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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시시포스 Apr 02. 2024

충북알프스 봄산행

바위병풍 첩첩, 구병산

황사 등으로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모두 농도가 '매우 나쁨'이라는 일기예보다. 거기에 안개까지 끼어 근래 보기 드물게 시계가 흐린 날이다.


청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친구들과 만나서 당진영덕고속도로를 경유해서 구병산 산행 들머리 적암리로 향했다. 속리산 IC에서 보청대로로 빠져나오기까지 고속도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산줄기와 골을 지나며 문의, 피반령, 회인, 수리, 수한, 탄부 등 여러 터널과 회인교, 차정교, 동정교, 보정교, 소계교, 보청천교 등 여러 교량들을 통과했다.


여러 터널 가운데 청주시와 보은군 회인면 사이에 있는 '피반령(皮盤嶺)'이라는 터널의 이름이 특이했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차량의 통행은 뜸한 산 위로 난 피반령 고갯길은 충청 지역 바이크와 자전거 라이더들의 성지로 이름난 곳이다. 고개에 얽힌 여러 전설 가운데 조선시대 청백리 오리 이원익과 관련된 아래 전설이 흥미롭다.


"오리 이원익 대감이 경주 목사로 부임할 때 경주 호장이 청주까지 영접을 나왔다. 대감을 4 인교에 태우고 험준한 고갯길을 넘던 중 호장이 오리대감의 작고 볼품없는 풍모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호장이 "이 고개는 너무 험하여 가마를 타고 넘으면 가마꾼이 지쳐 고개너머 회인에서 며칠씩 쉬어가야 한다"라고 아뢰었다.


대감이 가마에서 내린 후 호장에게 "대감인 내가 걸어가는데 호장인 네놈이 어찌 같이 걷는고"하고 호통을 쳤다. 호장이 무릎으로 고갯길을 피가 나도록 기어서 넘어 '피반령'이라고 했다."

_'나무위키' 참조


수소연료로 달리는 M의 차량은 보청대로로 내려서서 H의 여동생 시댁이 있다는 갈평리 앞을 지나고 지척에 속리산휴게소가 자리한 적암리에 도착했다. 구병산 여러 봉우리들이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며 적암리를 옹위하듯 마을 뒤에 솟아 있다.


마을 뒤쪽으로 내려앉은 산줄기들이 만든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길은 스무여 가옥이 자리 잡은 마을 앞을 동서로 흐르는 적암천으로 흘러든다. 개천 옆길을 따라 적암리 마을 뒤쪽 산행 들머리로 향했다. 산행 들머리 입구에서 입산통제소에서 비치한 입산 기록대장에 인적사항을 기재한 후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예로부터 보은에서는 속리산 천왕봉, 구병산, 금적산을 각각 지아비 산, 지어미 산, 아들 산이라 부르며 이들을 묶어 삼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보은군청은 속리산과 구병산을 잇는 43.9km 구간을 '충북알프스'라는 이름으로 2000년 4월 4일 특허청에 업무표장등록을 했다고 하니 군민의 구병산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알 수 있다.


계곡길로 접어드니 끊길 듯 잦아들었던 물소리는 이내 굵어지며 경사진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가 빠르고 경쾌하다. 등로 옆에서 무성한 초록잎 사이로 솟은 꽃대에 노란색 꽃을 틔우려는 산괴불주머니가 제일 먼저 산객을 반기고, 계곡 좌우로 두어 번 건너며 이어지는 등로 주변으로 현호색, 제비꽃, 진달래 등이 연이어 저마다의 선연한 색깔과 모양새로 봄이 왔음을 알린다.


첫 갈림길에서 왼쪽 방향인 853봉 대신에 반시계 방향으로 크게 도는 코스인 신선대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양쪽 골짜기 물이 하나로 합류하는 부근에서는 얼굴이 땅에 닿을 듯 몸을 잔뜩 수그리고 '풋향기 나는 가인'이라는 꽃말의 남산제비꽃으로 보이는 들꽃과 한참 동안 눈 맞춤을 했다.


계곡길 좌측 비스듬한 산기슭에 어른 키 높이에 두어 평 정도 넓이의 아담한 서낭당이 자리한다. 내부에는 호랑이를 옆에 낀 채 좌우 시립한 동자들 사이에 산신령이 앉아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1월 14일과 10월 14일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마을이 생길 때부터 서낭당이 오랜 세월 이곳에서 자리를 지켰음을 둘레에 서 있는 네댓 그루 고목들이 대신해서 말해주고 있다.


계곡길이 다하고 신선대 쪽 능선을 향해서 비탈을 치고 오르기 시작했다. 생강나무도 안개꽃 마냥 앙증맞은 노란 꽃송이를 틔웠다. 산새가 노래로 산객을 반갑게 맞아준다.


첫 능선마루로 올라서서 배낭을 내리고 앉아서 숨을 고르며 바나나 등으로 심심한 입을 달래며 휴식을 취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능선을 따라 신선대, 824봉, 853봉, 백운대를 지나 구병산 정상까지 힘겨운 산행이 이어질 것이다.


참나무 낙엽이 융단처럼 깔린 가파른 경사를 치고 올랐다. 흙길이 다하는 곳에 나타난 작은 암벽을 밧줄에 의지해서 기어올랐다.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서있는 소나무 몇 그루는 산객에게 잔뜩 구부러지고 뒤틀린 줄기로 온갖 풍상의 세월을 견뎌왔다고 소곤댄다.


