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가 시작되었다. 타국에 혼자 나와 있으니 이번 추석은 가족들과 얼굴을 맞대고 밥 한 끼를 나눌 수도 없고 부모님 산소에 술 한 잔 부어드릴 수도 없다. 이럴 때 그냥 죽치고 앉아 있으면, 거대한 이 도시 상하이는 오히려 좁은 감방처럼 느껴질 것이다. '명루(名楼) 탐방'이라는 주제의 2박 3일 기행을 기획했다.
우한(武汉)으로 가서 위에양(岳阳)과 창사(长沙)를 거쳐 상하이로 돌아올 요량이다. 우한과 위에양에는 각각 황학루와 악양루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 칠월에 난창(南昌)의 등왕각(滕王阁)에 이어 이번에 두 누각을 둘러보면 소위 '강남 3대 누각'을 모두 찾아보는 셈이다. 또 어쩌면 강남 3대 명루(名楼) 중 그 어느 곳에서 둥근달을 감상하는 행운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각이 뭐 그리 대단하여 시간과 돈을 버리면서 그 먼 거리를 달려갈까 싶지만, 누각이 어디 건물 그 자체의 외형만 보러 가는 것일까. 기억할 만한 연유로 세워져서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두꺼운 역사의 옷을 켜켜이 껴입고 있어, 그 의미와 사연들을 하나씩 들춰보는 재미와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배낭을 챙겨 들고 홍차오 기차역으로 향했다. 반팔 셔츠 차림 팔뚝으로 스쳐가는 공기에 쌀쌀한 냉기가 느껴진다. 장마철 도랑으로 휩쓸려 내려가는 빗물처럼 많은 사람들의 물결이 쉼 없이 거대한 규모의 역사 안으로 밀려들고 있지만, 중추절을 앞두고 마음이 느긋해진 탓인지 홍차오 역사 안은 평소의 여느 주말보다 사람들 발걸음은 오히려 차분해 보인다.
상하이 홍차오역에서 07:55발 우한행 열차에 올라 1시간 만에 장쑤성(江苏省) 난징의 남역, 또다시 한 시간 만에 안후이성(安徽省) 허페이의 남역을 거쳐 11시 반경 후베이성(湖北省) 우한의 한커우 역(汉口站)에 도착했다. 산악지대가 이어지던 안후이성과는 달리 우한 역내로 들어서니 드넓은 평원이 이어지고 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올라가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다. 고속열차 푸씽호(复兴号)가 상하이를 출발해서 채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3개의 성 성도를 꿰차며 달려온 것이다.
밀물처럼 인파에 밀려 플랫폼을 빠져나와 출구로 나가려니 휴대폰의 코로나19 음성확인 코드 젠캉마(健康码)가 외국인에겐 열리지 않는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많던 승객이 다 빠져나갔을 즈음 검사원에게 사정을 얘기하니 그냥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인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지위치아오(积玉桥) 역에서 내려 황학루 부근에 잡아둔 호텔로 직행했다. 자전거로 금방 닿을 줄 알았는데 제법 거리가 있고 상하이와는 달리 아직도 여기는 태양의 열기가 뜨거워 벗어났던 한여름으로 다시 돌아온 듯 느껴진다.
황학루의 어깨춤 위 모습이 보이는 곳에 위치한 호텔에 도착했는데 외국인은 투숙이 안된다고 한다. 흔히 있는 일이라 놀라울 것도 없지만 부근 다른 호텔(雅斯特酒店)을 찾는데 시간과 노고를 허비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듯 이곳에서는 이곳 법을 따를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황학루는 여기저기 공사판이 벌어진 도로, 철길, 주거지와 식당 등이 촘촘히 들어선 주택가 등에 포위되어 갑갑해 보이는 낮고 길쭉한 언덕 위 서쪽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자전거를 지쳐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길을 헤집으며 황학루로 향했다. 수의 공원(首义公园)과 맞닿은 황허루 공원의 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입구로 들어섰다.
어비정(鹅碑亭)과 낙매헌(落梅軒)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무슨 연유로 이곳에 세워졌는지 알 수 없는 언덕배기에 자리한 악비(岳飞, 1103-1142)의 동상을 둘러보았다. 남송의 장수였던 그는 금나라 침공을 화이허강(淮河)과 친링(秦嶺)에서 저지하는 전공을 올렸지만 재상 진회(秦檜) 등 주화파들의 모함으로 무고한 누명을 쓰고 39세에 살해되었다.
