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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에타 Dec 22. 2020

체념 증후군

Life Overcomes Me(2019) | Netflix

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란 끊임없이 진로를
바꾸는 모래 폭풍과 비슷하지. 너는 그 폭풍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방향을 바꾼다. 그러면
폭풍도 네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꾸지.
너는 다시 또 모래 폭풍을 피하려고 네 도주로의
방향을 바꾸어버린다. 그러면 폭풍도 다시 네가
도망치는 방향으로 또 방향을 바꾸어버리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 날이 새기 전에
죽음의 신과 얼싸안고 불길한 춤을 추듯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 거야. 왜냐하면 그 폭풍은
어딘가 먼 곳에서 찾아온, 너와 아무 관계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 폭풍은 그러니까
너 자신인 거야. 네 안에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서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눈과
귀를 꽉 틀어막고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가는
일 뿐이야. 그곳에는 어쩌면 태양도 없고
달도 없고 방향도 없고 어떤 경우에는 제대로 된
시간조차 없어. 거기에는 백골을 분쇄해 놓은 것
같은 하얗고 고운 모래가 하늘 높이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지. 그런 모래 폭풍을 상상하란 말야.
-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체념 증후군의 기록>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점차 음식을 거부하고 몸의 반응을 멈추면서 마침내 길고 깊은 수면 상태로 빠져버린 난민 아이들의 이야기다.

이 불가사의한 질환은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 스웨덴, 호주 등지에서 수백 명의 이민자 아이들에게 발생했다. 정부의 폭압, 종교나 이념 갈등, 전쟁, 난민 혐오와 같은 폭력과 무자비함을 견딜 수 없어 연약한 아이들은 세상을 체념해버리는 것이다.

어릴 때 나도 마음이 괴로울 때 잠을 청하는 버릇이 있었다. 잠으로 도피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외부 스트레스로부터 어린 나를 지키려 했던 것 같다. 성인이 된 지금도 때때로 에너지를 최대한 아끼며 동면하는 짐승처럼 잠을 잔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계로 내던져진 ‘기투’라 표현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계로 내던져진 존재로서, 죽음을 향해가는 살아있음과 덧없이 흐르는 시간을 고통스럽게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산다는 건 삶의 모순과 불합리함과 유한성을 끝없이 저항하고 타협하고 체념하는 과정이다.

난민 아이들은 결국 길고 깊은 슬픔의 잠에서 깨어나겠지만, 세상은 여전히 모래 폭풍이 몰아치는 사막이다. 슬픔이 닥쳐올 때마다 ‘눈과 귀를 꽉 틀어막고 모래 폭풍 속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고통스럽겠지만 부디 그들이 이 부조리한 세상을 잘 견디며 살아나가길 빈다. ‘때로 삶이 그들을 압도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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