아래로 펼쳐진 경관을 잠시 조망하고 뒤돌아서니 앞쪽에 더 높은 암벽이 턱 하니 막아서있다. 산 이름처럼 구병산은 이렇듯 주능선 중간중간 병풍처럼 버티고 선 암벽을 예닐곱 개는 더 내놓지 않을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릿지 등반하듯 암벽 틈을 타고 올라 산행 시작 두 시간여 만에 해발 759미터 신선대에 올라섰다. 양털 구름을 펼친 하늘과 겹겹 밀려나는 파도처럼 층층 쌓인 산군의 파노라마 앞에 마음에도 감흥의 물결이 인다. 적암리 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냈다는 이곳은 그 이름처럼 가히 신선들이 마주 앉아서 장기를 두고 싶을 만큼 장쾌한 경관을 펼쳐 보인다.


신선봉에서 842봉으로 가는 능선 중간에 자리한 암봉에 올라서서 전후를 조망하니 앞쪽으로도 병풍처럼 여러 암봉들이 차례로 솟아 있다. 능선과 암봉 좌우로 우회하는 길 주변에는 줄기가 꺾이거나 뿌리째 뽑혀 드러누운 소나무나 참나무 고목들이 적지 않다. 한편 어떤 소나무들은 몸을 한껏 낮추고 잔가지를 바닥에 수북이 떨구어 놓았는데 이는 몸을 가볍게 하여 모진 바람을 견디기 위함일 것이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곳곳에 보이는 "이곳은 등산로 아님", "위험" 등 표지에 따라 가로막아서는 암벽을 좌우로 우회하며 전진했다. 황사와 미세먼지로 시계가 흐린 경인지역과는 달리 구병산은 바람이 불어서인지 하늘은 맑고 시계도 멀리까지 트였다. 가파른 철계단을 내려가며 조망하는 속리산 천왕봉도 옅은 구름이 수 놓인 파란 하늘을 이고 있다.


앞을 가로막고 출입금지 플래카드를 우회하여 853봉에 올랐다. 능선 앞쪽으로 백운대와 구병산 정상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니 오늘 산행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사계절 변함없이 푸른 소나무들은 능선과 암봉들 주변을 지키고 섰고 우측 산기슭은 머지않아 연초록의 물결로 일렁이며 봄의 향연을 펼칠 떡갈나무 등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활엽수가 숲을 이루었다.


암봉을 우회해서 앞서가는 H와 달리 M과 나는 백운대와 구병산 정상의 두 암벽을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타고 오르기로 의기투합했다. 오금이 저려오는 아찔함과 종아리 작은 긁힘을 감수하고 가는 밧줄을 잡고 암벽과 엉겨 붙어 한참을 씨름했다. 표지석 없이 잔돌로 정성스레 쌓아 올린 돌탑이 자리한 백운대로 올라서니 쾌감이 남다르다.


백운대 바로 옆에 형제처럼 나란히 솟아 있는 해발 876미터 구병산 정상에 올라섰다. 정상에는 먼저 올라온 산객 한 명과 우리 일행 셋 포함 네 명뿐이다. 암벽을 넘고 가파른 경사를 오르내리느라 몸은 지쳤지만 벼르고 벼르던 산림청 지정 100대 명산 중 하나요 영남알프스의 중축인 구병산 정상에 오른 기쁨은 적지 않다.


시간은 정오를 지나 오후 한 시로 향하고 맑던 하늘에서는 우박이 녹아내리는 듯 찬 물방울이 몇 방울씩 떨어진다. 너덜길, 인조목 계단길, 흙길 등이  번갈아 나타나는 위성기지국 쪽 하산길은 깔때기 속에 들어온 듯 깊은 계곡 속으로 내리 꽂히는 급경사길이다. 지그재그로 난 길은 가팔라서 발을 옮길 때마다 고도가 쑥쑥 낮아진다.


좌우로 절벽을 내놓으며 좁은 계곡으로 수렴하던 하산길은 물길과 폭포 위로 놓인 철계단을 지나 계곡 오른편 절벽 아래 '쌀  바위' 전설이 깃든 장소로 이어졌다. 현호색이 띄엄띄엄 군락을 이룬 곳에 다다르자 좌우 계곡에서 내려온 물줄기들이 하나로 합해지며 소리 높여 산객에게 작별의 합창을 선사한다.


산자락이 밭자락으로 내려앉으며 좁았던 골이 나팔처럼 넓어지자 계곡을 가득 채웠던 물소리가 넓게 퍼지며 잦아들었고, 계곡을 끼고 지루하게 이어지던 하산길도 끝이 났다.


적암리 마을 뒤 밭둑의 겨우내 메말랐던 찔레 덩굴은 물이 올랐고 덩굴마다 초록 잎사귀도 작게 틔웠다. 마을 뒤 논밭 사잇길을 지나 마을로 내려서는데 마을어귀 팔각정 앞 바닥에 잘 다듬어져 봉지에 쌓인 파와 머위가 놓여 있다. 할머니 세 분과 H가 파와 머위를 두고  흥정을 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시골장터에서 볼 수 있는 풍경 그대로다.


첩첩산중 보은은 흥미로운 전설을 많이 간직한 고을이다. 산행을 마무리하며 의병장 이명백 장군의 충절이 전해지는 전진바위와 대 성리학자요 청빈한 목민관이었던 보은 현감 여헌 장현광(1554-1637) 관련 전설이 어린 속곳치마바위 등 이곳 적암리의 의미 깊은 명소를 찾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적암리 마을 앞 주차장에서 300여 미터 거리에 있는 속리산휴게소로 이동해서 늦은 점심을 들며 허기를 달랬다. H가 나눠준 봉지 속 파를 지져 막걸리 한 잔 걸치는 봄날 저녁의 호사를 기대하며 귀로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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