아들 악비의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 네 글자를 새긴 노모의 바람대로 악비는 중국 한족 역사상 충(忠)의 표상으로 숭앙되고 있다. 항저우 서호 서쪽 악비의 무덤과 그 앞에 옷이 벗긴 채 무릎 꿇린 진회의 동상이 떠오른다.
악비像을 뒤로하고 공업천추(功業千秋) 홍엽임롱(紅葉林籠) 백화낭천(白花浪濺) 등 글귀를 현판마냥 새긴 위풍당당한 석재 패루를 네댓 개 지나서 저 멀리 황학루를 바라보며 자리한 백운각(白云阁)에 올랐다. 서편에 하늘 높이 위용을 자랑하며 황학루가 우뚝 솟아 있다.
백운각 내부에 전시된 화가 손은도(孙恩道,1950-)의 칭하이(青海) 여인도와 <당인격국도(唐人擊鞠圖)> 등 국화(国画)들을 잠시 감상했다. 그 옆 각필정(擱筆亭)은 이백이 이곳을 찾았다가 시흥이 발하여 시 한 수를 지으려다 벽에 걸린 최호(崔顥, 704~754)의 시 <황학루(黃鶴樓)>를 보고 붓을 놓았다는 일화가 있는 곳이다.
옛사람 이미 황학을 타고 가 버리고, 이곳엔 부질없이 황학루만 남아 있네. 황학은 한 번 가니 다시 오지 않고, 흰 구름만 천 년토록 부질없이 감도네. 맑게 갠 냇가에 한양 땅 나무들 역력하고 꽃다운 풀은 무성히 앵무주에 우거졌네. 날이 저물었는데 고향 땅은 어느 곳인가 강안개 속에서 근심만 쌓이게 하네.
각필정을 뒤로하니 수없이 많은 처마를 겹겹이 하늘로 추켜올린 웅장한 모습의 '천하강산제일루(天下江山第一楼)' 황학루가 앞에 턱 버티고 서있다. 손권이 유비와의 싸움에 대비해 서기 223년 건립한 것이 그 시초로 강남 3대 명루 중 하나로 손꼽히는 황학루를 오늘에야 오르게 되니 감회가 남다르다. 1700여 년 동안 7차례 소실되고 지금의 것은 1985년 청대의 양식을 빌려 51.4m 높이로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1층으로 들어서서 황학루에 얽힌 백학 전설을 담은 화려한 대형 타일 벽화를 고개를 한껏 쳐들고 감상했다. 밖에서는 구별이 어려운 2층으로 오르는 중간층은 기념품점이 차지하고 있다. 2층은 주유가 유비를 초대해서 주연을 베풀고 인질로 삼으려던 소설 <삼국지>의 고사 '주유설연(周瑜說緣)'과 '손권축성(孫權築城)'을 재현해 놓은 목각 벽화가 볼만하다.
최호, 이백, 백거이 등 이곳을 찾은 수많은 시인묵객들을 소개하고 있는 3층의 난간으로 나서니 아래층 처마가 머리 위 3층 처마에 닿을 듯 학의 날개깃처럼 한껏 추켜올려 과장된 멋을 부렸다. 우뚝 솟아 사방으로 조망이 툭 트인 것은 옛날과 같을 텐데, 난간으로 나서니 도시의 빌딩 숲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고 좌우측으로 포위하듯 감싸고 지나는 차로와 철길에서 차량 소음이 귓전을 때리며 덮쳐온다.
시대별 황학루 모습을 그림으로 볼 수 있는 4층에서도 난간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각도만 다를 뿐 2, 3층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전경에 생뚱맞게 러시아 전통 인형인 마트료시카가 떠오른다.
5층 '초천극목(楚天極目)'이라 쓰인 현판이 걸린 처마 밑에서 누각 아래 공원의 숲 너머로 빌딩이 또 다른 숲을 이룬 동쪽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서쪽 난간으로 돌아가자 지긋이 기운 태양이 잔잔히 일렁이는 창장(长江)에 내려앉아 눈부시게 반짝인다.
누각에서 내려와서 언덕배기 가장자리에서 서쪽을 향해 우뚝 선 황학루 앞을 떠나지 못하고 멈칫거리며 몇 번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빌딩 숲과 번잡한 도로에 싸여 있지만, 예전에는 강산을 그림같이 품었을 황학루에서 내려와서 '강산입화(江山入画)'라는 현판이 걸린 패루를 뒤로하고 공원 밖으로 나섰다.
우창 시내 번화가를 훑어보고 장강을 건너서 호텔로 발길을 돌린다. 휘영청 달빛이 내려앉는 언덕 위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상반신을 드러낸 황학루 자태가 황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