 온몸으로 밀려든다.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을 들고 짐을 챙겨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역에서 가깝고 가성비가 좋아서 선택한 호텔은 주변이 온통 고층 아파트가 점령하고 있어 다소 삭막해 보였었다. 택시기사에게 물으니 구도심은 강변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양쪽에 망루처럼 높다란 구조물을 거느린 역사(驛舍)가 뭉게구름이 피어오른 하늘을 배경으로 멋진 작별인사를 선사한다. 역사 규모는 다른 큰 도시와 달리 아담하다. 우리가 탑승할 09:06발 난창 행 T397 기차는 산동성 칭다오(青岛)를 출발해서 광동성 선전(深圳)으로 가는 침대열차다.


난창은 1927년 8월 1일 새벽, 주은래 주덕 하룡 섭정 유백승 등이 중심이 된  공산당 무장세력이 국민당군 1만여 명을 일거에 무찌르고 혁명전쟁을 선포한 곳이다. 8.1 광장 8.1 공원 8.1 대교 등이 바로 그 혁명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그곳에서 기습적으로 혁명전쟁의 기치를 올렸던 것처럼 열차는 느리지만 집요하게 시간을 훔쳐 난창(南昌)으로 잠입했다. 한 시간 여만에 난창 역에 도착해서 쉬이 역사를 빠져나와 지하철 2호선과 1호선을 갈아타며 텅왕거(王阁)로 향했다. 지하철 1호선 만수궁(万寿宫) 역에서 텅왕거까지는 1km 남짓 거리다.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오니 아폴론의 태양 마차가 중천으로 치달으며 지상으로 한껏 뜨거운 기세를 펼치고 있다. 남창은 충칭(重慶) 우한(武漢) 창사(長沙)와 더불어 장강 유역에 위치한 도시로 중국 내 가장 더운 4대 화로(火爐)의 하나라고 한다. 이런 여름철엔 중국 4대 피서지의 한 곳으로 알려진 난창 북쪽 근교의 루산(庐山)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리에 접한 패루로 들어서서 저 멀리 우뚝 솟아 위용을 떨치고 있는 텅왕거가 눈에 들어온다. 텅왕거는 난창시 서남쪽 간강(赣江)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누각으로 당나라 고조 이연의 아들 이원영(李元婴)이 홍주 도독으로 있을 때인 653년에 세운 것인데, 그가 이때 등왕(王)에 봉해졌으므로 텅왕거(王阁)라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그 자체로 빅물관이나 다름 없는 등왕각

남창은 예부터 '오두초미(吳頭楚尾)'로 일컬어지는 강서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런 탓에 텅왕거는 전란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소실되는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고 한다. 지난 1천3백여 년 동안 28차례나 파괴되었는데, 마지막으로 불탄 것이 1926년 10월 국민혁명군이 북벌 중 남창으로 진공했을 때라고 한다.

지금의 등왕각은 지난 1989년 중양절에 29번째로 재건된 것으로 높이 57.5m 건축면적 9천4백m²에 달한다고 한다. 송나라 때의 목조건물 양식에 당대 누각의 특징을 가미했다고 하는데, 그 앞에 마주하고 서니 규모가 종전 어느 때의 것보다 더 높고 더 크고 더 웅장하다는 것을 누각 안에 전시된 기록들을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높은 기단부 계단을 올라 텅왕거 내부로 들어가서 계단을 따라 단번에 최상층인 6층으로 올라갔다. 내부에는 왕발의 문학적 재기를 닮고자 하는 것인지 재복을 기원하는 나무 패가 무수히 걸려 있다. 바깥 겹처마 사이에는 소동파가 썼다는 금빛 글씨의 '텅왕거(滕王阁)' 편액이 걸려 있을 것이다.

아래층 난간이 둘러쳐진 바깥 회랑으로 나서니 코발트빛 물감을 칠해 놓은 듯 빛나는 하늘 아래 북쪽 지우장의 포양후(鄱阳湖)를 거쳐 창장(长江)으로 흘러드는 간장(赣江)이 시원스레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서편 강 건너편 등 사방 멀찍이 물러선 곳에 솟아 있는 빌딩들은 높이가 텅왕거에 비할바 없이 높지만, 텅왕거의 위용에 눌려 마치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듯 왜소해 보이기까지 하다.

회랑을 몇 바퀴 돌며 고개를 쳐들어 사방 처마에 걸린 호방한 편액 글귀들의 뜻을 음미해 보고, 난간에 기대어 거칠 것 하나 없이 멀리까지 펼쳐진 장관도 오래도록 조망했다.

아래층인 5층에서 1층과 기단부 전시 공간으로 내려가면서 편경, 백접백화(白蝶百花) 아크릴 그림, '천하제일수(天下第一寿)' 휘호, 텅왕거의 건축기법과 역사 관련 안내문, 실물 크기 인형으로 재현해 놓은 등왕 주최 연회 모형, 송원 명청대 도자기, 그리고 기단부의 각 사대별 등왕각 모형 전시물 등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누각 건축물 하나가 마치 박물관을 방불케 하여 등왕각 내외부를 둘러보는데 어느새 세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위에양(岳阳)의 악양루와 우한(武汉)의 황학루가 두보의 <등악양루(登岳阳楼)>와  최호(崔颢)의 <황학루(黄鹤楼)>로 각각 유명세를 얻었다면, 텅왕거의 유명세는 노조린(盧照隣), 낙빈왕(駱賓王), 양형(陽炯)과 함께 초당사걸(初唐四傑) 중 한 명으로 불리는 왕발(王勃, 647-675)의 <등왕각서(藤王閣序)>에 힘입은 바 크다.

당 고종(高宗) 때인 676년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홍주 도독 염공(閻公)이 등왕각 중수를 마치고 주연을 열고 손님들을 청하여 자기 사위인 오자장(吳子章)의 글재주를 자랑코자 했는데, 마침 지금의 베트남 지역으로 아버지를 뵈러 가던 왕발이 이 연회에 참석하여 즉석에서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문재(文才)가 출중했던 왕발은 20대에 출사 했지만 지나친 호기(豪氣)로 파면되고 부친마저 베트남 지역으로 좌천되었다고 한다. <등왕각서>를 지은 후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28세로 요절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藤王閣序> _王勃
藤王高閣臨江渚  佩玉鳴鸞罷歌舞
畵棟朝飛南浦雲  朱簾暮捲西山雨
閑雲潭影日悠悠  物換星移幾度秋
閣中帝子今何在  檻外長江空自流

등왕의 높은 누각 강가에 있는데
패옥 명란 울리던 노래와 춤 그쳤네
화려한 누각 기둥 남포 아침 구름 날리고
붉은 발 걷자 서산에 비 내리네
한가한 구름 못에 비치고 해는 유유히 지나는데
만물 변하고 별자리 바뀌니 몇 해가 지났는가
누각에서 놀던 등왕은 어디로 가고
난간 밖 장강만 덧없이 홀로 흐르네.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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